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운수 좋은 날 (1)
무소율의 물음에 한빈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무소율이 어색하게 웃었다.
한빈이 설화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을 대로 하시죠, 소저.”
한빈이 답하자 무소율은 말 고삐를 잡고 앞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빙혈서생에게 말을 맡기려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설화가 조용히 물었다.
“무소율 소저는 공자님과 무슨 사이예요?”
설화는 한빈의 대답을 기다리며 죽통을 열어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때 한빈이 답했다.
“아, 파혼한 사이.”
“풋.”
설화가 물을 뿜었다.
다급하게 표정을 수습한 설화가 한빈과 창밖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고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무소율이 마차에 오르자 악비광도 다가왔다.
악비광이 마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대며 물었다.
“대형, 저도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넌, 안 돼.”
“무 소저는 되고 왜 저는 안 됩니까?”
“잘 봐, 여기에 네가 탈 자리가 있는지.”
한빈이 마차 내부를 가리켰다.
악비광의 커다란 덩치에 비하면 좁아 보이는 마차 내부였다.
악비광이 모른 척 다시 물었다.
“정말 안 됩니까?”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타라, 비광아.”
“나중이 언제입니까?”
“근골을 조절할 정도의 경지가 되면 타도 되지.”
“아, 정말 너무하십니다.”
악비광이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마차 안에 있던 모든 이가 웃었다.
* * *
며칠 후.
표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빈은 전서구를 날려 산서삼살이 청명환을 탈취했다는 사실을 퍼뜨리는 것을 보류했다. 대신 홍칠개에게 전서구로 표행이 하남정가에 도착하지 않을 경우, 바로 다시 소문을 퍼뜨리라는 부탁을 전했다.
그들이 온 거리는 천 리 중 오분지 일.
잔도를 끼고 도는 길은 끝이 나고 이제는 뱃길로 올라서야 할 차례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사파 무리 중 몇을 만났다.
다행히 그들은 산서삼살의 아래였기에 표행과 마주치자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쳤다.
순조로운 표행이 진행되는 동안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두 쌍의 눈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무명과 장자명이었다.
“헉헉.”
장자명이 가쁜 숨을 토해 냈다.
그는 산 아래 잔도를 지나가는 마차를 내려다보며 끊임없이 산자락을 타고 있었다.
물론 그 마차는 한빈이 탄 마차였다.
숨을 몰아쉬던 장자명이 외쳤다.
“조금 쉬었다가 가죠!”
“장 의원님, 지금 쉬면 주군을 놓칠 수 있습니다.”
“아니, 이 길이 지름길이라면서요. 가는 길에 못 구한 약초도 캐야 합니다.”
“혹시 주변에 찾으시는 약초가 있습니까?”
“험, 그러니까…….”
“지금 주군을 놓치면 약속을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럼 전서구가 백독문으로 날아가는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헉!”
장자명이 비명을 토해 냈다.
지금 한빈이 마차 위에 싣고 가는 전서구는 몰려오는 적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전서구는 장자명에게 채찍이었다.
그렇다면 당근은?
그것이 문제였다. 장자명에게는 당근이란 없었다. 장자명은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가는 경주마가 된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채찍의 효과가 엄청나다는 점이었다.
한빈의 전서구 한 방이면 백독문에서 파문되는 것은 물론이요. 무림에서 매장당할 것이 뻔했다.
사실 요즘 들어 장자명은 방심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채찍질하는 사람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그에게 재앙이었다.
타다닥, 타다닥.
장자명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산길을 타기 시작했다.
잔도로 산을 돌아서 가는 길보다 더 빠르지만, 체력이 문제였다.
장자명의 발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이무명이 외쳤다.
“전서구를 기억하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장자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잔도의 끝이 보이는 데다가 내리막길이라서 훨씬 수월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총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임무가 잔도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막 마차가 지나간 잔도의 끝.
이무명과 장자명이 나타났다.
이무명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검은색 바위 쪽으로 걸어갔다.
이무명은 바위 뒤를 찾다가 뭔가를 발견한 듯 쓱 집어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장자명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네, 확인했으니 빨리 영단산으로 출발하시죠. 그쪽에서 캐야 할 약초가 꽤 많습니다.”
“네, 지름길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무명이 씩 웃자 장자명의 안색이 다시 파래졌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갸웃한 장자명이 말했다.
“이 호위, 혹시 사 공자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고 계십니까?”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번에는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전서에 적혀 있습니다.”
“흠, 제가 맡은 일은…….”
“아닙니다. 분명히 전서에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말라고 되어 있을 텐데요.”
“그래도 이 호위는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무림이 뒤집힐 일이…….”
“괜찮습니다. 저야 몇 개월 뒤면 하북팽가를 떠날 사람 아닙니까?”
이무명이 씩 웃었다.
장자명은 그때야 이무명이 현실적인 무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 *
잠시 후. 한빈이 탄 천리 표국의 마차.
덜그럭, 덜그럭.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자 한빈이 창밖을 바라봤다.
멀리 물길이 보이는 것이 나루터 근처였다.
아마도 강가에 깔린 자갈 때문에 바닥에 고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루터에 도착한 한빈이 재빨리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던 중 어딘가로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휙!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말을 마친 한빈은 피식 웃으며 눈을 비볐다.
멀리서 구결을 나타내는 점을 본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람도 없고 점도 없었다.
그때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그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나루터 쪽에서 편육랑아 강소추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반 시진 전까지만 해도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그였다.
