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운수 좋은 날 (3)
“그럼 마차는 시녀에게 맡기고 저희가 같이 배에 오르겠습니다. 다른 건 포기해도 아가씨의 안전만큼은 저희가 책임져야 합니다.”
깊이 포권하는 마부.
마부의 절도 있는 동작에서 무인의 기품이 흘러나왔다.
지금 무소율의 앞에 서 있는 마부는 무씨검가 내에서도 고수로 인정받는 무사였다.
이번 여정을 위해 무씨검가의 가주가 직접 붙여 준 호위 무사가 그의 정체였다.
하지만, 무소율이 코웃음을 흘렸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죠? 저는 저보다 강한 사람한테만 호위를 받아요. 아시잖아요. 제게 호위가 필요 없다는 걸요.”
무소율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으로만 따지면 무씨검가를 이어받는 것은 무소율이라 세가에서는 평가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무사는 뭔가 생각난 듯 다급히 입을 열였다.
“아가씨, 저희가 걱정하는 것은 적과 마주쳤을 때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그리 걱정인 거죠?”
“아가씨가 길을 잃었을 때입니다.”
“아!”
무소율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무소율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길치라는 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호위는 필요 없지만, 길잡이는 필요했다. 문제는 아버지가 보내 준 호위는 그녀에게 귀찮은 감시자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무소율은 이번 기회에 호위 겸 감시자인 무사들을 떼어 내고 싶었다.
무소율은 손가락으로 배 위를 가리켰다.
“저기 계신 분들을 못 믿으세요?”
무사가 고개를 들어 배 위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먼저 배에 오른 악비광과 한빈 그리고 천리 표국의 표사들이 있었다.
물론 산서삼살이 마음에 걸리지만, 이미 한빈에게 제압당한 터.
무사가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가 돌아올 때까지 저희는 근처에서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시고요.”
말을 마친 무소율은 힘껏 배 위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주변에 자갈이 튀어 올랐다.
타타탁.
무사는 무소율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때 동료 무사가 그의 옆에 다가왔다.
“아가씨도 성질 좀 죽이면 좋을 텐데.”
“그 성질이 어디 가겠는가? 그래도 우리한테는 소중한 분이 아닌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자구.”
“뭐 그래야지.”
그들의 대화를 뒤로한 채 배는 나루터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 * *
배가 장하의 물줄기를 가로질러 가운데 정도에 왔을 때였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상인 복장을 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여기 의원 있습니까? 우리 남편이 위급해요!”
그 외침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여인의 남편이 쓰러져 있었다.
누가 봐도 다급한 상황.
산서삼살과 악비광까지 여인과 쓰러진 남편의 주변으로 다가갔다.
그중 빙혈서생 소경운이 미간을 좁히며 그들에게 가까이 갔다.
빙혈서생이 여인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제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서…….”
여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눈을 까뒤집고 몸을 덜덜 떠는 여인.
빙혈서생은 그들에게서 다급히 물러났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외쳤다.
“독이다!”
그 말에 모였던 사람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배의 호위를 맡은 무사가 달려와 박도를 뽑아 들며 외쳤다.
“모두 제자리에 있으시오.”
황당한 상황에 산서삼살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배 가장자리에 기대어 있던 한빈이 옷자락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간 한빈이 외쳤다.
“내가 의원이오! 다들 비키시오.”
옆에 있던 설화가 눈을 크게 뜨며 한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공자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건 진심이었다.
지금은 강 가운데.
평지에서와는 달랐다. 싸우는 데 변수가 많다는 것이다.
숨을 곳도 없었고,
어떤 계책도 먹히기 어려운 곳이 배 위였다.
살수에게는 가장 궁합이 안 맞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설화가 보는 한빈은 영락없는 살수였다.
그런 이유로 지금 자제하라 권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저기로 갔다가는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빈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한빈은 그 시선이 재미있다는 듯 싱긋 입꼬리를 올리며 쓰러진 부부에게 다가갔다.
모두는 침만 삼켰다.
설화도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에게 한빈이 걸어가는 몇 장의 거리는 마치 몇십 리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가간 한빈이 코를 실룩였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부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배를 호위하는 무사가 물었다.
“당신, 진짜 의원 맞소?”
호위 무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호위 무사의 정체는 검오였다.
뻔히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이 기가 찼던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나설 수도 없는 것이 한빈의 의도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던 산서삼살도 황당하다는 듯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한빈은 다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빈은 검오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부부의 완맥을 잡았다.
그것도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사내의 여기저기를 살폈다.
산서삼살 중 빙혈서생은 한빈의 모습에 눈매를 좁혔다.
한빈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빙혈서생이 낸 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였다.
부부의 상태는 실로 심각했다.
둘 다 입에는 게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입에 문 거품은 얼마나 심한지 바닥에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빙혈서생은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한발 물러났다.
하지만, 한빈은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남자를 살피고 난 한빈은 조심스럽게 여자를 살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은 모든 진찰을 끝내고서야 검오의 물음에 답했다.
“의원이 맞소. 이제 진찰이 끝났소.”
한빈의 대답에 검오는 멀리 떨어진 양악군을 바라봤다.
