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물밑 전쟁 (4)
같은 시각 영단산 정상.
장자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으스스합니다. 왠지 모를 살기도 느껴지고요.”
“뭐 산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군이 말한 약초는 다 캐신 거 맞습니까?”
이무명이 묻자 장자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캤습니다. 주군이 말한 약재를 제조할 재료는 다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장자명이 뒤에 봇짐을 가리키자 이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뭔가 기억이 났는지 품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쓱.
달빛을 받은 이무명의 단검은 떨어지는 낙엽도 벨 수 있을 것 같이 예기를 발했다.
그 모습에 장자명이 놀라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제가 잘못이라도…….”
이무명이 천천히 걸어왔다.
터벅터벅.
난데없는 상황에 장자명은 뒷걸음치며 외쳤다.
“혹시 살인 멸구? 사 공자가 시킨 겁니까?”
그 외침에 이무명이 황당하다는 듯 장자명을 바라봤다.
하지만, 오른손에 쥔 단검은 그대로였다.
장자명이 외쳤다.
“살려 주시오, 이 호위!”
“뭔가 오해가…….”
이무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자명이 뒷걸음치며 외쳤다.
“그냥 살려 주시오. 사 공자가 시키는 대로 다 하지 않았소, 그런데 살인 멸구라니 이게 웬 말이오!”
이젠 짐을 놓아 둔 벽까지 몰린 상태.
그래도 이무명은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문 장자명이 질끈 눈을 감고 외쳤다.
“아, 악마 같은 놈!”
그 말에 이무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장자명은 주군인 한빈을 어떻게 보길래 저런 의문을 갖는다는 말인가?
이무명은 한숨을 겨우 참았다.
그에게 한빈은 주군이기 전에 친구였다.
한빈은 검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벗이었다.
한빈과의 만남에서 떠올렸던 것이 바로 백아절현(伯牙絶絃)이었다.
그것은 백아라는 거문고의 명인과 종자기라는 친구에 관한 이야기.
이무명은 언젠가 한빈에게 누가 백아고 누가 종자기일까를 물었다.
그때 한빈은 누가 종자기이고 누가 백아면 어떠냐고 했다. 검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았으면 그게 전부라 했다.
그 대화는 아직도 이무명의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장자명은 왜 저런 반응을 보일까?
마치 한빈을 악마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무명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감은 장자명을 바라보던 이우명이 입을 열었다.
“장 의원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장자명이 눈을 떴다.
“그럼 대체 왜…….”
이무명은 말없이 구석에 놓인 짐 중에 동경을 꺼냈다.
동경에 얼굴을 비친 이무명은 단검으로 자신의 수염을 밀기 시작했다.
일단 단검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장자명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그것도 잠시, 장자명은 의문을 떠올렸다.
이 산중에.
그것도 달이 휘영청 떠 있는 이 야밤에.
얼굴을 보여 줄 처자도 없는데 왜 난데없이 수염을 깎는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검을 들고 있는 이무명에게 섣불리 다가갈 수는 없었다.
장자명은 한 걸음 물러선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
이무명은 장자명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쓱. 쓱.
그는 말없이 날카로운 단검으로 수염을 밀 뿐이었다.
쓱.
달빛에 이무명의 맨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장자명은 고개를 더 기울였다.
이무명은 장자명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짐 속에서 옷 한 벌을 꺼냈다.
그것은 붉은 무복이었다.
장자명은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 붉은 무복은 한빈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무명이 붉은 무복으로 갈아입자 장자명의 눈이 커졌다.
“헉!”
놀란 장자명이 이무명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이무명이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사, 사 공자와 닮아도 너무 닮지 않았습니까? 혹시 진짜 사 공자십니까?”
“하하, 옷을 비슷하게 입으면 그런 소리를 듣더군요.”
“그럼 정말 이 호위라는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붉은 무복으로는 왜 갈아입으신 겁니까?”
“이것도 주군의 명령입니다.”
“그럼, 천수장에 오셔서 수염을 기르신 것도 사 공자의 명령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 사 공자는 오늘 맡길 임무를 당시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장자명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이무명이 처음 왔을 때에는 사 공자와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남정가의 무복이 아닌 일반 경장 차림으로 입었을 때는 더 비슷했다.
생각해 보니 이무명이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이 표행이 시작되기 한참 전이었다.
수염을 기르고 나서는 사 공자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쏙 들어갔고 말이다.
장자명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모든 것이 이번 임무를 맡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다면 사 공자 한빈은 이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자명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모든 것이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어!”
장자명의 넋두리에 이무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주군인 한빈에게 악마라고 하지 않나?
갑자기 부처님이라고 하지 않나?
장자명의 정신 상태가 심히 걱정되었다.
“괜찮으십니까?”
“허, 괜찮습니다.”
정신을 차린 장자명이 심호흡하자 이무명이 짐 속에서 물이 담긴 죽통을 꺼냈다.
“이거라도 드시고 정신 차리시죠.”
“감사합니다.”
죽통에 든 물을 쭉 들이켠 장자명이 말했다.
“지금 보니 사 공자와 너무 비슷합니다.”
“하하, 그렇지요. 전에 비슷하게 입고 저잣거리에 나가니 사람들이 못 알아보더군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차이는 꽤 있습니다. 하하.”
이무명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웃자 긴장이 풀린 장자명도 따라 웃었다.
