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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88화 (88/621)
  • 88화. 적과의 동침 (1)

    한 시진이 지나자 모든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물론 바닥에 남은 혈흔은 제외하고 말이다.

    마차를 잔도의 옆으로 치우고 산서삼살을 잔도의 가장자리 벽으로 몰아넣자 설화가 말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놈들은 없어요, 공자님.”

    “설화야.”

    “왜요?”

    “너는 쟤가 멀쩡해 보이냐?”

    “뭐, 괜찮아 보이는데요.”

    “아무래도 늑골 서너 대는 나간 것 같은데?”

    한빈이 빙혈서생 소경운을 가리키자 설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그건 저 사람이 약해서 그래요. 딱 봐도 혈색도 안 좋고……. 그래도 숨은 쉬고 있잖아요.”

    설화가 숨도 안 쉬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산서삼설의 첫째면 몰라도 둘째와 셋째가 한 번에 덤벼도 꺾을 수 있는 설화였다.

    물론 정정당당한 비무가 아닌 살수의 본능을 살린 생사결을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설화는 자신이 흥분한 것을 이제야 깨쳤다.

    하지만 설화의 말 중 반은 사실이었다.

    양과 음의 조화 중 음의 내공을 익힌 빙혈서생은 혈색이 파리했다.

    산서 무림에서는 그의 혈색이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지만, 쓰러져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환자였다.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지?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고 화풀이하는 것 같았는데.”

    “아, 그것도 오해예요. 공자님하고 제가 어떤 사이인데 그런 말을 해요?”

    “무슨 사이기는?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지.”

    “아, 너무하시네요.”

    한빈은 아무 말 없이 피식 웃다가 산서삼살을 가리켰다.

    “설화야, 손님들 좀 깨워 봐.”

    “네, 공자님.”

    설화가 먼저 흑의살풍의 아혈을 풀었다.

    픽! 픽!

    흑의살풍이 게슴츠레 눈을 뜨자 한빈이 그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제 정신은 들고?”

    한빈의 질문에 흑의살풍 막대강이 미간을 좁혔다.

    “음,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이렇게 욕을 보이려면 차라리…….”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물었다.

    “죽이라고?”

    “흠.”

    흑의살풍 막대강이 헛기침하자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졌으면 승복하는 게 강호의 도리이거늘, 승복을 하기는커녕 얼굴에 침을 뱉을 기세네.”

    “이놈이 정녕…….”

    흑의살풍의 미간에 팔자 주름이 잡혔다.

    “관은 잘 짜 줄게. 걱정하지 말고.”

    한빈이 씩 웃자 막대성은 표정을 굳혔다.

    얼굴만 보고 정파의 논리를 들먹이며 대충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왠지 모르게 한빈의 말투에서 사파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대화로 풀어 봅시다.”

    “강호에 나오면서 느낀 건데 대화로 풀자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더라고요.”

    “대체 뭘 원하시오?”

    “생각해 봐, 너희들은 청명환을 원해서 나를 죽이려고 온 거 맞지?”

    “…….”

    “그런데, 실패했고 말이야. 그럼 나는 너희를 어떻게 해야지?”

    “그야…….”

    “그래, 네 생각이 맞아. 원래는 정의맹과 사도련의 규칙에 따라 목을 따는 게 맞겠지.”

    “규칙에 항거불능의 상대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게 되어 있지 않소?”

    “그건 맞지. 협정에 의하면 말이야. 그런데 그건 약자를 해치지 못하게 서로 협약을 맺은 거고. 너희는 다짜고짜 나를 죽이려고 덤볐잖아. 너희 사도련주는 목에 칼이 날아왔는데 상대를 용서해 주나?”

    흑의살풍은 아무 말 없이 눈만 끔벅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표두 윤용호도 상황이 좀 이상했다.

    하북을 벗어나는 것이 처음이라 들었는데, 지금 대화를 들어 보니 강호를 훤히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이 말을 이었다.

