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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97화 (97/621)

97화. 물밑 전쟁 (1)

한숨을 쉬는 수적에게 다른 수적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왜긴 왜야? 죽을 뻔해서 그러지. 그건 그렇고 채주가 우리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그러게요. 악가에 무씨검가, 거기에 하북팽가도 모자라 산서삼살이 같이 움직이는데 거기에 우리를 쑤셔 박다니 말도 안 되죠. 이 김에 손 씻죠, 형님.”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 배가 있지 않습니까? 아래 창고에는 팔 만한 물건도 있고요.”

“흠, 네 생각이 일리 있다.”

“그래도 여기에서는 좀 그러니 조금 더 하류로 내려가서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검오가 끌려간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산 사람만이라도 입에 풀칠해야 하는 게 맞다. 형제들을 모아라.”

새로 수장이 된 수적이 박도를 높이 치켜들자 선상의 수적들이 소리 질렀다.

“와아!”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이제는 여길 뜬다!”

모두의 함성이 선상에서 울려 퍼질 때 배 아래 창고에서 누군가가 몸을 뒤척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음, 시끄러워…….”

그것은 누군가의 잠꼬대였다.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비녀 하나를 꽂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무소율.

무소율은 멀미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이전에 배가 심하게 흔들리며 회전할 때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양악군이 내놓은 구멍으로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밑에 식량 더미 위로 떨어져 다친 곳은 없지만, 바로 정신을 잃었다. 아니 정신을 잃었다기보다는 잠이 든 것이다.

철혈의 여인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녀의 몸은 이 고단한 여정을 이겨 낼 만큼 강하지 못했다.

게다가 뱃멀미까지 겹치자 이 상태가 된 것이었다.

그녀는 곡식 포대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상태.

밑에 무소율이 남았다는 것을 모르는 수적들은 계속 함성을 질렀다.

“위하여!”

“가자!”

새로운 출발을 다지고 있는 강북 십이수로채 중 일곱 번째 무리는 밑에 재앙이 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있었다.

* * *

며칠 후 정의맹 하남 지부의 접객실.

커다란 탁자에 고풍스러운 족자가 벽면을 채우고 있다.

넓은 탁자에는 한 사내가 의자 팔걸이를 톡톡 치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키에 날카로운 눈빛을 한 사내는 마치 학을 연상시키듯 고고하게 허리를 펴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본다면 유림의 학자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입만은 비릿하게 웃는 모습이 마치 뱀을 생각나게 했다.

뱀과 학이라?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관상이었다.

서생 같은 분위기에 어울리게 그는 화첩을 꺼내 놓고 감상하고 있었다.

그 화첩에는 숫자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정휘지.

하남정가의 둘째였다.

다른 세가라면 가주과 비슷한 항렬이었다.

하남정가는 아직 가주 교체가 끝나지 않은 관계로 높은 항렬에 속함에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하남정가의 가주가 정체불명의 병에 걸린 후 정휘지는 소가주인 정인지와 함께 세가를 이끌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하남정가의 이인자인 그는 화첩에 나와 있는 숫자를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화 부인과 한배를 탄 사람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정휘지는 화첩을 재빨리 닫았다.

문이 열리자 정(正)이라 쓰인 무복을 입은 자가 걸어와 정중히 포권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정 대협. 저는 정의맹 하남 지부장 황지용입니다.”

앉아 있던 사내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대협. 저는 하남정가의 정휘지입니다.”

정휘지도 마주 포권했다.

“하남쾌검 대협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바로 차를 올리겠습니다.”

하남쾌검은 정휘지의 별호.

빠름을 중요시하는 하남정가의 검객 중에서도 유독 빠름이 돋보이기에 붙여진 별호였다.

사실 이것이 정휘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남정가의 검을 잘 살린 무인이란 칭호를 받으면서도 실제로는 소가주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둘이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황지용은 정휘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역시 하남정가의 제일검답게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황지용은 턱을 매만지며 정휘지가 온 까닭을 더듬어 봤다.

정휘지는 지금 운송 중인 청명환의 호송을 부탁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정의맹도 귀가 있어서 지금의 상황은 잘 알고 있었다.

하북팽가에서부터 시작된 하남정가까지의 표행.

그 표행의 주인공은 청명환이라는 영단이었다.

사파는 물론 정파에서도 관심을 나타내는 청명환.

정의맹 하남 지부는 이 일에 대해서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다.

나서 봐야 어떤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일이 확대된다면 언제든 개입할 준비는 해 놓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먼저 꺼내야 하나 하며 상대의 표정을 살피던 황지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얼굴에 철판 하나를 올려놓은 것처럼 딱딱한 표정.

마치 얼굴에 호신강기를 두른 것처럼.

황지용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마침 시녀가 차를 들고 왔다.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어색했던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황지용은 지금이 말을 꺼낼 때임을 알았다.

“대협, 청명환 호송에 관한 저희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해 주시오.”

“먼저 면목 없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어떻게든 도움을 줄 방법을 모색하겠습니다.

황지용의 답에 정휘지가 찻잔을 탁자에 세게 내려놨다.

탁!

탁자에 부딪힌 찻물이 살짝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 물방울은 묘하게 찻잔 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내공으로 찻잔을 덮었다는 것.

