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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94화 (94/621)

94화. 운수 좋은 날 (4)

흑의살풍은 자신의 손에 든 보따리를 바라봤다.

여기에는 청명환이 들어 있는 한철 궤가 있었다.

차디찬 촉감으로 봐서는 진짜 한철 궤가 맞았다.

흑의살풍은 이것을 들고 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검도 경공도 한빈보다 아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적에게 이 보따리를 빼앗기긴 싫었다.

흑의살풍의 감정이 다시 한번 요동치는 순간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참, 재미있네. 재미있어.”

그물 안에 갇힌 흑의살풍이 힐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빈이 웃고 있었다.

흑의살풍은 그제야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앞에서 적과 대화를 나누던 한빈이었는데 그물이 덮치는 순간 빠져나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한빈은 씩 웃으면서 계획을 짜며 구결을 바라봤다.

‘전광석화’.

동시에 용린검법의 초식 중 ‘백발백중’을 새로 떠올렸다.

절호곡에서 완성한 초식으로 그간 쓸 일은 없었지만, 꾸준히 몸에 익힌 구결이었다.

준비를 마친 한빈이 양악군에게 외쳤다.

“다 한 번에 드루와!”

위풍당당한 한빈의 태도에 양악군은 기가 찼다.

상대는 산공독에 당해 손기술만 쓸 수 있는 피라미.

모두가 덤비는 것도 모양새가 빠지는 일이었다.

그때 한빈이 외쳤다.

“꼭 싸움 못 하는 새끼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더라고.”

한빈이 양악군을 가리켰다.

순간 양악군의 눈썹이 꿈틀댔다.

아무래도 한철 궤를 빼앗기 전에 한빈만큼은 자근자근 밟아 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양악군이 외쳤다.

“저놈을 잡아 내 앞에 대령하라!”

그의 외침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칼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동시에 한빈에게 달려들었다.

한빈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백발백중의 효용을 운용했다.

백발백중은 자신보다 경지가 낮은 자에게 통하는 수법.

한빈의 손에 들려 있던 은침이 그들에게 쏘아졌다.

사실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꼼수였다.

백발백중의 필요 공력은 일 년.

그런데 한 번에 여러 개를 던졌을 때도 단 일 년의 공력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얼마 전 나무토막을 세워 놓고 시험하며 깨달았다.

물론 움직이는 사물을 향해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쏴-악!

은침이 무서운 속도로 몰려오는 적을 향해 날아갔다.

픽! 픽!

달려오는 적들이 동시에 앞으로 꼬꾸라졌다.

은침의 개수만큼 쓰러진 적을 보자 양악군이 겨우 은침을 피한 검오를 바라봤다.

검오가 무공이 뛰어나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은침의 개수가 모자라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악군이 검오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산서삼살의 산공독에 당해 끌려다니는 놈이 어찌 저렇게 팔팔하단 말이냐?”

“…….”

검오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수하에게 보고받았을 뿐이었다.

그때 양악군이 한빈을 향해서 외쳤다.

“혹시 사천당가에서 온 고인이시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런 암기술이 존재하는 가문은 사천당가밖에 없다고 생각되오. 게다가 아까 이화신기에서 침을 몰래 꺼내는 솜씨도 그렇고. 당신은 사천당가의 사람이 맞지 않소?”

양악군이 물었다.

양악군의 물음에 한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사천당가라?”

한빈의 반문에 양악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코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풋. 역시 도둑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이젠 물건을 홈치는 게 아니라 남의 성씨까지 홈친 건가?

“그럼 사천당가의 고수가 아니란 말이냐?”

당황했는지 양악군의 말투가 다시 바뀌었다.

“뭐, 남의 성씨를 바꾸는 건 나를 꺾고 나서 맘대로 해라.”

한빈은 씩 웃으며 월아를 검집째 들어 올렸다.

한빈의 눈빛은 먹이를 발견한 호랑이의 모습이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었다.

양악군의 몸에는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점은 한 개가 아니었다.

한빈의 기세에 양악군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계속 쌓이는 의문에 양악군은 미간을 좁혔다. 한빈이 월아를 잡은 모습은 누가 봐도 검객이었다.

그렇다면 사천당가도 아니라는 말이었다.

‘과연 저놈의 정체는 무엇일까? 혹시…….’

양악군의 결론은 한빈이 정파가 아닌 사파의 고수라는 데 이르렀다.

주변을 힐끔 보니 악비광과 무소율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악비광과 무소율이라?

저들이 산공독에 당한 것이 아니라면?

아니, 산공독에 당한 것이 아니라 이건 함정이 확실했다.

모두가 덤빈다면?

양악군은 미간을 좁혔다. 결과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깨달은 양악군은 비상시를 대비해 짜 놓은 작전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곳이 물 위라는 장점을 철저히 살리는 싸움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일단 대화로 해결하지.”

“대화는 무슨 대화?”

“무슨 대화냐 하면…….”

양악군이 말끝을 흐리며 어딘가를 힐끔 바라봤다.

그쪽에는 그의 오른팔 검오가 있었다.

양악군이 검오에게 외쳤다.

“지금이다!”

그의 지시에 검오가 뱃머리를 내리쳤다.

팡!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배가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휘청.

한빈은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곳에서 공격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배만 흔들리고 있었다.

강물의 출렁임에 몇 배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 배에는 특별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양악군에게 다가서던 악비광과 무소율이 재빨리 물러나 배의 난간을 잡았다.

설화도 당황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멀쩡한 것은 한빈과 양악군 그리고 이런 상황에 익숙한 수적의 잔당밖에 없었다.

한빈은 다시 양악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양악군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흔들리는 배 위에서의 싸움이라면?

무조건 수공을 익힌 수적(水賊)이 유리했다.

