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83화 (83/621)

83화. 천리 표행 (1)

팽대위가 황당하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의뢰는 의뢰라 치고 표행에 대한 비용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단독으로 결정했느냐?”

그의 말투에는 책망이 섞여 있었다.

모든 원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팽대위의 책망은 누가 봐도 일리가 있었다.

무림의 보물을 운송하는 의뢰였다. 그게 한두 푼도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개인과 개인의 협상이 아닌 가문과 가문의 협상으로 진행되어야 맞는 말이었다.

그때 원로 중 하나가 다시 일어났다.

“사 공자가 이 일에 대해 모두 책임지시겠는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모두가 한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때 한빈의 입가에서 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 웃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모두가 궁금해하는 가운데 한빈이 입을 열었다.

“비용은 제가 모두 부담하겠습니다. 대신!”

한빈이 말을 끊고 모두를 바라봤다.

모두가 숨을 참고 한빈의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한빈이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그 이익도 온전히 제가 취하겠습니다. 물론 실패한다면 그 책임도 제가 지겠습니다.”

“그건…….”

원로가 다급히 나서려 하자 한빈이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혹시 저 대신 하남까지 가시겠다는 분이 계시면 언제든 양보하겠습니다.”

“흠.”

원로가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 앉자 한빈이 말했다.

“한시가 급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준비됐으니 어서 물건을 주시죠.”

한빈의 말에 팽대위가 수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서 청명환을 대령하라!”

잠시 후.

정화 부인이 청명환을 들고 가주전에 나타났다.

사뿐사뿐 걸어온 그녀는 한빈의 앞에 섰다.

“사 공자는 영약으로 강남 무림의 기둥인 하남정가를 구해 주세요.”

그녀는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말투까지 바꿨다.

하지만, 눈빛만은 쥐를 앞에 둔 뱀처럼 서늘했다.

“네, 알겠습니다.”

한빈이 그녀에게 상자를 건네받았다.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기세가 오갔지만,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심미호만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이 광경에 집중했다.

사실 심미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둘의 기세 싸움이 아니었다.

심미호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화 부인이 건넨 상자였다.

그 상자는 며칠 전 자신이 하북팽가에서 몰래 가져온 상자와 똑같았다.

다음 날 한빈은 그 상자를 다시 가져다 두라고 지시했다.

한빈의 지시에 따라 그 상자를 하북팽가의 창고에 가져다 둔 것이 바로 어젯밤이었다.

심미호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빈이 힐끔 심미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누군가가 속삭였다.

“저건 한철 궤(寒鐵櫃)잖아.”

“한철 궤라고?”

“만년한철의 백분지 일 가격이긴 해도 영약을 보관하기에는 저보다 좋은 게 없지.”

그들의 말에 심미호가 다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청명환을 저 상자에 담을 것을 예상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 상자를 홈쳐 오게 했으면서 그다음 날 왜 다시 가져다 놓으라고 했을까?

심미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팽대위가 외쳤다.

“한시가 급한 임무이니, 사 공자는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하라!”

“저는 이미 모든 준비가 됐습니다. 앞에서 기다리는 천리 표국의 표객들과 합류해서 바로 떠나겠습니다.”

한빈은 깊숙이 포권한 뒤 바로 돌아섰다.

* * *

하북팽가의 대문 앞.

팽가의 경비 무사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천리 표국에서 왔다는 표사들을 바라봤다.

경비 무사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만 할 뿐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집법당주 팽대위와 일행이 걸어왔다.

팽대위가 경비 무사에게 물었다.

“천리 표국에서 왔다는 표사들은 어디 있느냐?”

“저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경비 무사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표사들을 가리켰다.

팽대위는 오른손으로 햇볕을 가리며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에 예상했던 대규모의 행렬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살피던 팽대위가 다시 물었다.

“선발대가 아니라 본행렬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집법당주님, 저 행렬이 다입니다.”

무사의 설명에 팽대위의 눈이 커졌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마차를 모는 마부 한 명에 두 명의 표사가 그늘에서 쉬고 있을 뿐이었다.

천리 표국에서 보냈다고 하는 인원이 달랑 셋밖에 없다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팽대위는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눈길이 마주친 한빈이 말했다.

“저 인원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집법당주님.”

“지금 뭐라 했느냐? 저 인원으로 하남까지 가겠다는 말이더냐?”

팽대위가 놀라 다시 묻자 한빈이 말했다.

“네, 맞습니다. 이 작은 상자 하나 옮기는 데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너는 이 여정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수 정예로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그럼, 나머지 인원은 맹호사대에서 보충하겠다는 것이구나.”

“아닙니다. 이 인원이 전부 다입니다.”

한빈이 씩 웃자 팽대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새끼 호랑이로 인정한 한빈이었다. 아무 대책 없이 이런 인원을 꾸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팽대위의 뒤에서 상황을 바라보던 원로들과 각주들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괜히 여기서 나섰다가는 당신이 대신 떠나라며 덤터기를 쓸 것 같아서였다.

팽대위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다녀오거라.”

“네, 다녀오겠습니다.”

한빈이 포권하며 천리 표국의 표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마차 앞까지 간 한빈이 손가락을 튕기자 어디선가 설화가 나타났다.

설화는 조그마한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여기요, 공자님.”

“그래, 수고했다.”

그때 재빨리 달려온 소 대섭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주군, 진짜 설화하고만 가시렵니까?”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어?”