정휘지가 무력을 과시하자 황지용은 눈매를 좁혔다.

찻잔의 차는 그대로였다.

황지용은 그것이 무력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무력으로 맞설 수는 없는 일.

황지용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많이 화나셨군요.”

정휘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제 뜻을 모르십니까?”

“뜻이라니 그게 말씀인지요?”

“저는 이 호송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찻잔의 차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무도 관여하지 않는다면 어떤 소문도 그 어떤 결과도 주워 담을 필요도 없지요.”

황지용은 찻잔을 응시했다.

정휘지는 탁자가 흔들릴 정도로 찻잔을 내려놨다.

두 번째로 무력을 과시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강도가 이전 동작보다 몇 배는 더 컸다.

아직도 탁자가 흔들릴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차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내공으로 찻잔의 위를 덮었다는 것이다.

차가 호송이라고 했다.

그때 정휘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아버님의 나이가 있으니 조금 있으면 하남정가의 가주도 바뀌지 않겠습니까?”

그의 뜻은 명백했다.

하남정가의 둘째 아들은 하남정가의 현 가주인 정무룡의 죽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좀 더 예측을 하자면 정휘지는 가주 자리를 꿰차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가주라…….”

황지용이 말끝을 흐렸다.

상대에게 얻을 것을 얻기 위함이었다.

정휘지가 그 뜻을 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가주가 되면 곳간의 열쇠도 제 것이 아니겠습니까? 뭘 꺼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황지용 지부장님의 아드님이 정의맹의 천룡 학관에 입학할 때가 되었더군요.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영약도 지원을 받으셔야 할 텐데…….”

“음.”

황지용은 정휘지를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그것도 잠시 정휘지와 황지용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잠시 타오르던 둘의 눈빛이 하나가 되었다.

황지용이 찻잔을 들었다.

슬쩍 입을 축인 황지용이 입을 열었다.

“대협의 뜻은 확인했습니다. 하남정가의 뜻으로 알아도 될는지요?”

“네, 하남정가의 뜻과 제 뜻은 같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의뢰서를 남겨 주실 수 있을는지요. 저도 정의맹의 밥을 먹는 무인인지라…….”

“그렇게 하죠.”

정휘지가 입꼬리를 올렸다.

의뢰서라고 해 봐야 일을 성공시키고 나면 종이 쪼가리가 될 터였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문서는 몇십 장이고 써 줄 수 있었다.

정휘지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의뢰한 일은 명분도 충분했다.

하남정가의 일은 하남정가에서 알아서 할 테니 누구도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은 확실한 대의명분이었다.

물론 하북팽가에서 오는 호송을 호위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뭐 호송이 무사히 도착한다고 해도 관계는 없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판을 짜 놨으니 말이다.

정휘지가 정의맹 하남 지부에서 나오자 수하 하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공자님, 일은 잘되셨습니까?”

“내가 하는 일에 빈틈이 있던가?”

“아휴, 그럴 리가요.”

“그런데, 자네는 내가 지시한 일은 잘 처리했는가?”

“네, 지금 안내해 드리죠. 낭인 중에도 최정예라고 하는 친구들로 추려 놨습니다.”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야.”

“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정휘지의 수하는 재빨리 그를 어느 허름한 장원으로 안내했다.

현판도 없는 이곳은 하남 낭인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낭인 시장 겸 연무장이었다.

이곳에 자기 일을 도울 낭인이 준비되어 있을 터. 정휘지가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낭인 시장에 들어섰다.

챙! 챙!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에 정휘지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내와 여인이 칼을 맞대고 있었다.

정휘지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정예를 추리라고 했더니 왜 여인을 데려왔는가?”

정휘지의 질문에 수하가 멀리서 칼을 휘두르는 여인을 가리켰다.

“공자님, 조금만 더 보시죠.”

챙! 챙!

칼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그런데 상황이 묘했다.

여인이 사내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날렵한 몸매.

그리 힘을 쓸 것 같지 않은 외모였다.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무인으로 보이지, 몸에 적당히 달라붙은 무복의 겉으로 드러나는 몸매는 장안에서 유명한 기녀보다도 뛰어날 정도였다.

그런데 저렇게 사내를 무지막지하게 몰아붙이다니?

정휘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정파의 무공은 아니군.”

“네, 그렇습니다. 사파에서도 저렇게 물불 안 가리는 초식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어디에서 왔다더냐?”

“듣기로는 해남에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해남이라…….”

정휘지는 턱을 매만지며 여자 무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남이라는 수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해남이라면 바닷바람 때문에 사람들의 피부가 저렇게 검은 편이었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여인은 당연히 심미호였다.

심미호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비무에 열중했다.

무게가 앞쪽에 실린 귀두도와 그동안 키운 내공의 조합은 실로 엄청났다.

그동안 쌓였던 피곤함을 지금 이 칼질로 날리는 중이었다.

심미호는 지금 상황이 너무 신기했다.

그녀가 받은 임무는 간단했다.

하남 낭인 시장에 가면 실력 있는 낭인을 구하는 하남정가의 사람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때 넉넉하게 돈을 받고 그 밑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후에는 한빈이 직접 명을 내리겠다고 했다.

지금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주군은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그리 훤히 알고 있을까?

고민도 잠시. 심미호는 고민을 시원하게 칼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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