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천리 표행 (4)
가느다란 붓에 맞춰 종이도 손가락 한 마디만 했다.
너무 난데없는 상황이 표사들도 산서삼살도 입을 떡 벌렸다.
칼이 오가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붓을 드는 광경을 이때가 아니면 언제 볼 수 있을까?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세필로 정성껏 글씨를 썼다.
그러고는 재빨리 종이를 말아서 손가락 한 마디 굵기도 안 되는 통에 넣었다.
“여기 있다. 설화야, 잘 부탁한다.”
“네, 공자님.”
설화는 재빨리 마차의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그 모습에 윤용호가 눈을 크게 떴다.
설화가 지붕에 착지할 때 마차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기 때문이다.
경공으로 보자면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천리 표국에서 낭인왕 이세명 다음가는 경공의 달인이 윤용호였다.
그런데 저런 날렵함을 보이다니!
윤용호의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설화는 전서구 하나를 꺼내 전서 통을 매달았다.
푸드득.
비둘기가 날갯짓하며 푸른 하늘로 날아갔다.
여기까지 일이 숨 몇 번 쉴 정도에 시간에 일어났다면 누가 믿겠는가?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 뒤쪽에 있는 빙혈서생이었다.
창백한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아이야, 지금 무슨 장난을 친 것이냐?”
이것은 한빈에게 한 이야기.
하지만, 정작 발끈한 것은 설화였다.
설화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네가 날 놀리는 것이냐? 무슨 수수깡도 아니고 한 대 치면 쓰러질 새끼가 나한테 꼬마라고? 확 잘게 썰어서 황하에 던져 버릴까 보다.”
순간 주변은 정적에 싸였다.
열다섯도 안 되는 소녀에게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놀랄 때 한빈은 설화에게 말했다.
“쟤는 네가 맡아라.”
“네, 공자님.”
설화가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만큼은 평범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착각.
스륵!
설화가 허리에서 연검을 뽑으며 물었다.
“썰어도 될까요?”
“쓸 때가 있을지 모르니까. 대충 처리해 둬.”
“네, 공자님.”
설화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표두 윤용호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설화의 지금 미소에는 오만 가지 감정이 압축되어 있었다.
뭔가 잡힐 것 같은 깨달음과 흑천의 명령으로 한빈과 계약한 설화였다.
하지만, 그 뒤 돌아온 것은 온갖 잡일밖에 없었다.
그런 불만은 하루가 다르게 쌓였고 그녀의 감정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붙은 벽력탄과 같았다.
시녀로 지내야 했던 나날은 그녀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감정이 한계치까지 온 순간이 바로 어제였다.
때마침 그 감정을 털어 낼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한빈이 다시 말했다.
“적당히!”
“…….”
하지만, 설화는 답하지 않았다.
마치 화장실이 급한 아이처럼 다급하게 빙혈서생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한빈이 혀를 찼다.
한빈도 그 기분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챙! 챙!
빙혈서생의 철 부채와 설화의 연검이 부딪쳤다.
빙혈서생과 설화의 병기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혔다.
입을 벌린 빙혈서생과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고 있는 설화를 확인한 한빈이 표두 윤용호의 옆을 스치고 지났다.
윤용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화에 집중하고 있느라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 한빈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간 윤용호는 등골이 오싹했다.
한빈이 아군이 아니라 적이라면 자신의 목은 잔도의 바닥을 구르고 있을 것이었다.
윤용호는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한빈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한빈은 천천히 편육랑아의 옆을 스쳤다.
동시에 편육랑아가 낭아봉을 휘둘렀다.
붕!
주변의 낙엽이 날아갈 정도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한빈은 그 자리에 없었다.
편육랑아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외쳤다.
“그놈은 윤 표두님이 좀 맡아 주시죠.”
“…….”
윤용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쓰-윽!
윤용호가 검을 다시 고쳐 잡을 때 한빈은 그들 의형제 중 첫째인 흑의살풍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다.”
“흠.”
