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80화 (80/621)

80화. 뜨거운 토란 (2)

가기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남정가 사람인 정화 부인이 청명환을 호송할 자를 택한다면?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북팽가의 책임은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가기군이 정화 부인에게 선택권을 넘긴 이유였다.

회의를 주관하던 팽대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침을 삼키고 있을 때 정화 부인이 말했다.

“저는 이 일은 소가주 후보 중 하나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가주가 되면 언젠가는 가주님의 일을 맡게 될 터. 이런 대외 관계에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 소가주 후보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녀의 말에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주작각주 가기군이 물었다.

“그렇다면 소가주 후보 중 누굴 보내야…….”

그는 말끝을 흐렸다. 소가주 후보 중 하나는 강호행을 나가 있고 하나는 강제 폐관 수련 중이었다.

딱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천수장에서 훈련 중인 한빈이었다.

가기군이 말을 이었다.

“그럼 막내 공자가 이 일을 맡아야겠군요.”

순간 원로가 각주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럼, 이 중차대한 일을 사 공자가 맡는다고?”

“허, 그러게 말이야. 사 공자를 뭘 믿고?”

“사 공자라면 청명환을 들고 튈 수도 있지.”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건 아니지.”

“아니야, 지난번 공자 호위대 간에 비무에서 돈을 싹 쓸어 담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

“설마…….”

그때 정화 부인이 탁자를 쳤다.

탁!

내공이 실린 울림에 원로와 각주가 대화를 멈췄다.

정화 부인이 뱀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모두를 노려봤다.

모두가 침을 삼키는 가운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순간 장내가 조용해지자 정화 부인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강북 무림의 기둥이신 제 아버님이 위독하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뭐라 하시는 겁니까? 이 일에 있어 적임자는 소가주 후보인 사 공자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 아버님의 운명을 그 아이에게 맡겨 보렵니다.”

정화 부인의 말에 원로와 각주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와 사 공자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이였다.

정화 부인의 아비, 즉 하남정가 가주에 대한 일이지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는 없었다.

그때 정화 부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대신 이 일을 맡아 주실 분 있으십니까?”

“…….”

잠시, 정적이 장내를 휩쓸고 그때 원로 중 하나가 무릎을 쳤다.

“생각해 보니 막내 공자가 적임자네.”

“음, 그러고 보니 이 일을 맡을 사람은 막내 공자밖에 없네그려.”

몇몇을 제외한 원로와 각주는 먹이를 발견한 승냥이처럼 눈을 빛냈다.

이제야 정화 부인이 이 임무를 한빈에게 맡기는 속뜻을 알아챈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한빈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뜨거운 토란이었다.

얼마 전 화산파의 서재오를 비무에서 눌렀다지만, 이를 지켜본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설사 실력으로 이겼다고 해도 후계 구도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라 판단했다.

소문에 의하면 황궁과의 인연도 있다지만, 이 또한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 바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첫째 공자와 둘째 공자의 소가주 경쟁 구도에 한빈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즉, 한빈에게 줄을 설 이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었다.

한빈이 이 임무를 성공한다고 해도 좋아할 사람도 없었고, 실패한다고 해도 아쉬울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한빈은 뜨거운 토란을 던져 주기에 딱 알맞은 길 잃은 사냥개였다.

하지만, 팽대위는 아직도 팔걸이를 톡톡 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번 일에는 어떤 음모가 도사리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한빈은 한참 자라나는 호랑이.

조금만 기다려 준다면 선명한 호랑이 무늬를 드러낸 채 강호를 뛰어다닐 물건이 될 것이었다.

그때 정화 부인이 재촉하듯 말했다.

“가주 대행께서 빨리 결정을 내려 주시죠.”

그녀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팽대위는 그 모습에 속으로 웃었다.

저것은 자신의 아버지인 하남정가 가주를 걱정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정화 부인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팽대위는 살짝 눈매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대신!”

팽대위의 말에 모두가 숨을 멈춘 채 시선을 돌렸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임무에 대해서는 사 공자가 직접 선택하도록 하겠습니다. 받아들인다면 맡길 것이고 못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그때 다시 회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회의는 이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도를 바닥에 찍었다.

쾅!

모두는 그 소리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잠시 후,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정화 부인의 입에는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어떻게 보면 이전에 보였던 미소보다 더 교묘하며 진지했다.

* * *

그날 밤.

연무장 옆 바위에서 구결을 정리하고 있는 한빈의 옆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사-삭.

그녀는 바로 심미호였다.

심미호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놀라지도 않으시네요, 주군.”

“지금 나타날 사람이 심 부대주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래도 놀란 척이라도 해 주시는 게 늦게까지 일하고 온 수하에 대한 도리가 아닌가요?”

“그래서 월봉 올려 줬잖아.”

“아, 그렇지…….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주군.”

심미호는 재빨리 포권하며 표정을 바꿨다.

“그런데 이 시간에 온 걸 보니 급한 일인가 봐.”

“네, 오늘 하북팽가에서요…….”