“그건 아니지만, 이런 소수 인원에 설화만 데리고 위험한 길을 떠나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못 미더우시면 심 부대주라도 데려가십시오.”

옆에 있던 심미호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군, 제가 못 미더우시면 이무명 호위라도 데려가십시오.”

말을 마친 심미호가 힐끔 이무명을 돌아봤다.

시선을 받은 이무명이 답했다.

“제가 못 미더우시면 화산파의 서재오 대협이라도…….”

그 옆에 서 있던 서재오는 재빨리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흠.”

그때 맹호사대의 대원들도 동시에 각 잡힌 포권을 하며 외쳤다.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은 활짝 웃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그들에게서 진심을 느꼈던 것이다.

전생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물론 이번 생은 전생과 다를 것이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한빈이 말했다.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다, 소대섭 대주.”

“네, 주군. 말씀만 하십시오.”

“대주는 이거나 나눠 줘.”

한빈은 설화에게서 받은 보따리를 건넸다.

보따리를 받은 소대섭은 고개를 갸웃했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몰라도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이 표사들과 몇 마디 나누더니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 올라탄 한빈이 외쳤다.

“출발!”

동시에 마차가 천천히 떠났다.

그 모습을 본 소대섭은 아쉬움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떤 이가 적이 되어 영약을 노릴지 모르는 상황인데, 저리 태평하게 몇 안 되는 표사의 호위를 받으며 떠난다니?

게다가 시녀 하나만 달랑 데리고 떠났다.

저것은 태풍이 휘몰아치는 벌판에서 종이 연을 날리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아마도 며칠 안 가서 종이 연이 너덜너덜해지리라.

이것은 소대섭의 생각이자 맹호사대 모두의 생각이었다.

그때 심미호가 소대섭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대주!”

“어, 왜 그래? 심 부대주.”

“그 보따리는 뭐예요?”

“아, 그러고 보니…….”

소대섭은 그제야 한빈이 전한 보따리를 바라봤다.

한빈은 분명 이 보따리를 나누어 주라고 했었다.

소대섭은 다급히 보따리를 풀어 봤다.

촤르륵.

보따리를 풀자 서찰이 한가득 나왔다.

난데없는 상황에 모두가 서찰을 중심으로 모였다.

서찰에는 각각 이름이 쓰여 있었다.

소대섭.

심미호.

조호.

장삼.

서재오.

……

이것은 천수장에 머무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서찰이었다.

거기에 더해 서찰의 접는 부분에 밀랍을 떨어뜨려 봉인을 해 놓았다.

모두는 자연스레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서찰을 집어 들었다.

서찰을 모두 집어 들자 보따리에 적어 놓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각자 확인한 후 서찰은 반드시 폐기할 것.]

짧지만, 그 글귀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 서찰은 모두에게 보내는 밀서였다.

쫘악!

서찰을 여는 소리가 동시에 울리고 모두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의 지시를 몇 번이고 되새김질했다.

서찰을 확인하던 사람 중에 제일 기뻐하는 것은 서재오였다.

서재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매화 패를 찾을 방도가 생긴 것이다.

서재오는 한빈이 전한 말을 꾹꾹 눌러 머리에 담으며 다짐했다.

서찰에 쓰인 대로만 하면 한빈이 매화 패를 건네주기로 한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매화 패.’

이를 악물며 매화 패를 찾을 것을 다짐하던 서재오는 천수장에서 사귄 친우 장자명을 힐끔 바라봤다.

모두가 서찰을 뜯어 보는 가운데 장자명만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장 의원, 괜찮소?”

“앗, 다 됐습니다. 다 됐어요.”

장자명이 졸다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봐도 꿈을 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서재오는 장자명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어젯밤 무리했나 보군요, 장 의원. 환자가 끊이질 않으니, 뭐.”

“아, 어제는 환자가 없었었습니다. 다만, 사 공자가 부탁한 일 때문에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허허, 그 인간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구려.”

“그렇죠. 제가 보기에는 피 대신 독이 들어 있는 인간입니다.”

“허, 장 의원 말이 맞소. 그 인간은…….”

서재오는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서재오는 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자신과 장자명을 둘러싸고 죽일 듯 노려보고 있던 것이었다.

“지금 주군을 욕한 거 맞죠?”

“와, 이 사람들 그렇게 안 봤는데.”

“화산파의 매화검수면 우리 주군을 욕해도 되나?”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착한 장자명 의원까지 물들었잖아.”

그들의 아우성에 서재오는 재빨리 자리를 떠나야 했다.

* * *

한편 덜컹거리는 마차 안 아무 근심 없이 마차에 기대어 졸고 있는 한빈이 갑자기 눈을 떴다.

설화가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누가 내 욕하는 것 같아서 그래.”

한빈이 뒤쪽을 돌아보며 마차가 지나온 길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설화가 웃었다.

“풋, 누가 공자님을 욕한다고 그래요?”

“너도 속으로 내 욕하고 있잖아.”

“헉.”

설화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한빈이 마차의 쪽문을 열고 밖을 바라봤다.

아무 일도 없는 듯 구름이 떠가고 그 아래로는 수풀이 스쳐 지나가는 평화로운 풍경이 계속된다.

한빈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한철 궤를 꺼냈다.

“뭐 하시게요?”

“잠시만, 기다려 봐.”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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