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87화 (87/621)

87화. 천리 표행 (5)

지금은 황색의 절벽에 맞춰 황색의 무복을 입고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은밀한 검의 비밀이었다.

물론 초절정 초급에 준하는 무위를 낮추려는 것은 아니다.

변검과 초절정 수준의 검.

이것이 그를 산서를 벌벌 떨게 한 고수로 만든 비결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전생의 기억을 통해서 그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전생에는 흑의살풍의 검에 당했었다. 등에 흉터를 남기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몸에 흉터를 남길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피식 웃은 한빈이 코끝에 감각을 집중시켰다.

순간 달콤한 향기가 한빈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한빈은 그 방향을 향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뻗었다.

휙!

동시에 단풍 모양의 붉은색이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빈은 그 모습에 씩 웃었다.

이전에 던졌던 가짜 한철 궤 속에는 꿀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전생에 사냥개 소리를 듣던 한빈은 과거로 돌아와서도 특유의 감각은 지니고 있었다.

이 싸움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

그렇게 상대를 압도해 나가던 중, 한빈이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윙! 윙!

갑자기 벌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흑의살풍이 은신한 곳이라면 벌이 따라가 그의 행방을 가르쳐 주었다.

게다가 그의 움직임 때문인지 벌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윙! 윙!

한빈만 해도 상대하기 벅찬 상황인데 꿀벌까지 자신을 향해 덤비니 흑의살풍을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남들이 보면 이상한 경공을 펼친다고 오해할 법한 흑의살풍의 움직임 아래 한빈의 검이 춤을 추었다.

휙! 휙!

변검을 이용한 은신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흑의살풍은 한빈의 아래였다.

푹!

그의 어깨를 한빈의 검이 꿰뚫었다.

동시에 한빈은 구걸십팔보를 극성으로 운영했다.

극성까지 펼친 빠른 보법 때문에 세 걸음 안은 한빈의 절대적인 공간이 되었다.

픽! 픽!

한빈이 그의 아혈과 마혈을 제압했다. 이제는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는 구결을 수확해야 할 때였다.

팍! 팍!

한빈이 구결을 수확하기 위해 흑의살풍을 가차 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흑의살풍의 눈이 커졌다.

사파 경력 이십 년에 이런 미친놈은 처음이었다.

승부가 났으면 죽이든가, 아니면 승부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든가 둘 중 하나인 게 강호인의 습성이었다.

그런데 혈도를 제압하고 나서 무작정 팬다?

이것은 사파에서도 없는 법도였다.

‘이런 개새…….’

욕설을 뱉으려던 흑의살풍은 자신의 아혈이 제압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흑의살풍은 지금 한빈의 표정을 보고 눈가를 떨었다.

지금 한빈은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사람을 패면서 진심으로 즐거워한다고?

하북팽가라면 분명히 정파.

그중에서도 강북 오대세가에 이름을 올려놓은 최고의 가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그 의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파도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한빈은 그러거나 말거나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응용편 중 격(擊)을 획득하셨습니다.]

[흩어진 용혈신공의 구결 중 하나의 초식을 완성했습니다. 초식이 활성화됩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공격합니다. 이 허초는 상대방을 한 번의 공격에 한해 무력하게 만듭니다. 단, 무공의 경지가 자신보다 높을 때에는 이 할의 확률로 공격을 성공시킵니다. 필요 공력 오 년.]

나타난 글자에 한빈은 환희에 찬 신음을 흘렸다.

“음.”

같은 경지의 상대 혹은 경지가 아래일 경우 상대방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경지와 일대일 비무를 벌일 때는 무적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신보다 경지가 높을 경우는?

여기에는 조금 변수가 존재한다.

확률을 따져 본다면 이 할의 성공을 십 할로 만들려면 단순하게 이십 년의 공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운이 없다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공력과 추가 구결.

아직도 흑의살풍의 여기저기에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남아 있었다.

한빈은 눈에 보이는 구결을 캐기 시작했다.

물론 생각 중에도 한빈은 주먹을 멈춘 적이 없었다.

퍽!

이번에는 처음 보는 문구가 나타났다.

[용린검법 기본편의 구결 중 공(功)을 획득하셨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책장으로 흡수를 보류합니다.]

새로운 문구는 이후에도 몇 번이 반복되었다.

[······부족한 책장으로 흡수를 보류합니다.]

기본편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추가 책장을 흡수하든지 신체의 내공이나 감각을 높이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한빈이 포기하고 주먹을 멈추려 할 때였다.

이전과는 다른 글귀가 나타났다.

[타격의 임계치를 넘었습니다. 용린겁법의 보충 설명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흡수하지 못한 ……]

흡수를 보류한다는 글자의 획이 분리되며 다른 글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공(功), 속(速) 체(體), 력(力) 등의 글자들이 분리되며 문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책장을 추가하려면 인급 구결…….]

글자의 획이 다하자 설명도 멈췄다.

“이런 제길!”

한빈은 흑의살풍 막대강에게 보이는 점들을 다시 공략하기 시작했다.

다시 보충 설명이 이어졌다.

[······세 개를 모으면 기본편의 책장이 추가됩니다.]

* * *

편육랑아의 낭아봉을 제압하기 위해 표두 윤용호는 진땀을 빼야 했다.

편육랑아의 무공 수위가 생각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윤용호는 그의 낭아봉을 경계하면서 쉼 없이 뒤쪽을 돌아봤다.

편육랑아보다 한 단계 위라는 빙혈서생과 흑의살풍에게 맞서는 설화와 한빈이 못 미더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평육랑아를 제압한 후 주변을 바라보고 경악해야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시녀 설화였다.

