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89화 (89/621)

89화. 적과의 동침 (2)

이야기를 듣고 있던 빙혈서생도 재빨리 달려와 말을 보탰다.

“이건 오해입니다. 차라리 오해를 풀어 주고 저희를 이 자리에서 죽이시죠.”

빙혈서생의 절규에 편육랑아와 흑의살풍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한빈은 의외라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빙혈서생의 파리한 입술이 열렸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가 여기에서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지만, 그 헛소문이 퍼진다면 사람들은 우리 가족, 아니 저희와 연결된 사돈의 팔촌까지 뒤질 겁니다. 그냥 저희를 죽여 주시고 오해를 풀어 주십시오, 대협.”

빙혈서생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그의 말이 일리가 있긴 했어도 한빈이 여기까지 계획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몰렸다.

빙혈서생 소경운의 말을 곱씹던 한빈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사파인 중에서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인물이 있군요.”

한빈의 말에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전서구를 날린 하나의 행동에 이런 계책이 숨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그 계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대의 가족까지 담보로 잡는다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오직 빙혈서생 소경운만이 한빈의 계략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도의 길과는 상반되는 길을 걷는 사파인이라도 자신의 가족은 소중한 법이었다.

자신이 아닌 가족이 누군가의 손에 놀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산서삼살 의형제 셋의 어깨를 크게 떨렸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하늘을 한번 바라봤다.

마치 하늘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세에 아무도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이 결심한 듯 흑의살풍을 향해 말했다.

“일단 박아.”

한빈의 말뜻을 이해한 자는 산서삼살 중 없었다.

멀뚱멀뚱 한빈을 바라보는 산서삼살 셋은 마치 강호에 처음 나왔을 때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한빈이 씩 웃으며 바닥을 가리켰다.

“무슨 말인지 몰라?”

그 표정이 너무 순수했기에 옆에 있던 표사 둘은 입을 딱 벌려야 했다.

물론 설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산서삼살의 정리가 끝난 두 시진 후.

한빈은 조용히 허공을 올려다보며 용린검법의 구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급 구결 초식 두 개를 더 얻는 것이었다.

강호에 흩어진 용린검법의 구결을 찾는 것이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 더해 용린검법의 해석이 막히면 설명을 들을 방법도 알았으니 이제 답답함도 없어졌다.

허공을 보며 웃고 있는 한빈을 본 윤용호가 물었다.

“팽 소협, 저들을 언제까지 저렇게 둬야 하나? 아무리 사파의 무리라지만…….”

그는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으로 산서삼살을 가리켰다.

체구는 다르지만, 산서삼살 세 명은 공평하게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한빈이 시선을 돌려 표두 윤용호를 바라봤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런가? 팽 소협.”

“상대의 목에 칼을 들이댔을 때는 이 정도 각오가 되어 있어야죠. 그게 강호의 법칙 아닙니까?”

“그래도 가족을 담보로 위협하는 것은 정파의 도리에…….”

“아닙니다. 저들은 벌써 제 가족에게 칼을 들이댔습니다.”

“가족이라고? 그럼, 산서삼살을 전에 만난 적이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 제 동료가 가족이죠. 여기 있는 설화도 제 가족이고 표두님도 제 가족입니다. 전장에서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가족이 아니고 또 뭐겠습니까?”

이건 진심이었다.

피가 섞인 혈육이라도 등 뒤에 칼을 꽂는다면 그것은 가족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생의 귀검대와 현재 자신을 돕는 이들은 한빈에게 진정한 가족이었다.

“흠,”

윤용호는 할 말이 없었다. 한빈의 말에는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가족이 아니라고 하면 마치 배신자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가닥, 다가닥.

소리가 커질수록 나무로 된 잔도의 바닥이 점점 심하게 흔들렸다.

다시 느껴지는 표사 특유의 불길한 감각에 윤용호는 검집을 들었다.

동시에 옆에 있는 표사도 같이 검을 들고 보이지 않는 상대를 주시했다.

그때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공자님, 넷 같은데요.”

“말은 네 마리지만, 몇 명인지는 아직 모르지. 잘 들어 보면 말만이 아닐 수도 있고.”

“하긴 그렇겠네요.”

둘의 대화에 윤용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소리만으로 말이 몇 마리인지를 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말발굽 소리가 섞이면 그 숫자가 몇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강호 초출인 사 공자가?

“아.”

윤용호가 탄성을 터뜨렸다. 이제야 한빈이 강호 초출이라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무시했지만, 이후 산서삼살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벌인 일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한빈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게 하북제일의 겁쟁이라고?

다르게 생각하면 하북팽가에서 몰래 키운 비밀 병기일 수도 있었다.

도(刀)의 명가라 불리는 하북팽가에서 검술(劍術)의 달인까지 배출한다면?

그야말로 강북 오대세가 중에도 최고라 말할 수 있었다. 이런 기세라면 강북 무림 위에 하북팽가가 군림할 날이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몰랐다.

그때 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 표두님, 왜 그러세요?”

“아니네, 잠시 긴장했나 보네.”

윤용호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러던 중 다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한빈의 말투였다.

산서삼살과 마주치고 나서의 말투와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의 말투가 확연히 달라졌다.

누가 보면 다른 사람이라고 할 정도였다.

지금의 모습만 본다면 하북제일의 겁쟁이라 불리던 그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윤용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 굽은 길을 돌아 말이 나타났다.

