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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98화 (98/621)
  • 98화. 물밑 전쟁 (2)

    챙! 챙!

    넓은 연무장에서는 심미호 말고 다른 무사들도 수련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을 고용한 하남정가의 둘째 정휘지가 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든다면 하남정가에 정식 무사로 채용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일 터.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날릴 자는 여기에 없었다.

    정휘지는 수련에 열을 올리는 낭인들을 보고 그들에게 지불한 은전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정휘지가 미간을 좁히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알아챈 수하가 재빨리 물었다.

    “공자님, 왜 그러시는지요?”

    “대체 저자들은 무엇이냐?”

    “저들도 실력이…….”

    수하가 설명하려 하는데 정휘지가 말을 끊었다.

    “하나는 나이가 너무 많고 하나는 너무 어리지 않느냐? 어린놈은 아직 덜 영글었을 것이고 나이 든 놈은 내가 진각 한 번 밟으면 쓰러질 것 같은데, 저런 자들을 어찌 쓰겠는가? 딱 봐도 이류가 아니더냐? 내가 일류 무사들로만 모으라 그리 말했거늘.”

    “일류 맞습니다.”

    “저들이 일류라고?”

    정휘지가 고개를 갸웃하자 수하는 그들에게 달려가 뭐라 속삭였다.

    수하가 전한 말에 젊은 사내와 나이 든 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맞잡았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둘의 입가에는 진득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 모습에 정휘지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것은 초식을 서로 맞춘 상태에서의 비무였다.

    그것은 수련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무위를 돋보이게 만드는 연출일 뿐이었다.

    어려운 초식을 받아 내고 그걸 받아 친다.

    그러고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피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이류의 무위를 마치 일류처럼 보이게 만들 터였다.

    정휘지는 이들이 수하의 눈을 속이고 들어온 것이라 확신했다.

    그때 사내 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챙! 챙!

    요란하게 울리는 칼 부딪히는 소리.

    정휘지가 눈매를 좁혔다.

    조금 전의 그의 생각이 기우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의 칼은 눈속임 따위가 아니었다.

    진정한 패도가 그들의 칼에 실려 있었다.

    일류 중에서도 확실한 중급 이상.

    저기서 조금만 다듬는다면 차후에 절정도 바라볼 수 있는 모습이 엿보였다.

    물론 젊은 무사 기준에서였다.

    나이 많은 무사는 여기가 한계일 터.

    챙! 챙!

    물론 젊은 무사는 조호.

    나이 든 무사는 장삼이었다.

    조호는 장삼과 칼을 맞대며 미소를 띄웠다.

    지금 조호가 긋는 선은 사실 단조로웠다.

    천수장에서 수련한 기술 중 반은 쓰지도 않았다.

    무조건 힘으로 상대와 대결하는 중이었다.

    조호가 장삼을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러다가 관절 나가요, 아저씨.’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전음은 못 해도 입 모양으로 서로에게 의사는 전달할 수 있는 상태.

    물론 이것도 천수장에서의 훈련 성과였다.

    챙! 챙!

    그들을 바라보던 정휘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휘지의 시선이 그들의 칼에 꽂혔다.

    심미호의 칼과 조호 그리고 장삼의 칼.

    그들의 칼은 길이는 달랐지만, 모양은 같았다.

    같은 무리라는 것이다.

    그 표정을 눈치챈 수하가 재빨리 설명을 시작했다.

    “저들은 네 명인데 해남사우라고 합니다.”

    “해남사우라? 들어 본 적은 없군.”

    “한 스승 밑에서 수련했지만, 지금은 사문에 개미 새끼 한 마리라도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것은 심미호가 이곳에 낭인으로 들어오면서 한 말이었다.

    한빈 밑에서 수련한 것도 맞았고 지금 천수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이번 임무에 동원됐으니 말이다.

    정휘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수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걸리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다. 저들 중 우두머리를 불러라.”

    정휘지의 말에 심미호가 불려 왔다.

    본래 소대섭이 맡아야 하지만, 지금의 임무는 언변이 중요하므로 심미호가 맡았다.

    정휘지의 앞에 선 심미호가 포권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무슨 일이신지요?”

    “그래, 내가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네.”

    “네, 말씀하시지요.”

    “자네 하남정가의 정식 무사로 일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가?”

    “…….”

    심미호는 정휘지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정휘지가 수하에게 턱짓했다.

    수하가 심미호에게 전낭을 내밀었다.

    “공자께서 드리는 선금이라 생각하시지요.”

    “…….”

    심미호는 말없이 전낭을 받아서는 안을 보았다.

    안에는 은전이 넉넉하게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심미호의 눈빛은 평온했다.

    정휘지의 수하가 말했다.

    “넣어 두게. 그리고 그리 놀라지 않아도 되네.”

    평온한 심미호의 눈빛은 그에게 얼이 빠진 것처럼 보였던 것 같았다.

    “네, 감사해요.”

    심미호가 전낭을 품에 넣었다.

    그녀가 심드렁한 이유는 돈이 적어서였다. 사실 그녀에게 이곳의 임무는 꿀이었다.

    한빈이 주는 정식 수입에다가 부수입까지 생기니 말이다.

    그래서 정식 무사라고 해서 한껏 기대했는데 돈이 생각보다 적었다.

    그때 정휘지가 입을 열었다.

    “내 오늘부터 해남사우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겠네.”

    “명 받들겠습니다.”

    심미호는 각 잡힌 포권을 했다. 고개 숙인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 *

    덜그럭, 덜그럭.

    한빈 일행이 탄 마차가 막 영단산 입구에 들어서려 했다.

    영단산은 약초꾼들의 성지.

    덕분이 산을 가로지르는 길이 나 있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앗!”

