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물밑 전쟁 (5)
사파인들은 왜 이곳에 온 것일까?
그것은 무학의 끝을 향한 욕심이라는 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강호라는 거대한 강 위에 각 문파가 몸을 맡긴 채 편안히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 밑으로는 오리가 발길질하듯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한빈이나 그들이나, 모두 무학의 끝을 보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마찬가지.
물밑 전쟁을 하는 꼴이었다.
이제 먹이가 되느냐 사냥꾼이 되느냐의 문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빈은 허공을 바라보며 이제까지 획득한 용린검법의 구결을 정리했다.
공력과 기초 체력을 담은 기본편.
용린검법의 영험한 초식을 담은 응용편.
용린검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융합편.
그 뒤에 무엇이 있을까?
일단은 기본편의 책장을 추가하는 것이 먼저였다.
달빛을 받은 한빈의 모습이 월아의 검신만큼이나 예리하게 반짝였다.
고민도 잠시, 한빈은 구결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구걸십팔보와 전광석화를 동시에 운용하자 한빈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 * *
같은 시각 영단산 초입.
여러 개의 그림자가 수풀 사이로 나타났다 없어졌다를 반복했다.
의복의 모양을 달라도 모두 색은 같았다.
모두가 검은색의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얼굴에 복면까지 쓰고 있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파들 사이에 은밀히 퍼진 소문.
그것은 산서삼살이 청명환을 탈취한 후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산서삼살보다 무공이 위에 있는 고수도.
그보다 무공이 아래인 하수도.
모두가 영약을 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운 좋게 영약을 탈취한다 해도 그것을 지킬 힘은 그들에게 없었다.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다는 무인은 여기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신분을 숨기기 위해 야행복을 입고 복면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복면도 야행복도 없이 홀로 산을 오르는 이가 있었다.
터벅터벅.
남들은 발소리를 숨기는 데 비해 그는 마치 자신의 존재를 뽐내기라도 하듯 내공을 실어 움직이고 있었다.
분을 칠했는지 하얀 얼굴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거기에 붉은색을 칠한 듯한 입술.
얼굴만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모습이었다.
그는 잔혈마도(戔血魔刀) 임길태였다.
마도 서열 이십 위 안에 드는 사내였다.
그의 도(刀)에 피가 마를 날이 없다 해서 붙여진 별호가 바로 잔혈마도였다.
그가 쓰는 파혈도(破血刀)의 도신을 자세히 보면 윗부분에 홈이 파여 있었다.
이 홈을 이용해 상대의 검을 낚아채 부러뜨리는 금검일도(擒劍一刀)는 그의 성명 절기였다.
파혈도를 등에 찬 잔혈마도 임길태는 평지를 걷듯 산을 올랐다.
그때 여러 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챙! 챙!
임길태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복면을 쓴 사파 무인들이 청명환이 든 한철 궤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임길태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임길태는 난장판의 중앙으로 서서히 걸어갔다.
챙! 챙!
임길태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기루에서 들려오는 칠현금 소리라도 되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임길태의 기세 때문일까?
울려 퍼지던 병장기 소리가 서서히 멈췄다.
챙!
마지막으로 검을 멈춘 사파 무인이 고개를 돌려 임길태를 바라봤다.
“대체 웬 놈이냐?”
“…….”
임길태는 그의 질문에 웃기만 했다.
입꼬리를 기분 좋게 올리는 모습이 누가 봐도 비웃음이었다.
기분 나쁜 웃음에 미간을 좁힌 사파 무인이 다시 물었다.
“누구냐고 해도? 이놈이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구나.”
“풋!”
“이게, 감히 웃어?”
“내 별호를 들은 놈 중에 목이 온전히 달려 있는 놈이 없을걸? 이걸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임길태는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주변을 향해 묘한 비웃음을 보냈다.
십여 명이 어우러져 싸우는 전장 한복판에 서 있는 임길태의 모습은 여유 만만했다.
이쯤 되자 사파 무인들도 경계하기 시작했다.
“누군지 말씀해 주시오.”
이제는 약간 존대를 하는 사파 무인.
임길태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강호에서는 잔혈마도라 부르기도 하더라.”
장난스러운 그의 말투에도 여기저기서 헛숨이 튀어나왔다.
“헉!”
“천산의 잔혈마도?”
천산이라면 마교의 본거지가 있는 천산 산맥을 일컫는 것이었다.
잔혈마도라는 별호에 대해서는 모르는 강호인이 드물었다.
다른 이도 끼어들었다.
“마교의 고수? 그 잔혹하다는……. 아니, 그 잔혈마도가 당신?”
여기저기에 웅성대는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다시 물었다.
“신교의 고수가 여기에는 어쩐 일입니까?”
마교라 아니하고 신교라 한 것은 잔혈마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 모습에 잔혈마도 임길태가 피식 웃었다.
“보면 몰라? 내가 왜 왔겠니? 너희는 내가 여기 놀러 온 것처럼 보이니?”
남성도 여성도 아닌 요사스러운 말투에 사파 무인들이 한발 물러서며 외쳤다.
“마교인이 무슨 일로 하남까지 왔단 말입니까?”
“강북에 볼일이 있어 가다가, 좋은 물건이 있다길래 와 봤지.”
말을 마친 임길태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사파 무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뜻이요?”
“너희들한테 청명환이라는 좋은 물건이 있다지? 일단 내놔 봐, 귀염둥이들.”
누가 봐도 비꼬는 말투.
동시에 사파 무인들이 땅에 떨어진 조그마한 보따리에 시선을 옮겼다.
순간 오가는 눈빛.
사파 무인들의 검이 임길태를 향했다.
눈빛을 교환한 사파 무인들은 임길태를 향해 동시에 달려갔다.