다가닥, 다다닥.

윤용호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말이 두 마리만 나타났기 때문이다.

“팽 소협, 네 마리라고 하더니 두 마리만 보이는군.”

한빈과 설화가 틀리자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 윤용호였다.

그만큼 둘이 이번에 보여 준 모습은 놀라웠다.

말의 숫자라도 틀려야 강북 무림이 조금이라도 덜 들썩일 수 있다는 얕은 생각이었다.

그것도 잠시 윤용호는 검집을 꽉 틀어쥐었다.

말을 탄 상대가 점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창을 든 남자와 검을 든 여인.

즉 무인이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황급히 뛰어온다는 것은 목표가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 목표가 여기라면?

윤용호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그때 앞서 나오던 말 탄 사내가 안장 위에서 튕겨 올랐다.

말이 오는 속도에 사내의 경공이 더해지자 그는 쏜살같이 윤용호 쪽으로 날아왔다.

윤용호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았다.

스릉!

그때였다.

뒤쪽에 있던 한빈이 윤용호의 손을 막았다.

탁!

덕분에 윤용호의 검은 반쯤 뽑혀 나오다가 말았다.

윤용호의 앞으로 나온 한빈이 외쳤다.

“악가 놈아. 왜 이리 호들갑을 떨면서 왔냐?”

“대형, 괜찮으신 겁니까?”

사내는 창을 바닥에 쾅 찍은 후 한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의 이름은 악비광이었다.

한빈과 절호곡 늑대 토벌 작전에서 만난 후부터 형, 동생 하는 사이였다.

나이는 비슷한데 한빈이 형 노릇을 했다.

악비광을 본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괜찮아?”

“그러고 보니 멀쩡한 것 같기도 하고요.”

악비광은 목을 쭉 빼고 한빈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폈다.

한빈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니까, 뭐가 멀쩡하냐고? 갑자기 여기에는 무슨 일이고?”

그때였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여인이 탄 말이 도착했다.

휘이잉.

투레질하는 말을 달랜 여인이 고삐를 잡은 채 불만 섞인 목소리를 토해 냈다.

“악 공자, 자기 말을 두고 튀어 나가면 남은 말 한 마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죠?”

모두의 시선이 여인에게 쏠렸다.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두 개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뒤쪽에 따라오며 악비광이 타고 있던 말까지 수습해서 데려온 것이다.

악비광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해해 주시오.”

하지만, 여인은 대답 없이 악비광을 제치고 쓱 튀어나와 한빈의 앞에 섰다.

“팽 공자님, 오랜만이에요.”

“…….”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이름은 무소율. 무씨검가의 직계로 한빈과 파혼한 사이였다.

여러 악연이 있었지만, 무씨검가와는 원한이 아닌 은인의 관계로 이어진 상태.

게다가 둘의 조합은…….

고개를 갸웃하던 한빈이 전에 악비광이 한 말을 떠올렸다. 악비광은 무소율을 좋아한다고 했다.

아마도 같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일 텐데, 여기에 이리 급히 온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무소율이 급히 말했다.

“뭘 궁금해하시는지는 알겠어요. 저는 우연히 전서구에 적힌 내용을 봤을 뿐이에요.”

“흠, 전서구는 분명 개방으로 갔을 텐데 그걸 어떻게 보셨나요?”

“아, 무제자 어르신께서 저희 가문에 잠시 머물고 계시거든요.”

“사부님이 그쪽에 계신다고요?”

“종종 놀러 오시던데요. 아마도 천수장에 머무실 때 빼고는 하북의 세가들을 순회하시는 것 같아요. 그분 말씀으로는 입맛에 맞는 음식이 없으시다나 뭐라나.”

“아.”

한빈의 탄성에는 허탈함이 묻어났다.

천수장을 떠날 때 영영 안 들어올 것 같더니 최근 다시 돌아왔는데, 그사이에 하북을 누비고 다닌 모양이었다.

제자를 받고 나서 생긴 심경의 변화 같았다.

제자에 대한 욕심이 충족되고 나자 이제는 음식에 대한 욕심으로 바뀐 것인가?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던 중 옆에 있는 악비광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무슨 일이더냐?”

“대형이 산서삼살에게 당했다고 하는데 제가 안 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미친 듯이 달려왔죠.”

“그게 아니라 너는 어떻게 전서구의 내용을 알게 됐냐는 말이다.”

“그야…….”

악비광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무소율을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무소율은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리고 말이다.

“음.”

한빈은 침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일이 꼬인 모양이었다.

사파 쪽을 중심으로 소문을 퍼뜨리라고 했지만, 홍칠개 옆에 있던 무소율과 악비광이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마차를 본 설화가 눈을 크게 뜨며 끼어들었다.

“아, 그냥 말이 아니라 마차였네요.”

그 말에 무소율과 악비광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윤용호만은 입을 떡 벌려야 했다.

말의 숫자를 맞히는 것도 모자라 뒤쪽에서 멀리 따라오는 말까지 맞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 공자 한빈은 말의 숫자만이 아니라 마차인 것까지 예상한 듯 보였다.

윤용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닌가 하는 허탈한 감정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한빈은 윤용호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비광과 무소율을 바라보았다.

일단 그들의 입을 막는 것이 먼저였다.

“일단 둘 다 내 말을…….”

한빈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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