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천리 표행 (2)
한빈이 좌석을 두드리자 아래에서 소리가 들렸다.
찰칵.
마치 보물 상자가 열리는 것 같은 모습에 설화는 눈을 크게 떴다.
좌석을 살짝 든 한빈이 한철 궤를 넣자 다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금 넣었던 한철 궤를 다시 꺼냈다.
이상한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지금 뭐 한 거예요?”
“그냥 숨길 곳을 찾아본 거지. 궁금하면 말해 주고.”
“진짜 말해 줄 거예요?”
설화의 말에 한빈이 손을 내밀었다.
“질문 하나당 은전 한 냥부터 시작하지.”
“허, 강호에는 눈 뜨고 있는데 코 베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더니 시녀를 등치는 주인도 있네요.”
“그런 주인 만난 게 다행인 줄 알아. 강호에는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놈들이 더 많으니까.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말이지.”
그 말에 설화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을 한철 궤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깐 한철 궤를 넣었다 뺀 한빈의 행동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멈췄다.
한빈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이번 임무에서 한빈이 죽는다면 자신은 조용히 흑천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천수장에 조금 더 머물러야 하겠지만, 한빈이 이번 임무에서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이번 여정에 대한 소문은 강호에 파다하게 퍼졌다.
정파는 몰라도 사파에서는 눈을 불을 켜고 청명환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 것이 뻔했다.
이 부분에서 설화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 임무에 대해 소문을 낸 것이 팽가의 장로들과 각주들일 것이라며 그들을 협박했지만, 소문을 내는 데 가장 많은 힘을 쏟은 것은 한빈 자신이었다.
스승인 홍칠개에게 부탁해서 이번 임무에 대한 소문을 개방을 통해 퍼뜨렸으니 말이다.
이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을 넘어 미리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불길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모습과도 같았다.
이런 설화의 생각을 모르는 듯 한빈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밖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
그 휘파람 소리에 설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적이 오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빈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설화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봐?”
“너무 태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여기서 긴장해야 하나?”
“그게 아니라 이 정도 보물이면 언제 기습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지 않나요?”
“그건 설화 네 말이 맞지. 그런데 적이 나타나면 물리치면 그만 아닌가?”
“적을 감당할 수 없다면요?”
“여차하면 튀면 되지 뭐.”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밖을 가리키자 설화가 눈매를 좁혔다.
“지금 튄다고 하신 거예요? 공자님.”
“툭 까놓고 얘기해서 나랑 하남정가랑 무슨 상관있어?”
“흠, 그러니까…….”
살수 출신의 설화도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한빈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말이야. 이깟 한철 궤 같은 거 그냥 줘 버리고 튀면 되는 거잖아. 설화나 나나 경공 하나는 자신 있잖아.”
“아.”
설화는 입을 딱 벌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녀가 천수장에서 한빈의 행적을 놓친 것은 단 삼 일이었다.
설화는 그동안에 한빈이 묘책을 마련할 것이라 생각하며 내심 기대했었다.
그런데 계획이 적이 나타나면 줄행랑을 치는 것이 고작이라니?
설화는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봤다.
수염이 덥수룩한 표두가 무심한 표정으로 마차를 따르고 있었다.
설화와 눈이 마주친 표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표사의 이름은 윤용호.
낭인 출신의 표사로 천리 표국 내에서는 큰 상행에만 동행하는 십이표두 중 하나였다.
그의 무위는 절정 상급.
특히 경공술 하나만큼은 초절정 수준이라 불리는 표두였다.
그가 이번에 맡은 표물은 딱 하나였다.
한빈이 가지고 있는 한철 궤를 던져 주고라도 표물의 안전만 지키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복귀하라는 명을 낭인왕 이세명에게서 받았다.
그 때문에 대규모의 호위 병력도 필요 없었고 이 임무에 천리 표국의 깃발조차 꽂지 않았다.
즉, 공식적인 표행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북팽가와 천리 표국의 묘한 동행에서 윤용호가 할 일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 설화라 불리는 시녀만큼은 신경이 쓰였다.
그에는 설화만 한 딸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구구, 구구.
마차 위에서 비둘기 소리가 들렸다.
설화를 보던 윤용호는 마차 위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 위를 본 윤용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번 임무는 정말 묘한 표행이었다.
호위를 맡을 표사 대신에 지붕에 전서구로 쓰일 법한 비둘기 상자를 가득 담고 있었다.
이번 표행의 표물은 바로 저 비둘기가 담긴 여러 개의 상자였다.
청명환이라 불리는 영약이 담긴 한철 궤도 아니고.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도 아니고.
어찌 보면 흔한 전서구가 이번 표행의 표물이라니 황당할 노릇이었다.
* * *
다음 날 천수장.
한빈의 서찰을 받은 모든 이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심때가 되자 대부분의 인원이 천수장을 빠져나갔다.
아직 남아 있는 몇 명도 짐을 꾸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휴…….”
짐을 꾸리는 장자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이무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장 의원님, 왜 그렇게 한숨을 내쉽니까?”
