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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81화 (81/621)

81화. 뜨거운 토란 (3)

한빈의 질문에 서재오가 반색하며 답했다.

“나는 진작 자네와의 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네.”

서재오가 허리에 찬 검을 슬며시 잡자 한빈이 한 발 물러서며 팔짱을 꼈다.

“흠, 대협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천수장에서의 교관 역할도 미숙하시지 않습니까?”

“흠.”

서재오가 헛기침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빈의 말 그대로였다. 교관으로서 서재오는 밥값을 못 하고 있었다. 요즘은 소대섭에게 교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덕분에 소대섭의 몫이었던 굵은 밧줄은 서재오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요즘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무공의 기본은 초식과 그 검로에 따른 내공 운용이었다.

그 묘리를 얼마나 깨우치느냐가 무공의 고하를 결정하는 것이라 서재오는 생각했다.

그런데 천수장에서의 수련은 처음부터 끝까지 체력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서재오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에는 여기저기 물집이 생겨 있었다.

화산파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검을 휘두르던 서재오였다.

그때도 멀쩡하던 손이 천수장에서의 훈련으로 엉망이 된 것이었다.

서재오는 이 훈련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그는 한빈이 묘한 악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악취미란 바로 사람을 괴롭히는 일.

생각에 거기에 미치자 서재오는 맹호사대 대원들에게 이 훈련의 불필요함을 설파했다.

하지만, 맹호사대의 대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섰다.

자신의 말에 냉담한 그들의 태도가 서재오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게 중심도 안 맞는 귀두도(鬼頭刀)라 불리는 이상한 칼을 휘두르고 있었고 쉬는 시간마다 맛없는 무말랭이를 씹어 먹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갖은 고문을 당하는데도 하나같이 한빈의 말이라면 닭이 소라고 해도 믿었다.

말이 안 통하는 천수장에서 생활은 서재오를 미치게 만들었다.

매화 패를 찾기 전에는 여기에서 나갈 수도 없는 일.

여기서 도망친다면 금의위의 강유찬은 서재오를 세상 끝까지 추격할 것이 뻔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숨이 나왔다.

떠올려 보니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의생 장자명과는 제법 말이 통했다.

그가 서재오에게는 유일한 벗이었다.

잠깐 동안에도 서재오의 표정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몇 번이나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표정을 보던 한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내가 제안 하나를 드리죠.”

“말해 보시오. 사숙뻘 되는 조카 양반.”

“시험은 술래잡기입니다.”

“내가 사 공자와 술래잡기를 할 배분으로 보이는가?”

“말은 정확히 하시죠. 제 배분이 위입니다.”

“흠.”

“중요한 것은 술래잡기의 대상이 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럼 누구와 한단 말인가?”

“…….”

한빈은 말없이 턱짓으로 설화를 가리켰다.

물론 서재오는 고개만 갸웃할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빈이 말을 이었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시녀인 설화가 숨고 나면 일각 후 설화를 잡는 것입니다. 그 시험에서 설화를 이긴다면 비무에 응해 드리죠. 진다면…….”

내깃거리를 생각하며 한빈이 말끝을 흐리자 설화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제가 제안해도 되나요?”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설화야.”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화가 서재오를 바라봤다.

“제 부탁 하나를 들어주시는 게 어때요? 아저씨.”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제안하는 설화의 모습에 서재오가 피식 웃었다.

딱 보기에도 일반 시녀로 보이는 설화였다.

아무리 잘 봐도 십 대 중반.

그런데 그런 설화가 자신의 추격을 피할 수 있다고?

서재오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오늘이야말로 한빈과의 비무 성사를 성공시킬 것이라 다짐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한평생 술래잡기만 할 수 없으니 기간을 정하죠. 이 시험은 아침까지입니다. 아침까지 못 잡으면 사질 대협이 지는 겁니다.”

“하하, 그 말 받아들이지.”

서재오가 씩 웃었고 동시에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서재오는 한빈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잠시 한빈에 손에 집중했을 뿐인데 시녀 설화가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서재오가 땅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터가 안 좋은가?”

* * *

다음 날 아침.

서재오는 지난밤 이상한 경험을 했다.

설화를 찾으려고 천수장을 뒤지는 도중 몇 번의 이상한 기척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상한 기척이 흘러나오는 곳을 확인해 보면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흔적뿐 아니라 기척도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런 일이 연속되자 서재오는 한빈과의 내기도 잊고 말았다.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라?

서재오의 결론은 하나였다.

천수장에는 귀신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얼마 전까지 귀곡장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아직도 간간이 귀곡성이 들리는 곳이 이곳이었다.

소대섭에게 듣기로는 바람 소리라 했는데, 이상한 기척까지 겹쳐지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때부터 서재오는 설화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서재오는 설화가 걱정되기까지 했다.

당돌하기는 했지만, 해맑은 표정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자신과의 내기 때문에 귀신에게 당하기라도 한다면?

내기가 아닌 설화의 안전을 위해 밖으로 나가 그녀를 찾아볼까 생각했지만, 간간이 느껴지는 오싹함에 서재오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아침이 밝아 오자 서재오는 허탈감에 도호를 외쳤다.

“원시천존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서재오는 씻는 것도 잊은 채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서재오는 비틀거리며 한빈을 찾았다.

항복을 선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휘청거리며 식당에 들어선 서재오의 눈이 커졌다.

설화가 태연스럽게 한빈의 옆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세요. 아저씨.”

설화가 해맑게 웃으며 맞이하자 서재오가 놀라 물었다.