슁!
사방에서 번쩍이는 검날.
임길태는 오른손을 거둬들이며 등에서 파혈도를 뽑았다.
획!
동시에 그들의 중앙을 가로질렀다.
임길태가 사파 무인들을 가로지르자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틱! 틱!
묘한 소리가 두어 번 울린 후 임길태는 그들이 오던 방향을 완벽하게 돌파했다.
뒤돌아선 임길태가 사파 무인들을 향해 턱짓했다.
사파 무인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임길태가 손가락을 튕겼다.
탕!
동시에 그들의 병장기가 반 토막이 나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툭! 툭!
반 토막이 난 도신과 검신 들이 땅에 박혔다.
“이런 제길!”
“진짜 잔혈마도구나!”
모두가 어금니를 깨물자 임길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저벅저벅.
내공을 완전히 개방하자 임길태의 주변에서 혈향이 맴돌았다.
그 기세에 사파 무인들이 반 토막 난 병장기를 떨어뜨렸다.
탁! 탁!
동시에 맨 앞에 있던 사파 무인이 외쳤다.
“졌소이다. 그러니…….”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스윽!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길태의 칼이 허공에 한 획을 긋듯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순간 맨 앞에 선 사파 무인의 목에 선혈이 생겨났다.
임길태가 씩 웃더니 사파 무인의 머리를 검지로 톡 쳤다.
동시에 목이 떨어졌다.
난데없는 피 분수에 남은 사파 무인들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싸움이라면 기죽지 않은 사파 무인에게도 임길태의 모습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그들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그중 하나가 힘겹게 입을 뗐다.
“왜, 왜 그러시오, 잔혈마도. 항복한다고 하지 않았소?”
임길태가 파혈도를 털었다.
팟!
“항복은 아직 힘이 남아 있는 놈이 하는 거야. 힘없는 놈은 항복을 선택할 자격도 없는 거고……. 너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말을 마친 임길태는 왼손으로 도신에 남은 핏방울을 쓸어내렸다.
스윽.
왼손에 묻은 혈흔을 얼굴 가까이로 가져가 확인한 임길태가 말을 이었다.
“너무 피가 묽네. 피가 조금 더 필요한 것 같아. 우리 애기가 배고파하잖아.”
애기라 하면 그의 애병인 파혈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파혈도를 오른손으로 돌리며 사파 무인에게 다가갔다.
터벅터벅.
그 모습에 사파 무인 하나가 재빨리 외쳤다.
“저기 있소, 저기!”
“대체 뭐가 있다는 거니?”
“당신이 찾는 청명환 말이오. 청명환이 담겨 있는 한철 궤가 저기 있소!”
누군가 바닥에 있는 보따리를 풀었다.
모습을 드러내는 한철 궤.
임길태가 그것을 보더니 헛기침했다.
“흠.”
냉기를 풀풀 풍기는 것으로 봐서 진짜 한철 궤가 맞았다.
영약을 운반하기에 적합한 상자.
임길태는 저 한철 궤 안에 곤륜의 영단인 청명환이 들어 있다고 확신했다.
문제는 남은 사파 무인들의 처리였다.
임길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사파 무인들이 서로 눈빛을 맞추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임길태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사파 무인들 사이.
슉! 슉!
임길태의 도(刀)가 그들 사이를 갈랐다.
툭! 툭!
사파 무인들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모두를 제거한 후 한철 궤를 집어 든 임길태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 *
한편, 같은 시각 한빈은 다른 곳에서 결전을 펼치고 있는 사파 무인들을 헤집고 다니며 구결을 수집하고 있었다.
영단산의 풀숲에서 한빈의 월아가 춤을 추었다.
휙!
의미 없이 검날이 움직일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새로운 구결이 나타나기도 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응용편 중 허(虛)를 획득하셨습니다.]
비록 인급 구결은 아니지만, 용린겁법을 발전시킬 응용편의 구결이었다.
[응용편 – 허(虛)]
[용용편 인급 – 자(自), 자(自)]
휙! 휙!
하지만, 헛수고일 때도 있었다.
[……부족한 책장으로 흡수를 보류합니다.]
획이 분해되어 점이 되어 사라진다.
그 모습에 한빈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까운 구결!”
뭐, 한빈의 혼잣말에 신경 쓰는 사파 무인들은 없었다.
오직 앞에 있는 한철 궤를 차지하기 위해 병장기를 휘두를 뿐이었다.
그렇다고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지는 않았다.
전투 불능 상태가 되면 알아서 물러나는 예의는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외쳤다.
“산서삼살이다!”
“산서삼살? 그렇다면 진짜 청명환을 가지고 있겠네!”
“그럼 우리가 가진 건 가짜고?”
“아까도 다른 보따리를 봤잖아. 그러니 어떤 게 진짜인지 모르지. 아마도 저놈들이 가진 게 진짜가 맞을 거야.”
한 무리의 사파 무인이 속닥이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동시에 그들과 싸우던 사파 무인들도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한빈도 달렸다.
한빈이 원하는 것은 한철 궤가 든 보따리가 아닌 싸움터였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 * *
사파 무인의 포위망을 잘 빠져나가던 산서삼살은 산 중턱에서 퇴로가 막혔다.
빙혈서생 소경운의 기지로 보따리를 내던져 복면을 뺏어 쓰고 도망가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편육랑아의 덩치가 문제였다.
흑의살풍과 빙혈서생의 경우 복면만 쓰면 다른 사파 무인과 구별이 안 되었다. 하지만, 편육랑아는 낭아봉을 버리고 도주했음에도 한눈에 표시가 났다.
빙혈서생 소경운은 지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마차에 실린 한철 궤는 모두가 가짜였다.
진짜는 아예 처음부터 가지고 오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