양악군이 전음을 보냈다.
-아무래도 산서삼살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수를 쓰는 것 같구나. 일단 놀아 주다가 계획대로 처리하거라.
그 전음에 검오가 한빈에게 물었다.
“독이 맞소이까?”
“독은 아니지만, 병세가 심각합니다.”
“독이 아니라면 무슨 병이오?”
“병의 이름은 몰라도 치료법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난 같은 한빈의 말에 검오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양악군의 지시가 있었기에 계속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치료법이 대체 무엇이오?”
“…….”
한빈은 말없이 일어나 옷자락을 털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리더니 멀리 떨어진 설화를 보며 말했다.
“설화야, 빨랫감 남는 것 좀 가져와라.”
“공자님, 빨랫감은 왜요?”
설화가 주변을 경계하며 둘둘 말린 천을 들고 달려왔다.
설화가 지척에 오자 한빈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창포물이 넘친다.”
“창포요?”
“누가 이 부부의 입에 창포를 풀어 놨더구나.”
한빈의 말에 설화는 허리를 매만졌다.
언제라도 연검을 뽑기 위해서였다.
설화도 저 수법을 알고 있었다.
저것은 미끼가 필요할 때 쓰는 수법이었다.
저 부부는 지금 미끼가 분명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창포로 환약을 만들어서 씹으면 입에 거품이 넘치기 마련이지. 아마 양치를 몇 달 안 해도 될 거야. 누가 이런 짓을 시켰을까?”
한빈이 씩 웃으며 돌아보자 저 멀리서 뱃사공이 천천히 걸어왔다.
이제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기세를 뿜어내는 양악군.
그가 걸어오자 모두가 배에 탄 이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그는 한빈과 다섯 걸음을 남기고 멈춰 섰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한빈이 아닌 흑의살풍이었다.
그의 시선은 흑의살풍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흑의살풍의 오른손에는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양악군은 저기에 청명환이 든 한철 궤가 들어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한빈이 말했다.
“청명환을 노리는 놈들이 참 많구나!”
“난 네놈과 할 말은 없다.”
양악군이 시선을 흑의살풍에게 돌렸다.
그때였다.
거품을 물고 쓰러졌던 부부가 벌떡 일어나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쇠로 만든 통이었다.
부부가 통을 산서삼살에게 겨누는 동시에 통의 모서리를 눌렀다.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자 흑의살풍이 외쳤다.
“암기다!”
순간 산서삼살이 동시에 엎드렸다.
분명 저것은 이화신기라 불리는 암기였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통에 암기를 넣어 놓고 모서리를 누르면 그것이 발사되는 원리였다.
이화신기에 넣는 암기는 어떤 형태든 관계없었다.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암기라면 무엇이든 발사가 가능했다.
그 속도가 제법 빨라 절정의 무인도 암기를 피하기 어려웠다.
주로 암살에 쓰이기에 강호에서는 금기시되는 물건이었다.
그것도 잠시, 가장 먼저 엎드린 흑의살풍이 고개를 갸웃했다.
암기에 적중했다는 어떤 느낌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힐끔 고개를 들어 보니 두 부부가 이화신기를 잡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흑의살풍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이화신기를 작동했다면 자신이 아니라도 다른 이의 비명이 들려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을 발사한 부부만이 넋이 나간 듯 이화신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혹시 불발?
그때 한빈이 내공을 담아 외쳤다.
“혹시 이걸 찾나?”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모였다.
아니 정확히는 한빈의 손끝에 모였다. 한빈의 손에는 수십 개의 은침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흑의살풍은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화신기에서 암기를 빼내다니?
그것도 이화신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조차 모르게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흑의살풍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지금 원수에게서 목숨을 구원받은 것이었다. 물론 원수는 한빈이었다.
흑의살풍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을 때 부부 중 사내가 말했다.
“어느 틈에?”
“침은 의원에게 필요한 것이지, 환자에게 필요한 건 아니지.”
한빈이 활짝 웃으며 손에 든 은침을 흔들었다.
“네놈이…….”
사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공이 실린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터벅터벅.
발소리의 주인공은 양악군이었다.
그가 다가오자 사내와 여인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두목.”
“면목 없습니다.”
둘의 변명에 양악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양악군은 더는 오지 않았다.
아직도 엎드려 있는 산서삼살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짓던 양악군이 그 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내공을 담은 그의 진각에 배가 출렁했다.
양악군의 공격이 시작된 것일까?
물론 그것은 아니었다.
양악군은 발을 구른 뒤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났다.
동시에 돛 위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촤-악!
그것은 그물이었다.
그물이 일부 뱃사람과 부부, 그리고 그곳에 모여 있던 산서삼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양악군은 씩 웃으며 산서삼살을 향해서 외쳤다.
“나는 내 배가 피로 덮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갑판을 닦는 데 몇 날 며칠을 소모하곤 하지. 물론 내가 하는 일은 아니지만 내 부하들이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네.”
명백한 협박.
산서삼살 중 흑의살풍은 어이기 없었다.
한빈에게 당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에게 이렇게 끌려다니는 것도 억울한데, 수적 놈한테까지 수모를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