그런데 이리 웃고 있다니?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다시 편육랑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역시 너희들도 우리 산서삼살의 위명을 알고 있구나.”
“네네, 그렇습죠.”
“이렇게 나루터까지 비워 두다니. 우리의 위명이 아직 살아 있는 게야.”
기분이 좋아진 편육랑아가 낭아봉을 바닥에 박았다.
파-악!
동시에 나루터 쪽의 자갈이 튀어 올랐다.
편육랑아는 천천히 걸어 한빈 쪽으로 걸어왔다.
“나눠서 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대협.”
“아, 대협이라고 부르지 말래도 그래요. 누가 보면 내가 산서삼살을 끌고 가는 줄 알 거 아닙니까? 하남정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산서삼살이 우리를 끌고 간다는 걸 명심해 주시죠.”
“아, 그러니까…….”
“당당하게 어깨 펴고.”
한빈이 씩 웃자 편육랑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었다.
“흠, 그러니까. 우리가 나룻배를 나눠서 안 타도 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죠?”
“오늘따라 나루터에 손님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차와 말, 그리고 저희를 한 번에 태울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의 위명 때문에 사람들이 자리를 피한 것 같습니다.”
편육랑아가 자랑스러운 듯 뒤쪽을 힐끔 바라봤다.
그때 뒤쪽에서 흑의살풍과 빙혈서생이 표사 일행과 함께 걸어왔다.
그중 윤용호가 한빈의 앞으로 걸어왔다.
“배는 해결된 것 같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나루터에 손님이 없다는데 무슨 일이죠? 이곳 장하가 이렇게 한가한 곳이 아닐 텐데요?”
“어찌 그렇게 잘 압니까?”
“저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사실 표행을 다니면서 오늘 같은 경우는 처음입니다. 이곳 나루터는 장하의 중심이 아닙니까? 그래서 상권도 형성되어 있고. 그런데 장사치마저 안 보인다니, 덕분에 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군요. 운수가 좋다고 해야 하나? 껄껄.”
“네, 우리가 운수가 좋다고 하면 누군가의 운수는 사납겠군요.”
“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강호를 떠돌다 보면 운이라는 게 한정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운을 뺏기 위해 싸우는 것이 바로 문파 간의 전쟁이지요.”
“꼭 말하는 게 강호의 노고수 같군요. 대체 언제 그렇게 안목을 넓혔습니까?”
“책에서 배웠습니다.”
“흠.”
윤용호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까지 한빈의 대답은 모두 비슷했다.
어디서 들었다.
책에서 배웠다.
그것도 아니면 비밀이라고 얼버무렸다.
윤용호는 그가 하북팽가에서 키우는 비밀 병기라는 예측을 바꿔야 했다. 예측이 아니라 확신으로 말이다.
한빈은 조용히 어딘가를 바라봤다.
이곳 장하는 하남정가에서 운용하는 다루(茶樓)가 있는 곳이었다.
하북 번화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급 찻집이라 들었다.
시선을 돌려 보니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다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바로 하남정가에서 운영한다고 소문났지만, 경영권은 정화부인에게 있는 다루였다.
한빈의 눈빛이 이번만큼은 매섭게 번쩍였다.
이번 표행으로 정화부인과의 악연은 모두 끝내야 했다.
한빈의 달라진 기세에 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님, 왜 그러세요?”
“아니다.”
“아니긴요, 갑자기 주변이 싸늘해졌잖아요.”
설화가 해맑게 웃으며 주변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산서삼살이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한빈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 * *
한편 한빈이 바라보던 다루의 한구석.
비쩍 마른 중년이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온갖 차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던 그는 다시 다른 찻잔을 들었다.
“흠, 좋구나! 좋아.”
“단주님, 이제 시간이 됐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말하자 단주라 불린 중년 사내가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시간이 남았거늘 왜 이리 재촉하느냐?”
“단주님께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일찍 일어나는 새가 굶지 않는다고요,”
“허허. 고얀 놈. 됐고 용정차나 매화차 그리고……. 아니다. 여기 있는 차를 모두 다 다시 주문하거라.”
사내가 탁자에 있는 다기를 가리켰다.
“네, 알겠습니다.”
수하로 보이는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점소이에게 달려갔다.
중년 사내는 나루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줄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년 사내의 이름은 양악군.
강북의 대표적인 수적 집단인 강북 십이수로채의 채주 중 한 명이었다.
본래 장하에는 수적이 출몰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양악군이 활동하는 곳도 이곳 장하가 아니었다.
그가 활동하는 곳은 이곳에서 말로 하루를 꼬박 달려야 보이는 평령강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묘한 정보를 입수했다.
하북팽가가 청명환을 들고 지나갈 경로를 입수한 것이다.
하북팽가가 갈 곳은 총 세 곳.
그 경로 중에 근접한 강북 십이수로채의 채주 셋은 모여 회의를 했다. 그 결과 그가 맡게 된 곳이 이곳 장하였다.
강에서의 전투라면 구대문파가 와도 자신의 수공을 못 당할 것이라고 자부하는 양악군이었다.
다만 거대 문파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바로 보복이었다.
수적이라도 해도 물 위에서만 살 수는 없는 법.
뭍으로 나오는 죽은 목숨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이번 목표만은 달랐다.
다른 보물도 아닌 곤륜의 청명환이었다.
양악군의 눈이 수면에 비치는 물결만큼이나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