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운수 좋은 날 (5)
놀람도 잠시, 악비광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후.”
중심을 못 잡는 것을 벗어나 속이 울렁거렸다.
악비광 같은 고수도 뱃멀미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가장 편하게 이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물에 갇힌 산서삼살이었다.
도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상황에도 빙혈서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중심조차 잡기 힘든데 저리 움직이다니?
저런 검객이 강북에 숨어 있었다고?
거기에 더해 사파나 마교보다도 악랄한 심성을 가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검객이 바로 정파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강북 오대세가에 속하는 하북팽가의 직계.
이것은 강북 무림의 판도가 바뀔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때 빙혈서생의 옆에 있는 편육랑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계속 뭐라 속삭였다.
그 모습에 빙혈서생이 물었다.
“셋째야,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둘째 형님, 저거 보십시오. 마차가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저 마차만 없다면 저희는 자유의 몸이 아닙니까?”
편육랑아는 배의 후미에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마차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편육랑아가 다시 외쳤다.
“넘어가라. 넘어가라!”
그때 흑의살풍의 비명이 들렸다.
“헉!”
그 소리에 빙혈서생이 고개를 돌렸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놓쳤다.”
“뭘 놓쳤습니까?”
“한철 궤를…….”
흑의살풍은 배의 가장자리로 미끄러져 가는 보따리를 가리켰다.
“헉, 저건…….”
빙혈서생도 비명을 질렀다. 한빈이 보관하라고 준 청명환이 들어 있는 한철 궤 보따리였다.
저게 강물에 빠진다면?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때였다.
미끄러지던 보따리가 흔들리는 배 때문에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휘릭!
강물 밖으로 날아가는 보따리에 산서삼살이 입을 벌렸다.
“제길!”
“이건 우리 책임이 아니야.”
그때 누군가 보따리를 낚아챘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한빈과 양악군이 격돌하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챙! 챙!
양악군은 배 위에서만큼은 속도에서 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밀린다 싶으면 재빨리 물러나 다음 작전을 진행하면 되었다.
하지만 한빈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은 속도로 양악군을 누를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초절정의 고수라면 한빈에게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
한빈은 용린검법의 구결 하나를 재빨리 떠올렸다.
‘성동격서.’
오 년의 공력을 사용해 상대를 무력하게 만드는 초식이었다.
물론 오 년의 공력이 아깝긴 했지만, 용린검법의 공력이야 하루가 지나면 회복되는 것이었다.
스륵!
한빈의 검이 묘한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왼쪽으로 뱀처럼 휘어져 들어오는 한빈의 검에 양악군이 재빨리 검을 그었다.
휙!
양악군의 눈이 커졌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불길함을 느낌 양악군은 재빨리 몸을 틀며 반대쪽으로 검신을 세웠다.
스륵.
날아오던 검이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양악군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푹!
한빈의 검이 살을 파고들었다.
낭패한 양악군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어깨에 흘러내리는 핏물을 본 양악군이 외쳤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지금 한빈의 공격은 화산파의 매화검법보다 화려했으며 점창의 사일검법보다 날카로웠다.
강북에 저런 젊은 검객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를 못했다.
한빈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하북팽가라니까 자꾸 왜 그래?”
“하북팽가에서 검을 쓴다고……?”
양악군이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양악군이 자신의 적수가 아니라는 듯 유유자적 허공을 바라봤다.
물론 진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자(自)를 획득하셨습니다.]
그때 양악군에게 누군가가 다가갔다.
그는 양악군의 오른팔 검오였다. 그가 양악군에게 보따리를 건넸다.
그 보따리는 흑의살풍이 들고 있던 한철 궤가 든 보따리였다.
모두가 둘의 싸움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검오가 목표물을 노획해 온 것이다.
보따리를 받은 양악군이 웃었다.
“하하하.”
“…….”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양악군을 바라봤다.
양악군이 오른손에 든 보따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나는 싸움보다는 이 영단이 중요하니 우리의 대결은 다음을 기약하지.”
양악군과 검오가 동시에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강으로 뛰어내릴 모양새였다.
그때 양악군이 오른손을 재빨리 움직였다.
마치 암기를 던지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양악군의 오른손은 수하의 어깨로 향했다.
픽!
자신의 수하인 검오의 마혈을 찍은 것이다.
공중에 떠올랐던 검오가 바닥에 꼬꾸라졌다.
쿵!
수하가 쓰러지자 양악군이 비릿하게 웃으며 훌쩍 배의 난간 밖으로 뛰어내렸다.
첨벙!
한빈은 재빨리 일촉즉발의 수법으로 난간 쪽으로 달려갔다.
쉭!
끝까지 간 한빈이 아래를 바라봤다.
양악군은 미리 준비된 조그마한 배 위로 올라선 후였다.
한빈이 이를 악물자 옆쪽에 있던 악비광이 외쳤다.
“일단 배부터…….”
악비광은 끝말을 흐리며 아까 수적이 건드렸던 뱃전의 기관을 가리켰다.
그것을 꺼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주변을 힐끔 돌아보니 표두 윤용호는 원심력에 배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마부를 꽉 잡고 있고 표사 하나는 겨우 자신의 몸을 지탱할 뿐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양악군을 이대로 놔줄 수 없었다.
양악군은 흰 포말을 일으키며 멀어지고 있었다.