흑의살풍이 침음을 삼켰다. 오랜만이라는 한마디 때문이었다.
하는 짓으로 봐서는 전에 한 번은 마주쳤을 법한 한빈이었다.
하지만, 흑의살풍이 눈에 한빈은 처음이었다.
고민도 잠시, 흑의살풍은 한 단어를 떠올렸다.
‘격장지계’
한빈의 행동이 자신의 감정을 흔든다 생각한 것이다.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건넸다.
“지금 격장지계라고 생각하는 것 맞지?”
“…….”
흠칫한 흑의살풍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애송이라 생각하고 있는 한빈의 입에서 나온 행동이 너무 상반되었다. 그야말로 한빈의 행동은 강호의 늙은 생강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한빈도 흑의살풍의 인내심에 감탄하고 있었다.
살풍이라 불리는 이 인물은 전생에 칼을 마주친 적 있는 사파의 고수였다.
검은 안 보이고 바람만 일어난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 살풍이다. 거기에 지금처럼 흑의만 입고 다니기에 앞에 흑의라는 단어가 붙어 만들어진 별호였다.
한빈은 그의 무서움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가 살막의 초특급 살수 출신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그것은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다.
팽팽하게 눈싸움을 하고 있던 흑의살풍이 입을 열었다.
“지금 보낸 전서구는 대체 뭐지?”
“내가 그걸 왜 말해 줘야 하지?”
“이놈이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구나.”
“그럼 너는 관도 아까운 놈이고?”
한빈이 비릿하게 웃자 흑의살풍이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인내심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뒤쪽에서 한철 궤를 꺼내 한 손으로 돌렸다.
순간 멈칫하는 흑의살풍.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청명환이 망가질까 봐 쫄리는 건가?”
“흠, 이 미친놈이…….”
“쫄리는 걸 보면 영약에 대해서 공부하고 왔나 보군. 네가 생각한 대로 내가 이 상자를 떨어뜨리면 영약의 효능은 십분지 일도 안 남을걸?”
한빈이 씩 웃으며 다시 한철 궤를 손끝에서 놀렸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영약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갖은 영초를 배합해서 기사회생 또는 내공 증진의 효과를 압축한 환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도가의 영약 제조에서 반만 맞힌 것이다.
도가의 영약은 영초를 배합한 환약 속에 도가의 자연지기를 인위적으로 주입한다.
연단을 담당하는 도사가 따로 있는 이유이다.
외부 충격으로 기를 압축한 표면이 녹거나 깨진다면?
안쪽에 압축된 자연지기는 흘러나오고 나은 것은 표면을 둘러싼 약재밖에 안 남는 반쪽, 아니 일 할짜리 영단이 될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비싼 한철 궤를 써서 운반하는 것이었다.
한빈이 청명환을 넣은 한철 궤를 통통 튀기는 것을 보니 당연히 상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빈은 상대의 반응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 영단에 대해 알고 있는 놈들이 대화하기에 편했다.
물론 말로 대화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대화 방식은 주먹이 먼저였다.
한빈은 한철 궤를 흑의살풍을 향해 던졌다.
휙!
놀란 흑의살풍이 한철 궤를 재빨리 받았다.
탁!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한철 궤 특유의 차가움 대신 따뜻함이 느껴졌다.
“허, 이게 대체 뭐냐?”
흑의살풍이 살기를 담아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잡은 한철이 나무 조각처럼 부서졌기 때문이다.
흑의살풍은 재빨리 상자를 바닥에 버렸다.
한철 궤가 아니라 나무로 만든 가짜 상자였다.
철로 생각해서 세게 잡은 덕분에 나무 상자가 부서져 그의 손에 끈적이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액체를 재빨리 털어 낸 흑의살풍은 한빈에게 달려들었다.
이제는 인내심이란 단어는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동시에 한빈도 월아를 뽑아 들었다.
스릉!
이제는 싸움판이 되어 버린 이곳에서 오직 둘만이 웃고 있었다.