“이 호위, 내가 한숨을 안 쉬게 생겼습니까? 오랜만에 꿀맛 같은 휴식을 맛보고 있는데 하루의 간격을 두고 사 공자를 따라오라니 이게 말입니까?”
“하하, 어차피 주군이 명하신 일이니 웃으면서 하시죠.”
“이무명 호위는 공자와의 계약이 몇 개월 남았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장자명은 쏘아붙이며 등에 짐을 메고 일어났다.
그 모습에 이무명이 기분 좋게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하하.”
그 웃음소리에 장자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는 휑한 천수장을 보자 묘하게 가슴이 허전했다.
이렇게 적막한 적이 있던가?
이제까지 그가 맡은 환자가 몇이던가?
눈코 뜰 새 없이 치료와 치료를 하며 혹사당한 그였다.
게다가 한빈의 부탁으로 백독문의 모든 비기를 동원해 새로운 독까지 실험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백독문에 머물렀으면 얻지 못할 깨달음이었다.
사람의 몸을 계속 들여다보니 인체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고 새로운 재료로 독을 만들다 보니 그 독이 인체에 들어가 어떻게 반응할지까지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일취월장한 그였지만, 천수장 내부에서는 그저 의원에 불과했다.
장자명은 한빈과의 계약이 끝나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막 천수장의 대문을 열려 할 때였다.
끼익.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이상한 광경이 얼핏 보였다.
장자명은 그 광경에 열려던 문을 재빨리 닫고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이무명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장 의원님.”
“이 호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밖에 누군가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럼 습격이라는 말씀입니까?”
이무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재빨리 문틈으로 밖을 바라봤다.
장자명의 말대로 대규모의 인원이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무명은 좀 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자세히 바라봤다.
‘뭐지?’
이무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인원은 제법 많았지만, 그들은 어떤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으며 무인이 아닌 일반 백성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몇몇 낯익은 사람의 얼굴도 보였다.
아랫마을 저잣거리에서 고기를 파는 상인의 얼굴이었다. 그 옆을 보니 포목점의 점원도 힘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무명이 힐끔 고개를 돌려 장자명을 바라봤다.
“장 의원님, 이상합니다.”
“혹시 사파에서라도 쳐들어온 건가요? 이 호위님.”
“그게 아니라 밖에 진을 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랫마을 사람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왜 여기로 몰려왔답니까? 혹시 사 공자가 사고라도…….”
“설마요. 주군은 어제 떠나시지 않았습니까?”
“그 전에 사고 치고 떠났을 수도 있죠.”
“음, 그렇다고 저희가 여기에 계속 머물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일단 나가시죠.”
“허허. 나가긴 나가지만, 이 호위님이 제 안위에 신경을 써 주십시오.”
“네, 약속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무명이 대문을 열었다.
덜컹.
천수장의 대문이 열리자 진을 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 따가운 시선을 받은 이무명과 장자명은 천천히 그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들의 시선이 묘했다.
처음에는 관심을 두더니 이내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이 아닌가.
무슨 소 닭 보듯 하는 표정들이었다.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말했다.
“아니네.”
“하긴 벌써 돌아올 리가 없지.”
“그래도 모르니까 기다려 보자구.”
장자명으로서는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굴 기다린다는 말인가?
그때 장자명의 눈에 낯이 익은 인물이 들어왔다.
아랫마을에서 약재상을 운영하는 천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장자명이 그에게 다가갔다.
“천 어르신,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 장 의원이시군요.”
“네, 접니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난리란 말입니까?”
“이 사람들은 모두 천수장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랍니다.”
“치료를 받으려고요······?”
장자명은 말끝을 흐렸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장자명은 주위를 둘러봤다.
자세히 보니 몸이 성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떤 이는 허리가 아픈지 꾸부정하게 앉아 있었으며 어떤 이는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안색이 파리한 것이 언제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순간 장자명은 한 가지 결론이 이르렀다.
자신의 의술이 천수장 밖에까지 퍼졌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침밥을 먹다가도 환자를 받았고 화장실 앞에서도 환자가 줄을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일반 의원이 평생 받을 환자를 그는 한 달도 안 되어서 받았다.
게다가 맹호사대 대원 모두가 장자명을 신의라 칭했다. 생각해 보면 소문이 퍼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약재상 천 씨가 말했다.
“사람들 말대로라면 신의(神醫)가 맞지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장자명이 약재상 천 씨를 바라봤다.
천 씨의 눈에는 깊은 존경심을 담고 있었다. 장자명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독으로 명성을 떨치기 이전에 의술로 이렇게 이름을 알리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잠시 눈가가 촉촉해진 장자명은 깊숙이 포권하며 말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신의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약재상 천 씨가 고개를 갸웃하자 장자명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저는 아직 신의란 칭호를 받기에는 과분합니다.”
순간 천 씨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장 의원이 신의라고 누가 그럽니까?”
“지금 천 씨 어르신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장자명이 고개를 갸웃하자 천 씨가 말을 이었다.
“허허, 무슨 벼락 맞을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저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님을 말씀드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