    “승부는 났고 더 이상 피를 보기는 싫으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해.”

    말을 마친 한빈이 흑의살풍 막대강의 마혈을 찍었다.

    순간 그의 근육이 꿈틀댔다.

    기가 자유롭게 혈도를 타고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자유로운 몸이 된 흑의살풍이 말했다.

    “지금 우리를 풀어 주시는 건가?”

    반존대로 묻자 한빈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왜 자꾸 물어? 그리고 왜 보고만 있어. 네 동생들 혈도는 네가 알아서 풀어야지.”

    한빈의 말에 흑의살풍은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빙혈서생에게 다가가 그의 혈도를 풀었다.

    픽!

    빙혈서생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삼살의 첫째 흑의살풍과 눈이 마주쳤다.

    “혀, 형님, 대체 이게 무슨…….”

    그때 한빈이 끼어들었다.

    “볼일 끝났으면 빨리 가래도 그러네.”

    “아, 알겠네. 그러지.”

    흑의살풍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편육랑아의 혈도마저 풀었다.

    이제 모두가 자유의 몸이 된 상태.

    산서삼살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빈을 바라봤다.

    그중 흑의살풍이 말했다.

    “사정을 봐줘서 고맙네. 그리고 이 은혜는 언젠가는 꼭 갚겠네.”

    “일단 귀찮으니 빨리 가라고.”

    “진짜 이렇게 보내 주는 것인가?”

    “빨리 가래도 그러네.”

    한빈이 귀찮다는 듯 손짓하자 가장 상태가 좋은 편육랑아가 양옆에 흑의살풍과 빙혈서생을 끼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때 윤용호가 다급히 한빈의 소매를 잡았다.

    “사 공자, 정말 이렇게 보내 주시는 거요?”

    그 말에 산서삼살이 걸음을 멈췄다.

    그들에게는 청천 하늘에 날벼락.

    하지만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당연하죠. 승부가 정해진 상태에서 굳이 사람을 해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들은 악랄한 사파의 무리네. 언제 다른 무리를 이끌고 이곳으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그냥 보내 준다고? 이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일세.”

    윤용호가 피를 토하듯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한빈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허허로운 그의 모습에 윤용호도 재촉하지 않았다.

    침묵이 어색해질 때쯤 한빈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끌고 오면 또 어떻겠습니까? 약하면 뺏기는 것이고 강하면 지킬 수 있는 것이 강호의 법칙 아니겠습니까?”

    “허, 소협의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험.”

    윤용호는 자신도 모르게 사 공자에서 소협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한빈이 말하고 있는 것은 강자존의 법칙과 더불어 강호의 도리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아쉬운지 혀를 차더니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발로 두드렸다.

    설화도 이 일이 이렇게 끝날지 몰랐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싱긋 웃고 있었다.

    물론 한빈의 태도에 가장 놀란 것은 산서삼살이었다.

    그중 흑의살풍 막대강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미한 습기가 차올랐다.

    약한 자를 밟고 이 자리까지 올라선 자신이었다. 자신은 한 번도 약자에게 이런 너그러운 아량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방금 한빈과의 결투는 미미하지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략에서 진 것도 패배는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한빈이 이런 아량을 보여 줄 줄은 몰랐다.

    정파의 인물에게는 죽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흑의살풍이 한빈을 향해 조용히 포권했다.

    그때였다.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빈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전서구 말이에요.”

    “전서구가 왜?”

    “뭐라고 적은 거예요?”

    “별말 아니야.”

    “아, 궁금해서 그래요.”

    그들의 대화에 윤용호도 귀를 쫑긋했고 자리를 떠나려던 산서삼살도 발길을 멈췄다.

    모든 시선이 한빈에게 모인 상태.

    한빈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참, 갑자기 나를 이렇게 보니 부담스럽네. 원래는 비밀이었는데, 이번만 밝힐게.”

    “빨리요.”

    설화가 재촉하자 한빈이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청명환이 탈취당했다고 날렸어.”

    “탈취당했다고요?”