여기서 수공이란 물속에서의 싸움만이 아니다.

수공은 물 위에서의 싸움도 포함된다.

이렇게 흔들리는 배 위에서의 싸움이라면 어떤 고수라 해도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생사결에서라면 그 깻잎 한 장 차이가 삶과 죽음을 가르기도 한다.

급격히 배가 흔들리자 양악군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스릉!

양악군이 검을 뽑아 들었다.

보통 검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짧은 검신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전투를 벌이기에 특화된 검이었다.

그 검을 본 한빈이 씩 웃었다.

전생에 수중전까지 해 본 한빈이었다.

이깟 흔들림 정도는 한빈에게 애교였다. 그렇다고 손쉽게 그를 제압하기는 어렵겠지만…….

중요한 것은 질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구결을 사용했다.

‘일촉즉발.’

발아래에서 용린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한빈의 몸이 쏜살처럼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휙!

월아의 끝에서 일렁이는 푸른 검기.

한빈의 검의 양악군을 뚫으려 할 때였다.

양악군의 검이 푸른 검기를 뿜어냈다.

그 농도로 봐서는 초절정 초급 이상이었다.

양악군의 검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양악군의 검이 향한 곳은 한빈이 아니라 자신의 밑이었다.

서걱!

순간 갑판이 두부 썰리듯 갈라지고 그 아래로 양악군이 사라졌다.

휙!

한빈의 검이 그 위를 뚫고 지나갔다.

목표를 잃은 한빈의 몸이 중심을 잃고 배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빈의 밑에는 푸른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잘못하면 그대로 물속에 처박힐 상황.

떨어지는 도중 한빈은 몸을 틀어 월아로 배의 옆면을 찍었다.

푹!

잠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것도 잠시, 한빈이 튕기듯 위쪽으로 올라왔다.

쿵!

한빈이 갑판에 착지했을 때였다.

슝!

날카로운 파공음이 한빈의 귓전을 울렸다.

한빈이 재빨리 상체를 뒤로 꺾으며 피했다.

하체로 무게중심을 옮겨 바닥에 발을 고정시키는 철판교의 수법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양악군의 검이 한빈의 위로 지나갔다.

한빈은 양악군의 수법을 보며 혀를 찼다.

수적이라면 자신의 배를 소중히 여기는 법이었다.

그런데 양악군은 오늘이 수적질의 마지막 날이라도 되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배에 흠집을 내고 있었다.

한빈은 어이없는 그의 행동에 실소를 머금었다.

그때 양악군의 검이 다시 날아들었다.

슝!

다시 피한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상대는 흑의살풍과 같은 경지였기에 본래라면 벌써 승부를 냈어야 한다.

하지만, 흔들리는 배라는 특수성 때문에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한빈은 이 승부를 최대한 빨리 끝내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사냥감을 쫓아가는 사냥꾼이 아닌 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는 낚시꾼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한빈이 잡을 물고기는 양악군이 아니었다.

한빈은 구결만 취하면 되었다.

한빈은 다시 철판교의 수법으로 하체를 갑판 위에 고정했다.

그리고 양악군에게 검을 휘둘렀다.

챙!

양악군이 검을 받아치더니 뒤쪽으로 물러났다.

이 배 위는 양악군에게 제집 안방과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갑판에 난 흠집 하나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양악군이 이 배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비법이었다.

배가 돌아도.

배가 흔들려도.

양악군의 움직임은 변함없었다.

그의 표홀한 움직임은 한빈이 맨땅에서 구걸십팔보를 펼쳤을 때와 비슷했다.

그렇다고 한빈이 그 움직임에 맞출 필요는 없었다.

한빈에게서 떨어진 양악군은 재빨리 방향을 바꿔 한빈의 등을 향해 검을 찔렀다.

슝!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월아로 막았다.

챙!

한빈이 여유 있게 막자 양악군이 눈썹을 꿈틀했다.

그가 보기에 한빈은 수공을 익힌 자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여유 있게 자신의 공격을 막을 리가 없었다.

수공이라?

양악군의 가슴속에 괜한 오기가 생겼다.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자신보다 편하게 서 있을 자는 없었으며, 자신보다 검을 빨리 휘두를 자도 없었다.

그런데 저런 애송이한테 밀리다니!

양악군이 다시 한빈의 앞에 나타났다.

슝!

한빈이 여유 있게 양악군의 검을 막았다.

챙! 챙!

마주 본 한빈과 양악군의 검이 풍악이 울려 퍼지듯 선상에서 소리를 냈다.

속도로만 승부를 보려는 것처럼 둘의 검은 점점 빨라졌다.

챙! 챙!

배의 난간을 잡고 그들의 대결을 보고 있던 악비광은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아까부터 나서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은 배가 기우뚱거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팽이처럼 돌고 있었다.

마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드는 것 같았다.

배에 설치된 기관 장치는 배의 중심뿐 아니라 돛까지 기울여 놨기 때문이었다.

바람을 받은 돛은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게 아니라 제자리에서 돌게 만들었다.

옆을 힐끔 보니 설화와 무소율도 마찬가지였다.

무소율은 아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이것은 정상이었다.

무인 중 배 위에서 싸워 본 자가 얼마나 있을까?

해전에 특화된 병사가 아니고서는 배 위에서의 싸움은 누구에게나 힘들었다.

지금처럼 이런 상황에서는 몸조차 가누기 힘든 것이 정상이었고 말이다.

모두가 이런 상황인데 한빈의 움직임은 놀라웠다.

팽이처럼 빙글빙글 도는 배에서 자신은 서 있기도 힘든데 저렇게 빠른 속도로 검을 주고받다니?

한빈과 양악군의 모습은 악비광에게 놀라움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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