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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03화 (103/621)
  • 103화 허장성세 (2)

    새로운 글귀에 한빈은 공격을 멈추고 옆으로 빠져서 다음에 나올 문구를 확인했다.

    [흩어진 용린검법의 구결 중 하나의 초식을 완성했습니다. 초식이 활성S화됩니다.]

    [허장성세(虛張聲勢) - 자신의 무공 수위보다 높은 경지의 사자후를 토해 냅니다. 자신보다 무공 수위가 높은 상대일 경우 효과는 찰나에 불과합니다. 단, 한 시진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필요 공력 이 년.]

    허장성세라?

    사자후라면 공력을 목소리에 실어 내뿜는 음공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한빈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맴돌았다.

    사실 사자후는 실전에서는 쓸 수 없는 무공이었다.

    성대에 내공을 집중시키려면 기본 공격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즉, 생사결을 앞두고 혹은 대결이 끝난 상황에서 적을 압도하는 방법으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빈이 얻은 허장성세 초식은 조금 달랐다.

    용린검법의 초식은 내공을 운용하는 것이 아닌 비급에 모인 공력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준비 단계가 필요 없었다.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고수와 대결할 때의 효과는 찰나라고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틈을 만들어 낸다면?

    이 년이라는 공력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한빈은 사파 무인들 사이를 완벽하게 빠져나와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허공을 바라보며 다시 초식을 음미했다.

    누가 보면 지나가다 싸움을 구경하고 있는 동네 한량으로 착각할 듯한 편안한 자세였다.

    한빈이 허공을 바라보며 새로 습득한 초식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이상하게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살기라면 검을 뽑았을 테지만, 이건 묘한 시선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산서삼살이 한빈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빈이 슬쩍 복면을 내렸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산서삼살, 용케 나를 알아보셨구나?”

    “흠.”

    빙혈서생이 헛기침하며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괜히 말을 섞어 봤자 상황만 안 좋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빙혈서생뿐 아니라 흑의살풍과 편육랑아도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역시 산서삼살이네요. 안 죽고 살아 있을 줄 알았다니까.”

    이건 칭찬인지 산서삼살을 깎아내리는 것인지 모를 말이었다.

    빙혈서생이 마지못해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사 공자, 대체 목적이 무엇이오? 청명환의 운송이 목적이라면 빨리 하남정가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오? 왜 여기서 칼질을 해 대는 것입니까?”

    “내가 하남정가랑 무슨 상관이라는 거죠?”

    이것은 진심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빈은 청명환의 호송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한빈이 하남정가에 도착하기 전에 벌어지는 일은 그와 하북팽가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물론 하남정가에 도착하고 나서는 일이 달라진다.

    한빈의 반응에 빙혈서생은 어이가 없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살짝 입을 벌렸다.

    “…….”

    “그건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여기에서 볼일이 있거든요.”

    “대체 무슨 볼일이…….”

    빙혈서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끊었다.

    “쉿, 그건 비밀이죠.”

    한빈이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웃었다.

    그 모습에 빙혈서생은 눈매를 좁혔다.

    그는 한빈이 정파인이 아니라는 데 손목을 걸 수 있었다.

    강남 정파의 기둥 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하남정가 가주의 생명이 걸린 운송을 자신과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는 정파인이 누가 있을까?

    거기에 그렇게 말하는 자가 운송의 책임자라니?

    사파 무인들의 싸움은 그 뒤로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날 즈음에도 계속되었다.

    그때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빙혈서생이 물었다.

    “사 공자, 어디 가십니까?”

    “여기 계속 있게요? 이제 싸움도 끝나 가니 가 봐야죠.”

    이것은 진심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파 무인에게 얻을 구결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한빈이 빙긋 웃자 빙혈서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까지 저 사파 무인들 틈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한빈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다니?

    그 표정을 본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회일 텐데요?”

    한빈이 턱짓으로 포위망 중 구멍 난 곳을 가리켰다.

    빙혈서생이 그곳을 보다니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 고맙소, 사 공자.”

    “아, 내가 왜 이런 걸 말해 주고 그러지? 싸우다 정들었나 보네.”

    한빈의 혼잣말에 빙혈서생이 어이없다는 듯 받아쳤다.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가 일방적으로 맞은 거지, 어떻게 싸운 게 되오?”

    “음, 그건 알아서 해석하시고 빨리 빠져나가시죠. 잘못해서 아는 얼굴을 밟으면 그것도 기분 나쁜 일이니까요. 가면서 목 조심하시고요.”

    “허.”

    빙혈서생은 옅은 탄성을 뱉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빈이 뱉은 마지막 말이 반은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뒹구는 머리를 밟기 싫다는 말은 정파의 입에서 나올 농담은 아니었다.

    빙혈서생이 나머지 산서삼살에게 턱짓으로 신호했다.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자는 뜻이었다.

    산서삼살이 모두 일어나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길 때였다.

    한빈이 빙혈서생의 소매를 잡았다.

    탁!

    놀란 빙혈서생은 그 자리에서 석상이 되었다.

    고개를 돌린 빙혈서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직도 우리가 할 일이 남아 있소?”

    “그쪽으로 가면 죽음의 문이 열릴 거예요.”

    “사문(死門)이라면, 저 앞에 진법이라도 펼쳐져 있다는 말이오?”

    “내 생각에는 진법보다도 더할 것 같은데…….”

    한빈은 말끝을 흐렸다.

    멀리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악!”

    “앗!”