“하하. 네, 맞습니다. 비슷하긴 한데, 다른 점도 있습니다. 그중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사실은 이무명 호위가 사 공자보다 훨씬 잘생겼다는 것이지요.”
말을 마친 장자명이 엄지를 착 치켜올렸다.
그때 뒤쪽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람의 기척을 느낀 장자명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비명을 질렀다.
“헉.”
그곳에는 다름 아닌 한빈이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활짝 웃는 얼굴로 천천히 장자명에게 다가갔다.
“장 의원, 멀리서 들어 보니 별 이상한 말이 오가던데요. 무슨 일이죠?”
“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사 공자님의 인품에 대해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제 입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입이 닳았습니다.”
“…….”
한빈이 말없이 바라보자 장자명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공자님을 칭송하느라 입이 다 닳은 것입니다.”
장자명이 활짝 웃자 옆에 있던 이무명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남의 바다 한가운데에 떨어뜨려 놔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적응력이었다.
방금 자신을 오해해서 뒷걸음치던 장자명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무명이 기가 찬 표정으로 장자명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빈은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장 의원.”
한빈이 환한 얼굴로 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 따뜻한 손길에 묘한 불안감이 장자명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약초는 다 캤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아까 뒤에서 지켜보며 들었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빈의 말에 장자명은 석상이 되어 버렸다.
약초를 다 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뒤에 대화까지도 모두 들었던 것이 아니던가?
장자명이 멍하게 있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뭐, 장 의원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알겠습니다.”
“헉.”
장자명이 입을 딱 벌렸다.
그때 설화가 끼어들었다.
“공자님,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아, 그렇지.”
말을 마친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무명이 방금 벗어 놓은 옷을 지금 옷 위에 입었다.
그럼에도 옷은 딱 맞춘 옷처럼 한빈에게 들어맞았다.
장자명은 이 대목에서 다시 놀라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한빈은 이무명과 장자명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이건 다음 임무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주군.”
“알겠습니다, 사 공자님.”
장자명이 펴 보려 하자 한빈이 말렸다.
“나중에 펴 보시지요.”
“언제요?”
“그건 설화가 가르쳐 드릴 겁니다.”
한빈이 턱짓으로 설화를 가리켰다.
시선을 받은 설화가 빙긋 웃으며 가슴을 탁탁 쳤다.
“이제부터 저와 함께 산을 내려가시면 되는 거예요.”
“너를 따르라고?”
장자명이 고개를 갸웃하자 설화가 답했다.
“네, 공자님 믿으시죠?”
“그야 그렇지만…….”
“공자님이 제일 믿는 게 저니까. 저를 따라오시면 돼요.”
“아무리 그래도…….”
장자명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씩 웃으며 다시 설화를 가리켰다.
“밤에는 설화만큼 밤눈이 밝은 아이가 없으니, 설화를 따르면 됩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가 시킨 대로. 알겠죠?”
한빈의 말에 장자명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기만 한 시녀 설화가 이 야밤에 어떻게 산길을 안내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한빈이 이무명에게 물었다.
“이 호위, 한철 궤는 잘 챙겼습니까?”
“네.”
이무명이 짐에서 한철 궤를 꺼내자 한빈이 다시 물었다.
“봉인이 훼손되지 않게 보관했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무명은 한철 궤를 들어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부분을 보여 주며 한빈에게 건넸다.
한빈이 그것을 건네받았다.
“네, 고맙습니다.”
그 모습에 설화가 혀를 찼다.
지금 받은 것이 정화 부인이 건넨 진짜 한철 궤라는 것을 설화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 * *
잠시 후.
그들은 영단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달빛만을 의지해 산길을 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앞서 나가는 설화는 거침이 없었다.
휙, 휙.
그녀의 동작은 마치 산짐승 같았다.
장자명은 그녀의 출신이 화전민이라 생각했다. 산에서 밭을 일구며 사는 화전민이라면 이렇게 산을 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장자명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무명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지가 높은 고수의 경우 기감만으로 사물의 위치를 판단할 수 있긴 했다.
그래도 설화처럼 자연스럽게 어둠을 헤쳐 나갈 수는 없었다.
이무명은 어렴풋이 설화가 평범한 삶은 거쳐 온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챙! 챙!
“어서 내놓거라!”
“아니다, 그것은 내 물건이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만 봐서는 전쟁이라도 난 것 같았다.
설화는 아무렇지 않게 그곳을 피해 길을 잡았다.
그 뒤를 따르는 장자명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챙! 챙!
다시 병장기 소리가 산자락에 울렸다.
장자명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산길 곳곳에서 벌어지는 싸움판.
장자명은 이곳을 빠져나가기란 하늘에 별 따기라 생각했다.
한참을 걷던 장자명은 의문이 들었다.
병장기 소리를 울려도 적과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장자명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설화를 바라봤다.
그때 앞선 설화가 조용히 말했다.
“속도를 조금 더 높일게요.”
그 목소리에 장자명의 안색이 변했다.
* * *
한편 영단산 정상에 홀로 남은 한빈은 허리에 찬 월아를 뽑았다.
스르릉!
달빛을 받은 월아가 검신을 드러냈다.
한빈이 월아를 향해 나지막이 외쳤다.
“오늘은 신나게 놀아 보자꾸나.”
그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진했다.
이제 구결을 수집할 시간이 된 것이다.
쿵. 쿵.
한빈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산자락을 바라봤다.
지금 몰려든 사파의 무인들에게 수많은 구결이 있음을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