    “그래, 산서삼살한테 탈취당했다고 써 놨어. 아마도 지금쯤이면 사부님께 잘 도착했을 거야.”

    “헐, 그러면 지금 난리 난 거 아니에요? 팽가에서도 놀라서 달려오겠네요.”

    “그쪽보다 사파 쪽에 먼저 소문이 퍼질걸.”

    “사파 쪽은 왜요?”

    설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빈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파 쪽을 중심으로 소문내 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여기까지 얘기한 한빈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는 산서삼살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대화가 멈추자 옆에서 대화를 듣던 윤용호도 침을 꿀꺽 삼켰다.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가장 재미있는 부분에서 고의로 끊는 듯한 한빈의 태도에 윤용호가 끼어들었다.

    “왜, 사파 쪽에 소문을 낸 건가? 팽 소협.”

    “그야 간단합니다. 만약에 정파 쪽으로 소문을 흘린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야…….”

    “자기 일 아니니 뒷짐 지고 사태의 추이를 보겠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뭐, 이유는 간단합니다. 청명환을 찾는다고 해도 그것을 자신이 취할 수 있을까요? 명색이 정파인데요.”

    “흠, 일리가 있지만 좀 씁쓸하군.”

    “하지만, 사파 쪽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눈에 불을 켜고 청명환을 빼앗기 위해 산서삼살을 추격하겠지요.”

    “오호라. 그런 깊은 뜻이 있겠군.”

    “뭐, 그 뒷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산서삼살보다 강한 고수가 나타나 사실을 토설할 때까지 고문하겠죠. 사파의 틈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그때는 정파의 추격을 받을 겁니다.”

    “그렇다면 바로…….”

    “네, 생각하신 게 맞습니다. 무림 공적이 된다는 거죠.”

    “그런데, 산서삼살의 말을 믿어 줄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표행의 전력이라고 해 봤자 윤 표두님과 강 표두님밖에 없습니다. 저야 하북제일의 겁쟁이라는 오명이 가시지 않은 상태고요.”

    윤용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임무를 맡은 자신도 조금 전까지는 한빈에 관해서는 오해하고 있었다.

    “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저들이 돌아가 우리한테 당했다고 해도 믿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겠군.”

    “네,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빈은 시선을 돌려 사람 좋은 얼굴로 산서삼살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빨리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옆에 있던 설화는 입을 딱 벌렸다.

    이건 살수의 악랄함과는 차원이 다른 악이었다.

    설화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청명환은 어떻게 하고요?”

    “뭐, 우리가 꿀꺽해도 모든 죄는 산서삼살이 뒤집어쓰는 거지.”

    한빈이 입에 약을 털어 넣는 시늉을 했다.

    그때였다.

    흑의살풍이 바람처럼 한빈의 앞에 뛰어왔다.

    “대협!”

    한 단어였지만, 내공을 담아서 외친 목소리는 잔도의 나무 바닥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한빈이 황당하다는 듯 흑의살풍 막대강을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빨리 갈 길 가시죠.”

    “대협, 오해는 풀어 주셔야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약한 저희를 꺾고 청명환을 탈취해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뭐, 한칼에 저희의 목을 베었다면 누가 가져갔는지도 모르게 청명환을 탈취하실 수 있었겠지요.”

    “…….”

    “하지만, 저희가 완강히 저항하는 바람에 소문도 나고 상처를 입으신 게 아닙니까? 물론 탈취에는 성공하셨지만요.”

    이제는 산서삼살이 청명환을 탈취했다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말하는 한빈이었다.

    앞에서 들었던 한빈의 이야기는 누가 봐도 그럴듯해 보였다.

    만일 이곳을 떠난다면 한빈의 말대로 사파 고수들의 추격을 받을 것이 훤했다.

    흑의살풍 막대강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 오해를 풀어야 했다.

    이 오해를 풀어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대협! 제발 오해를 풀어 주시죠.”

    흑의살풍이 절뚝거리며 한빈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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