    비명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대는 고수였다.

    그것도 피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으로 봐서 여기에서 칼을 맞대고 있는 사파 무리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가 분명했다.

    한빈은 비명이 울리는 곳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삼백 걸음.”

    빙혈서생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삼백 걸음 밖에 뭐가 있단 말이오?”

    “적이 오고 있죠.”

    “적이라면…….”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도 당해 낼 수 없는 적.”

    “그게 무슨 말이오?”

    “얼마 전부터 저 방향에서는 산새들조차 쥐 죽은 듯 기척을 죽였죠.”

    한빈이 방금 비명이 울린 곳을 가리켰다.

    “그야 사파 무사들이 소란을 피우니 당연한 게 아니겠소?”

    “산짐승도 그렇고 날짐승조차 저쪽은 피하고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건 기세로 누른 것이 분명하죠.”

    말을 마친 한빈은 그쪽을 바라봤다.

    빙혈서생도 한빈의 말이 그럴듯해 보였는지 고개를 돌렸다.

    한빈의 말에는 일정 부분 일리가 있었다.

    놀란 날짐승이 주변에서 퍼덕거린다든가, 그게 아니라도 먹이를 찾는 매라도 주변을 맴돌아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저것은 누군가가 한정된 공간을 기세로 누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초절정 고수.

    그것도 화경을 앞둔 최상급 이상이라는 말이었다.

    숲속을 바라보던 빙혈서생은 고개를 갸웃하고 한빈을 바라봤다.

    계속 무리 사이를 누비며 칼질을 해 대던 한빈이었다.

    그 와중에도 주변의 상황을 눈에 담고 분석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빙혈서생이 한빈과 함께 숲속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근처에서 비명이 다시 울렸다.

    “악!”

    그 비명을 시작으로 포위망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게 대체…….”

    “헉!”

    외마디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사파 무인들은 심상치 않은 상황에 상대를 공격하던 병장기를 멈췄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숲속 가운데에서 이상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분칠을 한 듯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저잣거리에서 봤다면 광대라 확신할 수 있는 인상의 사내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도(刀)가 들려 있었다.

    “저자는 뭐지?”

    “뭐야? 저런 놈은 본 적이 없는데?”

    “그러고 보니 복면도 안 썼네?”

    이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사파 무사들은 신분을 숨기기 위해 모두가 복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의 외모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한빈은 그의 걸음을 유심히 봤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나지막이 외쳤다.

    “화경!”

    한빈의 말에 산서삼살이 입을 떡 벌렸다.

    초절정과 화경은 무위를 나누는 단계상 한 끗 차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어릴 적 영약 좀 먹어 봤다 하는 고수 중 대부분이 초절정에 머무른다.

    화경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깨달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럼 화경에 들면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공간 장악 능력이었다.

    한빈이 사내의 걸음을 유심히 보고 화경이라 판단한 것은 그의 발이 풀을 밟지 않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초상비(草上飛)라는 부르는 수법이다.

    날듯이 풀 위를 걷는 초식.

    내공을 이용한다면 초절정의 무위만 지녀도 흉내는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초절정이라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시전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공간을 장악해야지만 쓸 수 있는 수법.

    게다가 저 도신(刀身)이 눈에 익었다.

    한빈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저건 파혈도(破血刀)?”

    “파혈도를 쓴다면 잔혈마도 아니오?”

    식견이 넓은 빙혈서생이 물었다.

    한빈은 그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빙혈서생이 사내를 바라봤다.

    도신의 위쪽에 톱니처럼 생긴 홈이 파여 있었다.

    분명 소문으로 들었던 파혈도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거기에 더해 분칠을 한 듯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아니 진짜 분칠을 한 것이 분명했다.

    보통 사람의 얼굴이 저리 흴 수는 없었으니까.

    화장을 하는 사내.

    거기에 파혈도라?

    그것은 한빈의 말대로 잔혈마도밖에는 없었다.

    얼굴에 칠한 분가루가 멀쩡한 것으로 봐서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파란 빙혈서생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빙혈서생은 고개를 돌렸다.

    의지할 사람이 한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 공자…….”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한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빙혈서생이 낮게 외쳤다.

    “튀었군. 이런 악마 같은 놈!”

    흑의살풍과 편육랑아도 한빈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눈가를 떨었다.

    편육랑아가 외쳤다.

    “악마!”

    그것은 사실이었다. 한빈은 산서삼살에게 있어서는 재앙을 몰고 다니는 악마였다.

    산서삼살이 없어진 한빈을 욕하고 있을 때였다.

    잔혈마도는 한철 궤를 가운데에 두고 싸우는 무리를 보며 헛웃음을 쳤다.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던 잔혈마도는 허리춤에서 다른 사파 무인에게 빼앗은 한철 궤를 꺼냈다.

    한철 궤를 꺼낸 잔혈마도가 말했다.

    “저걸 두고 싸우는 걸 보니 이건 가짜라는 말이네.”

    말을 마친 잔혈마도는 손에 든 한철 궤의 뚜껑을 튕겼다.

    순간 봉인이 뜯겨 윗부분이 날아갔다.

    모습을 드러내는 영약.

    잔혈마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영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일단 이놈이 진짜일 수도 있으니 먹어 둘게, 애들아!”

    말을 마친 잔혈마도가 무인들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바닥에 떨어진 다른 한철 궤를 잡으려 했다.

    순간 사파 무인 중 하나가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휙! 털썩!

    동시에 뭔가가 바닥에 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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