“괜찮은 것이냐?”

“저는 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저하고 한 내기에서 지셨다는 건 인정하시는 거죠?”

“내기?”

“어제 내기하셨잖아요.”

“아, 그 내기…….”

“네, 맞아요. 어제 대협과 제가 한 내기요.”

“아무리 찾아도 없던데…….”

“어제 언니들이랑 목욕하고 있었어요.”

물론 반은 사실이었다.

목욕한 것은 사실이지만, 체취를 털어 낸 후 설화는 서재오를 은밀하게 감시했었다.

서재오가 느꼈던 오싹함의 정체가 바로 설화의 은밀한 시선이었다.

발달한 그의 오감 때문에 빚어진 오해였던 것이다.

이를 알 턱이 없는 서재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안 들른 곳이 있긴 있었군.”

가만 생각해 보니 여자들의 숙소에는 들르지 않았다.

이것은 도사들의 불문율이였다.

여자 숙소에 숨었다면 자신이 못 찾은 것도 당연하다 생각했다.

서재오는 턱을 매만지며 머리를 굴렸다.

“이 내기는 무효다.”

“아, 화산파라서 기대했는데……. 구대문파에서도 화산이 제일이라 하던데…….”

“잠시만 기다리거라.”

서재오는 손바닥을 보이며 설화의 말을 막았다.

화산을 운운하자 꼰대 같은 원로와 사부가 생각이 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열다섯 살 먹은 아이가 부탁을 해 봐야 무슨 부탁을 한다는 말인가?

서재오가 말없이 고민하자 설화가 다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저씨.”

“아무것도 아니다. 네 부탁을 들어주마. 내게 부탁할 것이 무엇이냐? 정도를 벗어나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제가 부탁할 것은…….”

“편하게 말해 보아라.”

“달아 둘게요.”

“…….”

서재오는 말없이 설화를 바라봤다.

그는 방금 설화에게서 한빈에게 받았던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잠시 서재오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나중에 생각나면 말하거라.”

“네, 아저씨.”

설화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 모습에 서재오는 안심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오가 자리를 뜨자 한빈이 말했다.

“서재오 저 사람 운이 좋았군.”

“운이 좋다니요?”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한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다른 건 아니고, 지금 부탁에 조건을 붙였잖아.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이라고.”

“아.”

설화가 한빈을 흘겨봤다.

모른 척하면서도 중간에 서서 주판알을 튕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멀리서 심미호가 초췌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한빈이 슬며시 웃었다.

천수장에서부터 하북팽가까지 두 번을 왕복했으니 기력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저 정도의 경공이면 어디서 눈먼 칼에 맞아 죽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했다.

한빈의 지척까지 온 심미호가 각 잡힌 포권을 했다.

“주군, 다녀왔습니다.”

“여기에 내려놓고 어서 가서 쉬어라.”

“네, 알겠어요.”

심미호가 자루를 내려놨다.

쨍!

바닥에 놓인 자루 안에서 쇠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심미호는 잽싸게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빈의 마음이 바뀌어 다른 명을 내리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심미호가 자리를 떠나자 설화가 물었다.

“그게 뭐죠?”

“비밀이야!”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루를 가지고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본 설화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저것의 정체는 과연 뭘까?”

고개를 갸웃한 설화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곳 천수장은 이상한 곳이었다.

저주받은 곳에 수련장을 세운 것도 이상한데, 화산파의 매화검수가 빈객으로 머물고 있었다.

서재오와의 어젯밤 내기는 전적으로 설화 자신이 유리했다.

설화를 평범한 소녀로 착각했기에 얻은 승리였다.

자만이라는 두 글자가 승패를 갈랐다.

그래도 첫출발은 나쁘지 않았다고 설화는 평가했다.

살수가 아닌 일반 무인으로서의 삶이 이렇게 편안한지는 처음 알았다.

설화가 천수장에서의 첫날을 평가하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사-삭.

설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웬 거지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거지 노인이 말했다.

“못 보던 아이로구나.”

그 첫마디에 설화가 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의 경지가 심오함을 알아본 것이다.

설화는 본능적으로 상대를 살폈다.

설화의 눈에 들어오는 매듭.

하나, 둘, 셋…….

설화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무제자 홍칠개!’

설화가 떠올린 이름이었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내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냐? 아이야.”

“아, 아닙니다요.”

설화는 말을 더듬으며 재빨리 포권했다.

그 모습에 홍칠개가 말했다.

“절도 있는 포권을 보니, 무가의 자식인가 보구나.”

홍칠개가 씩 웃자 설화가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홍칠개의 기세 앞에 자신도 모르게 포권한 것은 분명 실책이었다.

자신은 이곳에서 어디까지나 시녀로 머물러야 했다.

그때 뒤쪽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어떤 기척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사라졌던 한빈이 다시 나타났다.

홍칠개와 한빈 사이에 낀 설화는 멋쩍게 웃었다.

그때 홍칠개가 말했다.

“구걸십팔보가 눈에 띄게 좋아졌구나. 조금만 있으면 나를 넘어서겠어.”

그 말에 설화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구걸십팔보를 전수받았다는 것은 홍칠개의 제자라는 말이었다.

하북팽가의 직계가 아니라 개방의 제자?

게다가 검술의 달인?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한빈이 물었다.

“아니 먼 길 떠나실 것처럼 그러시더니 언제 오셨습니까?”

“배고파서 왔다. 껄껄”

“하하, 잘 오셨습니다.”

한빈이 웃으며 홍칠개를 잡아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설화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설화는 지금의 광경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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