    목소리의 주인공은 악비광이었다.

    악비광이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표두 윤용호는 재빨리 손을 들었다.

    “잠시 멈춰라!”

    동시에 행렬이 멈추자 윤용호가 다급하게 악비광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그, 그게…….”

    악비광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모습에 윤용호가 그의 어깨를 꽉 잡고 물었다.

    “진정하시고 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해 보십시오.”

    “무, 무소율 소저가 사라졌습니다.”

    그 말에 윤용호가 눈을 크게 떴다.

    악비광은 정신이 없어 무소율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뭔가 허전했지만, 그 허전함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악비광은 무소율이 마차에 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확인해 보니 무소율이 없었다.

    윤용호도 그제야 무소율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분명히 배에서 내리는 걸…….”

    그는 말끝을 흐렸다. 배에서 모든 인원이 내렸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무소율이 내리는 것을 확인한 적이 없었다.

    그때 편육랑아가 조용히 다가왔다.

    “누가 없어졌다고 그럽니까? 제가 출발할 때 사람을 세어 봤는데 분명히 아홉 맞습니다.”

    윤용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홉이라고요?”

    “네, 배에 타기 전 아홉이었고 지금도 아홉 아닙니까? 그러니 빠진 사람이 없는 거죠.”

    편육랑아는 손가락까지 접으며 자신 있게 답했다.

    “허.”

    한숨을 쉰 윤용호가 편육랑아 옆에 있는 검오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검오도 편육랑아의 계산법에 입을 벌렸다.

    실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검오가 합류했으니 일행은 열이 되어야 정확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없어진 것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무소율과 악비광이 표행에서 열외 인물이라는 점이다.

    악비광은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건 저도…….”

    윤용호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설화가 다가왔다.

    “배에서 자고 있던데요.”

    “배라고? 무슨 배?”

    악비광이 놀라 묻자 설화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무슨 배긴요, 아까 우리가 타고 왔던 배죠.”

    “그럼 깨워야지. 아니면 우리한테 알려 주든가.”

    악비광의 책망하는 목소리에 설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그래요. 여기 사람이 몇인데, 그만큼 존재감이 없었나 보죠.”

    순간 악비광이 입을 딱 벌렸다.

    생각해 보니 설화의 말이 맞았다. 여기서 무소율을 챙길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다만, 유일하게 그녀를 봤다는 설화가 챙기지 않았다는 것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악비광은 지나온 길과 한빈을 번갈아 봤다.

    갈등하는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해야 할 건 그 수적일 거야. 아마 지금쯤이면 무 소저의 화를 다 받아 줘야 할걸.”

    “저도 그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걱정하는데?”

    “제 신뢰가 무너진 거잖습니까? 형님!”

    악비광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들 중 무소율을 헤칠 사람 없다는 것을 악비광도 인정했다.

    한빈이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되면 가 보든가. 얼굴이라도 비치면 용서해 줄지 누가 알아?”

    “아, 진짜 어떻게 합니까? 길치라고 했는데. 길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하하, 길치라고? 그럼 더 서둘러야겠군.”

    한빈은 부드럽게 웃었지만 악비광은 그 웃음이 얄밉게만 보였다.

    악비광이 울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알겠습니다. 형님.”

    그는 바로 말고삐를 돌렸다.

    다가닥, 다가닥.

    멀어지는 악비광을 본 한빈이 혀를 찼다.

    전생에 악비광은 무림삼광(武林三光) 중 하나로 불리던 친구였다.

    지금은 저래도 몇 년만 지나면 산동악가를 짊어지게 될 터였다.

    그때가 되면 한빈에게 힘이 되어 줄 수도 있을 터.

    한빈이 잠시 상념에 잠겼을 때 검오가 한빈의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을까요?”

    “너도 무 소저가 걱정되느냐?”

    “아닙니다. 저는 동료들이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무소율의 경지를 알아봤다는 건데, 생각보다 눈썰미가 좋구나.”

    “아닙니다.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검오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한빈은 검오의 얼굴을 힐끔 바라봤다.

    한빈이 무소율에게 신경 못 쓴 이유는 두 가지였다.

    마지막 작전을 펼치기에 악비광과 무소율은 너무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두 번째 이유가 바로 검오 때문이었다.

    전생의 기억으로는 검보다는 다른 쪽으로 소질이 있는 친구였다.

    아마 부부로 위장한 산적이 썼던 이화신기도 검오가 만든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이번 표행이 끝난 후 검오를 천수장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때 설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이제 서서히 따라붙나 보네요.”

    “그런 것 같구나.”

    한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모른 척 조용히 가다가 그들의 뒤통수를 거하게 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 * *

    덜그럭 소리를 내며 가는 마차가 산 중턱에 멈췄다.

    산들바람에 쓱 지나가자 약초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곳을 영단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달마대사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소림으로 온 달마는 자신이 제자에게 줄 영약을 만들기 위해 이곳 영단산에 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약초를 채집한 달마는 제자에게 줄 영약을 만들었지만, 대신 천축에서 가져온 선단을 흘리고 갔다는 것이 전설이었다.

    영약보다 더 강한 선단이 이곳에 스며들며 더욱더 강한 자연지기를 형성하고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뭐, 아직도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다양한 약초들이 자라나는 것은 사실이니까. 전설이 완전히 헛된 말을 아닐 듯싶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한빈이 마차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며 외쳤다.

    “여기서 쉬었다 가시죠!”

    동시에 표두 윤용호가 손을 올렸다.

    휘이잉.

    말이 투레질하며 바로 멈췄다.

    마차를 옆에 놓고 윤용호와 동료 표사가 노숙을 준비했다.

    그때 한빈이 윤용호의 옆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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