수적의 두목이 아니랄까 봐 노 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분명 놈의 수법은 장강십팔결(長江十八決)이었다.
이 초식은 수적들의 수법으로 한번 노를 저으면 열여덟 번의 물결을 일으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내공을 노 젓는 데 운용하는 것은 전문적인 수적의 수법이었다. 배가 하나 더 있다고 해도 그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양악군은 보내도 되지만, 그가 지닌 구결을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배는 빙글빙글 돌고 양악군이 탄 나룻배는 점점 멀어졌다.
그때 한빈의 눈에 조각난 갑판의 파편이 들어왔다. 그것은 쇠못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쇠못을 주워 들었다.
‘백발백중.’
한빈의 손을 떠난 나뭇조각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픽! 푹!
한빈의 공격이 명중한 것이다.
새로 나타난 글귀에 한빈이 미소 지었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자(自)를 획득하셨습니다.]
뭐지?
방금 봤던 글귀가 똑같이 떴다.
한빈은 재빨리 습득한 구결을 확인했다.
······
[인급(人級) - 자(自), 자(自)]
같은 글자가 두 개였다. 아직은 어떤 초식인지는 알 수 없을 터.
하지만, 인급 구결을 두 개나 건진 것은 이번 임무의 최대 수확이었다.
모든 구결이 네 글자로 되어 있다면, 기본편의 책장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이미 얻은 ‘기사회생’을 제외하고 두 구결, 즉 여섯 글자가 남은 것이었다.
자신이 뿌려 놓은 떡밥에 몰려들 고수들이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터.
한빈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뱉었다.
“오늘은 운이 좋군.”
그때였다.
옆에서 다 죽어 가는 악비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형! 저 죽습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양악군에게 배신당한 검오의 혈도를 찍었다.
픽!
정신이 든 검오의 눈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일단 기관 장치를 멈춰라. 목숨만은 살려 주마.”
순간 검오의 눈빛이 안정을 찾았다.
검오는 중심을 잡고 달려가더니 부서진 기관 장치 중 필요한 부분을 잡아당겼다.
스륵!
이상한 소리와 함께 배가 중심을 잡았다.
동시에 돛대도 바로 섰다.
바람에 빙빙 돌던 배도 바로 멈췄다.
그제야 배에 탄 이들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 * *
잠시 후.
한빈 일행이 탄 배가 반대쪽에 도착했다.
중간에 생긴 사고로 배는 예상보다 하류로 떠내려와 나루터에 도착은 못 했지만, 적당한 높이의 둔덕 덕분에 한빈 일행은 무사히 짐을 내릴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두가 무사히 내렸지만, 혈색만큼은 파리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악비광이 한빈에게 다가왔다.
악비광이 한빈에게 물었다.
“대형은 괜찮으십니까?”
“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물가에 가서 네 얼굴이나 비춰 봐라, 비광아.”
“저, 전 괜찮습니다. 그런데, 혹시 전에 배를 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광아!”
“네, 형님.”
급격히 공손해진 악비광의 태도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말을 이었다.
“너는 쟤네들이나 데려와라.”
한빈이 배 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무리를 가리켰다.
그들은 양악군에게 버림받은 수적이었다.
굳이 악비광이 갈 필요도 없이 둘의 대화를 엿들은 수적들은 한빈의 앞에 정렬했다.
그들이 한빈 앞에 정렬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산서삼살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중 편육랑아가 한빈 앞에 섰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는 또 왜 그래?”
“아, 그게 아니라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럽니다.”
“내게 할 말이라고? 혹시 풀어 달라고?”
“아,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저희를 풀어 주는 거야 대협의 권한입죠.”
편육랑아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어색하게 웃자 한빈이 물었다.
“그럼, 뭔데?”
“제가 굴려도 될까요?”
“굴리긴 뭘 굴려?”
“쟤네들이요!”
편육랑아가 수적 무리를 가리키며 낭아봉을 치켜들었다.
휭!
낭아봉을 치켜드는 것만으로도 바람이 일었다.
순간 편육랑아와 눈이 마주친 검오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산서삼살의 악명은 수적이라 해서 모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을 부리는 젊은 고수라?
아무리 생각해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편육랑아를 수하로 부리는 것을 보면 사파의 고수가 분명했다.
아무리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 말해도 그것을 믿을 수 없는 검오였다.
검오는 자신을 그냥 놔두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양쪽 팔을 바라봤다.
아마 몇 시진만 지나면 둘 중 한 팔은 몸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아니, 떨어져 나가는 것이 머리가 될 수도 있었다.
검오가 고개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때였다.
편육랑아가 한빈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협,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저희는 굴리고 쟤들처럼 악독한 도적 떼들은 그냥 보내 주고요. 이게 강호의 도리입니까?”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편육랑아를 바라봤다.
“같이 구를래?”
“아, 아닙니다.”
대화를 듣던 검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둘의 대화만을 들어 본다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검오는 지금 희망을 본 것이었다.
그때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끝났으면 다 가 봐.”
뭐지?
수적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한빈을 바라본 수적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수적질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었다.
잘못하면 관아에 끌려가 처형이 되기도 하고.
수적질에 실패하면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그냥 가라니?
검오는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아니, 가라고 해도 안 가네?”
하지만, 검오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한빈의 말이 꼭 반대로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뒤에서 칼이 날아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검오와 수적들은 모두 얼어붙은 채 한빈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