그것은 설화와 한빈이었다.
설화는 지금 화를 풀고 있는 중이었고 한빈은 보이지 않게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한빈이 흑의살풍을 택한 것은 우연일까?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흑의살풍에게서 구결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만약 흑의살풍의 진면목을 몰랐다면 이 싸움은 한빈의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빈에게 흑의살풍의 진면목은 약점이 될 수 있었다.
챙! 챙!
몇 번의 합이 끝나고 한빈과 흑의살풍은 서로를 노려봤다.
물론 무엇을 보는가는 달랐다.
흑의살풍은 한빈의 목덜미를 꿰뚫기 위해 노리고 있었고 한빈은 희미하게 일렁이는 구결에 집중했다.
한빈이 이렇게 구결에 집중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한빈의 현 상태였다.
기본편에 열 개의 구결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상태.
그중 공력은 본신 내공과 용린검법을 연동시켜 놓은 상황이다.
응용편 몇 개와 인급 구결 한 개.
그럼 응용편 중 완성을 못 하고 남은 구결은?
[성(聲), 동(東), 서(西)]
이 세 글자였다.
이 구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상태였다.
이번 임무는 한빈에게 용린검법의 구결을 완성할 기회였다.
곤륜파의 청명환을 노리고 벌 떼처럼 달려들 사파의 무인들을 노린 것이었다.
하북의 좁은 땅에서는 더는 구결을 찾을 수 없었다.
비급의 초반부에도 분명 알려 줬었다.
‘강호에 흩어진 구결을 찾아라.’
이제 좁은 하북의 땅에서 벗어나야 할 때.
이번 임무는 한빈에게 기회였다.
알아서 구결을 가진 자들이 이렇게 찾아오니 말이다.
한빈이 진한 미소를 피워 내며 흑의살풍의 간격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부드러운 바람이 한빈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살랑!
픽!
한빈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붉은 무복 때문에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예상대로 처음부터 구결을 노리기에는 상대가 위험했다.
한빈이 구걸십팔보에 ‘속(速)’의 효용을 실었다.
순간 한빈의 발이 빨라졌다.
대신 전체적인 공격 속도는 느려질 테지만, 흑의살풍의 발을 묶지 못한다면 승패는 해가 지도록 나지 않을 것이었다.
품으로 파고든 한빈이 재빨리 다음 구결을 떠올렸다.
‘일촉즉발.’
순간 한빈이 화살촉이 된 것처럼 날아갔다.
그 화살촉이 흑의살풍이라는 목표물을 꿰뚫으려는 순간.
휙!
그가 흑의만 남긴 후 사라졌다.
보법과 경공의 절묘한 조화였다.
한빈은 그 모습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는 강태공의 웃음과도 흡사했다.
아무 힘 없이 잡혀 오는 고기를 무슨 맛으로 낚을까?
한빈의 지금 기분이 그랬다.
서로의 투쟁심을 확인하는 과정은 한빈에게 즐거움이었다.
낚싯줄을 당길 때가 있으면 풀 때가 있어야 하는 법.
한빈은 검에 꿰뚫린 옷을 허공에서 썰었다.
획! 획!
검의 옷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바닥에 떨어질 때 한빈이 벽 쪽을 향해 날아갔다.
파팍.
한빈의 검 끝이 벽 쪽으로 움직이자 황색 벽이 일렁인다.
한빈이 그 모습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흑의살풍의 진면목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살막의 살수로 오해받는 은밀한 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흑의살풍의 출신은 북경의 유명한 경극단이었다.
경극을 하려면 칼을 쓰는 흉내도 내야 하는 법.
하지만, 어느 날 그는 경극보다 검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경극단에서 익힌 변검은 그에게 차별화된 무인의 길을 걷게 했다.
변검이란 얼굴의 분장을 바꾸는 법.
하지만, 흑의살풍은 옷을 배경에 맞게 바꾸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대결 중에도 쓸 수 있는 은신술이 그의 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