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99화 (99/621)
  • 99화. 물밑 전쟁 (3)

    한빈이 다가오자 윤용호가 하던 일을 멈췄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충 자리만 잡으시면 됩니다.”

    한빈이 동료 표사가 펼치고 있는 도구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간에 놔둘 화로, 해충을 막기 위한 회향초 가루 그리고 한기를 막기 위한 가죽 등을 꺼내고 있었다.

    한빈은 그것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윤용호는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밖에서 주무시는데 철저히 준비해야죠.”

    “아닙니다. 저는 지금 옮기는 물건이 물건이니만큼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도…….”

    “아닙니다. 언제든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맞습니다. 이제 하남정가가 지척입니다.”

    “흠.”

    윤용호는 한빈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번 표행에서 한빈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뀐 윤용호였다.

    한빈의 무위를 낭인왕 이세명에게 전하면 그는 과연 믿을까?

    신기에 가까운 검술은 대체 어디에서 배웠단 말인가?

    덕분에 이제는 한빈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윤용호였다.

    윤용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때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설화가 마차 위, 비둘기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윤용호는 그 모습에 눈매를 좁혔다.

    설화가 하는 행동이 이상해서였다.

    저 비둘기는 적을 위협할 내용의 편지를 전달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쓴 채 비둘기가 있는 마차 위로 향한다는 게 이상했다.

    그들이 봤을 때에는 한빈이 붓으로 쪽지를 쓰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다.

    그때였다.

    설화가 단검을 꺼내더니 비둘기를 가둬 놓은 새장을 단번에 열었다.

    구구구! 구구구!

    하얀 비둘기가 영단산 위로 날아올랐다.

    적어도 스무 마리 정도는 되는 비둘기가 하늘 위로 날아오르자 나무 위에 쉬고 있던 다른 새들도 푸드덕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그중 반 정도는 하늘 위에서 방향을 잡으려는 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소란도 잠시 산 중턱은 다시 고요함으로 물들었다.

    윤용호가 한빈에게 물었다.

    “전서구는 왜 다 날리신 겁니까?”

    “이제는 필요 없으니까요.”

    한빈이 빙긋 웃자 윤용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애지중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어제 일이고 이제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 돌려보내야죠. 그냥 놔두면 다 짐입니다.”

    “그럼 필요한 만큼만 가져오시지, 필요 없는 비둘기를 이리 많이 왜 가져오셔서는…….”

    윤용호는 말끝을 흐렸다.

    방금 이상한 광경을 봤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비둘기가 날갯짓을 멈추고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비둘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툭!

    부르르 떨고 있는 비둘기를 자세히 보니 전서 통이 매달려 있었다.

    “이게 뭡니까?”

    “보시다시피 전서구를 견제하는 무리가 여기를 둘러싸고 있지요. 비둘기에 매단 전서 통은 제가 미리 써 놓은 것이고요.”

    “헉, 그럼 빨리 피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또 무슨 이유입니까?”

    “그들의 목표는 우리가 아닌 청명환이니까요.”

    “그럼 빨리 자리를 피해야…….”

    그때 다시 비둘기가 한 마리 떨어졌다.

    툭.

    윤용호의 눈이 커졌다.

    떨어지는 방향으로 봐서 상대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기세라면 천라지망을 구축했음이 분명했다.

    한기가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윤용호는 다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말랭이를 씹고 있었다.

    그때 다시 비둘기 한 마리가 떨어졌다.

    툭.

    몇 마리 안 되는 비둘기지만, 윤용호에게는 소나기처럼 느껴졌다.

    그 소나기는 바로 지금이 위기 상황이라는 증거.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지금 윤용호에게는 소나기를 피할 우산이 없었다.

    물론 한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렇게 태평하다니?

    윤용호는 한빈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이제까지 한빈이 해 왔던 일로 보면 분명 계책이 있을 터였지만, 윤용호로서는 불안하기만 했다.

    툭.

    떨어지는 비둘기 숫자만큼 윤용호의 가슴도 뛰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일단 표사 일행부터 먼저 움직이죠. 조용히 빠져나가십시오. 검오 너도 윤용호 표두를 따라라.”

    “아, 알겠습니다.”

    검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몇 년간 수적 노릇을 해 왔던 검오도 겁을 먹었는지 말을 더듬었다.

    한빈이 윤용호에게 말했다.

    “짐과 말은 그냥 놔두고 몸만 가십시오. 눈에 띄는 짐은 절대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또 왜입니까?”

    “한철 궤 크기 이상의 짐을 드는 순간 놈들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한빈이 한철 궤의 모양을 손가락으로 그리자 윤용호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윤용호는 재빨리 동료 표사와 마부를 챙겼다.

    “우리 먼저 빠져나가세나.”

    “윤 표두님, 어떻게 저희만 빠져나갑니까?”

    “이건 명령일세.”

    “명령이라니요?”

    “표물의 주인이 내리는 명령이며 우리 국주님이 내리는 명령일세!”

    “네, 따르겠습니다.”

    표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선 윤용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모든 것이 낭인왕 이세명이 말한 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분명 위험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몸부터 지키라는 것이 천리 표국의 국주이자 낭인왕인 이세명의 명령이었다.

    이제는 그 명령에 따를 때가 온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한빈 일행을 버리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한빈이 먼저 말을 했으니 어떻게든 그도 자리를 피할 터였다.

    한빈이 말했다.

    “여유가 되시면 검오는 하북팽가로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윤용호가 깊이 포권하자 검오도 따라서 포권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울먹이는 듯한 검오의 표정에 한빈은 미소로 답했다.