설화는 정신을 잃은 빙혈서생을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내가 왜 시녀 노릇을 해야 하는 거지!”

퍽!

“대체 왜 나를 못살게 구는 거야!”

퍽!

“진짜 성질 같아서는 그냥 자근자근 썰어서 황하에 털어 넣어야…….”

발길질 한 번에 넋두리 한 번.

시녀가 빙혈서생을 제압하다니?

물론 경공을 보고 설화가 한 수를 가진 소녀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결과는 상상도 못 했다.

잘해 봐야 빙혈서생을 유인해서 시간을 벌어 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게다가 이 가차 없는 손속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 손속이 열다섯 살 소녀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윤용호는 믿기지 않았다.

설화에게 천천히 걸어간 윤용호가 말했다.

“소저!”

출발할 때만 해도 편하게 이름을 불렀지만, 지금은 조심스러운 호칭이 저절로 나왔다.

“이런 개밥도 안 되는 놈이 성질을 건드리고 그래.”

하지만, 설화는 계속 넋두리를 하며 빙혈서생을 발로 걷어찰 뿐이었다.

보다 못한 윤용호는 설화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톡! 톡!

그의 조심스러운 신호에 설화가 발길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순간 윤용호는 설화 속에서나 나오는 악귀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윤용호는 지금 앞의 소녀가 악귀라는 것을 생긴 것이 아니라 기세로 알 수 있었다.

그 기세의 정체는 순수한 살의(殺意).

미간을 꿈틀대던 설화가 윤용호를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천진난만한 표정.

윤용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빙혈서생을 가리켰다.

설화가 쓰러진 빙혈서생을 바라봤다.

동시에 설화의 눈이 커졌다.

설화는 빙혈서생에게 달려가서는 손수건을 꺼내 그의 상처를 닦아 주며 말했다.

“죄송해요, 아저씨. 공자님이 반만 죽이랬는데, 저도 모르게……. 죄송해요.”

윤용호는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저걸 병 주고 약 준다고 해야 하나?

쓰러진 빙혈서생의 상처를 처치한 설화가 일어나자 윤용호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저 사람 말이죠?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 미치겠네, 분명히 반만 죽이라고 했는데……. 조금 더 죽인 것 같기도 하고…….”

횡설수설하는 설화에게 윤용호가 양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소저가 괜찮냐고 물어본 겁니다.”

“아, 저요?”

놀란 설화가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윤용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저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설화는 말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불길함을 느낀 윤용호가 재빨리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소저.”

“그런데 아저씨. 왜 저를 소저라고 부르세요? 출발할 때도 설화라고 친근하게 불러 주셨잖아요.”

“아, 그러니까…….”

“편하게 불러 주세요.”

“아, 알았다. 설화야.”

윤용호는 입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윤용호는 편육랑아 강소추와 빙혈서생 소경운의 마혈을 제압해서 마차 옆에 묶어 두었다.

모든 상황이 끝난 것 같자 윤용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왜 그렇게 한숨을 쉬세요?”

“말이 산서삼살이지, 삼살을 이렇게 제압한다는 건 상상도…….”

윤용호가 말끝을 흐렸다.

이제야 삼살의 첫 번째인 흑의살풍이 기억난 것이다.

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사 공자님은 어디에 계시는 거죠? 혹시 납치라도?”

“우리 공자님이 납치를 당해요? 그럼 좋…….”

설화는 재빨리 끝말을 삼키고 손가락으로 잔도의 굽어진 곳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윤용호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멀리서 빨래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퍽! 퍽!

빨랫방망이로 빨래를 자근자근 다지는 이 소리는 박자까지 맞춰 일정하게 들렸다.

“저게 뭐지?”

그때 설화가 다급하게 그곳으로 달려갔다.

“나보고는 반만 죽이라고 해 놓고서는!”

윤용호는 그 뜻을 알지는 못했지만, 다급하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지척에 있는 현장에 도착한 윤용호는 그제야 설화의 말뜻을 알았다.

지금 눈앞에서는 한빈이 마늘을 절구에 넣고 다지듯 흑의살풍을 빻고 있었다.

문제는 한빈의 표정이었다.

화풀이하는 듯 빙혈서생을 패던 설화의 표정과는 달리 한빈의 표정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표정만 봐서는 염화미소를 떠올릴 정도였다.

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주먹은 아수라와도 같았다.

윤용호는 한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려 했다.

그때였다.

한빈이 타격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윤용호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얼굴은 부처인데 주먹에 흐르는 피를 보면 완벽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였다.

설화가 달려와 다급하게 손수건을 꺼냈다.

“철노 아저씨 말이 맞네요. 자꾸 주먹을 다친다고. 그러니까 주먹 쓰지 말라고 부탁드렸잖아요.”

“아, 미안.”

“일단 상처부터 치료해요.”

설화는 손수건으로 한빈에게 묻은 피를 닦아 냈다.

그 모습을 보는 윤용호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딱 봐도 한빈의 피가 아닌 흑의살풍의 피였다.

그런데 대화는 한빈이 피해자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었다.

순간 윤용호는 낭인왕 이세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천 리를 가는 동안 강호를 배우게. 그리고 하북팽가 사 공자에게 배울 것이 있으면 훔쳐서라도 배우게.

그는 이 말뜻을 오해했었다.

언제든 깨질 물건이니 그 물건을 옮기며 경험을 쌓으라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말뜻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뭘 배워야 할지는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윤용호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리 표행의 의미를 되새김질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