    “나중에 보자.”

    천리 표국 사람들과 검오는 봇짐조차 모두 내려놓은 채 천천히 맨몸으로 산을 내려갔다.

    터벅터벅.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한빈은 씩 웃었다.

    그들을 쫓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척들은 주변에 남아 있었다.

    모든 시선이 마차와 한빈에게 모인 것 같았다.

    한빈은 조용히 마차를 향해 들어가며 다리에 찬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에 산서삼살이 움찔했다.

    또 무슨 사고를 칠 것인지 염려되어서였다.

    툭! 툭!

    마차 안에서 나무가 분리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한빈이 기다란 나무 상자를 들고 나왔다.

    터벅터벅.

    한빈은 묘하게 발소리를 내며 산서삼살에게 걸어왔다.

    그들 앞에 온 한빈은 바닥에 기다란 나무 상자를 내려놨다.

    탁!

    빙혈서생이 한빈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물건입니까?”

    “뭐, 중요한 물건도 아니니 그냥 보여 드리죠.”

    한빈이 나무 상자를 열었다.

    덜컹.

    나무 상자 속을 본 모두가 입을 벌렸다.

    상자 속에는 똑같은 모양의 한철 궤가 여덟 개나 들어 있었다.

    빙혈서생이 물었다.

    “여덟 개나 되는 한철 궤는 다 무엇입니까? 혹시…….”

    “여덟 개가 아닙니다.”

    한빈이 손에 든 한철 궤를 나무 상자 속에 놓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아홉 개가 되었군요.”

    “대체 이것으로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한철 궤가 값이 나가는 건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맡길 테니…….”

    “네?”

    “알아서 하십시오. 만나서…….”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설화에게 눈짓했다.

    한빈의 신호를 받은 설화가 주춤주춤 물러선다.

    이제는 한빈 일행과 산서삼살이 다섯 걸음 이상 떨어진 상태.

    한빈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협! 살려 주시죠!”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빙혈서생이 당황하며 묻자 한빈이 더 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한철 궤는 저기에 모두 있습니다. 저도 어떤 것이 진짜인지 모릅니다. 제발 살려 주시죠!”

    “왜, 왜 그러십니까?”

    빙혈서생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한빈은 목소리를 점점 높였다.

    “제 돈과 청명환 모두 당신들 산서삼살의 것입니다!”

    한빈이 주춤주춤 물러나자 빙혈서생은 바닥에 떨어진 비둘기를 주워 통을 열었다.

    그곳에서 작은 글씨를 확인한 빙혈서생의 눈이 커졌다.

    -영단산에서 청명환을 두고 결전 중.

    “헉.”

    빙혈서생의 반응에 흑의살풍이 물었다.

    “둘째야, 왜 그러느냐?”

    “당했습니다.”

    “당했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둘째 형님.”

    편육랑아도 급히 끼어들었다.

    빙혈서생이 슬금슬금 도망가는 한빈과 설화를 보며 외쳤다.

    “저 새끼들이 우릴 이용해 처먹고 버린 겁니다! 저희는 토사구팽 당했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

    흑의살풍의 말에 빙혈서생이 말을 이었다.

    “지금 여기에는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걸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죠.”

    “그 방법이 무엇이냐?”

    “자신이 목표물이 아니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목표물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는 이 많은 한철 궤가 말입니다. 게다가 저들은 아무런 짐도 들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청명환은 어디에 남아 있겠습니까?”

    “그럼…….”

    “이게 모두 가짜라고 해도 저들은 끝까지 저희를 쫓아올 겁니다.”

    “흠.”

    “우리를 죽이고 나면 진짜를 차지하겠다고 사파끼리 싸우겠죠.”

    “…….”

    “물론 정파가 끼어 있다면 그놈들도요. 이건 사파를 말살하려는 계략입니다.”

    그때였다.

    나무 상자에 일필휘지로 적혀 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분명 한빈의 필체였다.

    그 글귀에 빙혈서생이 이를 악물었다.

    “저런 악마 같은 놈!”

    빙혈서생은 이를 악물었다.

    힘든 일은 다 시켜 놓고 이렇게 토사구팽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저런 놈이 정파라고? 사파에서도 저렇게 악독한 놈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변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재빨리 상념을 털어 냈다.

    이제는 산서삼살 세 명 중 하나라도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목표였다.

    * * *

    한빈이 설화와 함께 뒷걸음칠 때였다.

    누군가 한빈의 목에 칼을 겨누며 조용히 읊조렸다.

    “움직이지 말거라.”

    “아, 알겠습니다.”

    한빈이 떨리는 목소리를 짜냈다.

    “흠, 애송이로군.”

    상대가 헛웃음을 지을 때였다.

    픽! 픽!

    혈도를 점하는 소리가 두 번 울리더니 한빈에게 칼을 겨누던 무인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설화야, 건들지 말아라. 전부 내 몫이다.”

    “치, 공자님도 참. 오랜만에 손맛 좀 보려는데…….”

    설화가 입을 쭉 내밀었다.

    사실 한빈과 설화만 있었다면 이런 경극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기척을 지우고 사라진다면 찾을 수 있는 자는 없을 터.

    문제는 윤용호 일행이었다.

    한빈은 차근차근 퇴로를 확보하며 나아갔다.

    그런데 한빈이 향한 곳은 내리막길이 아닌 오르막길이었다.

    한빈과 설화는 영단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한빈은 주변을 휙 둘러봤다.

    그의 시야에 커다란 바위가 들어왔다.

    한빈은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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