심미호는 쉬지 않고 하북팽가에서 일어났던 일을 늘어놨다.

모든 일을 들은 한빈은 재미있다는 듯 하늘을 바라봤다.

심미호가 물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심 부대주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걸 왜 물어보세요?”

“그냥 심 부대주의 감을 물어보는 거야.”

“음, 저는…….”

심미호가 잠시 고민할 때 뒤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툭 튀어나오며 외쳤다.

“누가 들어도 함정이네요.”

“앗, 깜짝이야!”

심미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올망졸망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물론 그녀는 전날까지만 해도 흑천의 특급 살수였던 설화였다.

놀람도 잠시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턱짓했다.

“이름은 설화고 새로 들어온 시종이니까, 심 부대주가 잘 보살펴 줘.”

“아, 시종을 새로 들이셨군요. 하긴 철노에게 일을 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

심미호가 설화의 볼살을 잡으려 하자 한빈이 헛기침하며 말렸다.

“흠, 얘가 피부가 약해서 그러니 조심하라고. 심 부대주.”

“아, 그렇군요. 그런데 얘기하는 거 보니 똘망똘망한 것 같네요. 제가 설화랑 얘기해 봐도 돼요?”

“설화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심미호 부대주 마음대로 해.”

한빈의 허락에 심미호가 환하게 웃으며 설화를 바라봤다.

“지금 한 말이 뭐니? 얘야?”

“무슨 말이요?”

“함정이라는 거 말이야.”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밀서를 가져온 하남정가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 왔다면서요?”

“그렇지.”

“이제까지 하남정가 쪽에서 온 상행이나 무사가 다친 적이 있었나요?”

“흠, 없었던 걸로 안다.”

“그리고, 요즘은 정화 부인이 하남정가로 보내던 상행이 털리는 일이 없지 않나요?”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 하남정가에서 온 무사가 습격을 받았다면서요. 습격을 받았는데 가져온 물건을 멀쩡히 전달했고요.”

“흠. 그래서 네 생각은 뭐니?”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든가? 아니면…….”

“아니면, 뭐?”

“다음 얘기를 들으려면 공짜로는 안 돼요.”

설화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한빈을 힐끔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혹시 주군 친척이에요?’

한빈은 잠시 심미호를 노려봤다.

심미호가 주군인 자신을 평소에 어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오해는 피해야 하기에 한빈은 마지못해 답했다.

‘전혀 상관없어. 심 부대주.’

한빈이 입 모양으로 답하자 심미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품 안에서 철전을 꺼내 설화의 손에 쥐여 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빈은 보이지 않게 혀를 찼다.

살수에서 시녀로 직업을 바꾼 설화는 천수장의 생활에 벌써 적응을 한 것 같았다.

철전을 손에 쥔 설화는 낼름 그것을 품 안에 넣고 말을 이었다.

“뭐, 아니 자기들끼리 경극을 하는 거겠죠.”

설화의 말에 심미호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설화야, 너는 어째서 그런 상황을 다 알고 있는 거니?”

“아까 들었어요.”

설화는 눈짓으로 한빈을 가리켰다.

심미호는 한빈에게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 시녀한테까지 기밀 사항을 얘기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얘가 뭘 안다고요? 아직 어린데 좋은 것만 보여 주셔야죠.”

심미호는 설화를 꼭 안았다.

그 모습에 한빈은 기가 찬 듯 둘을 바라봤다.

가장 어이가 없는 것은 정화 부인이 보낸 상단을 칼로 썰고 다녔던 것이 바로 설화라는 점이었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이니 당연히 잘 알겠지.’

하지만, 한빈은 말을 아꼈다.

앞으로는 설화가 흑천의 살수보다는 평범한 백성 혹은 천수장의 무인으로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설화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한빈은 이번에는 심미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심 부대주. 지금부터 내가 말한 것 좀 챙겨 와. 그러니까…….”

한빈은 심미호에게 몇 가지 부탁을 했다.

“지금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밤길 조심하고.”

“네, 주군.”

사사-삭!

심미호가 먼지를 휘날리며 사라지자 설화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심할 게 뭐가 있다고 걱정하세요. 지나가는 남자 대여섯 명은 찜 쪄 먹게 생겼는데요. 그러지 말고 검이나 부딪쳐 보죠, 공자님.”

이젠 한빈을 부르는 호칭까지 자연스러웠다.

설화가 허리에 찬 연검을 톡톡 치며 도발하자 한빈이 피식 웃었다.

“나 쓰러지면 여기서 도망가려고?”

“그야 당연…….”

설화는 말끝을 흐리며 연검을 움켜잡았다.

허리에서 검을 뽑자마자 바로 뒤를 벨 것 같은 태세였다.

한빈이 손을 흔들며 말렸다.

“워어, 조심하라고.”

“헉, 그건 무슨 추임새예요? 뭐, 제가 소예요?”

“아무 때나 검을 뽑으려니 그러지.”

“뒤에서 살기가…….”

설화는 말을 맺지 못하고 새로 등장한 사내를 바라봤다.

하얀 무복에 새겨진 매화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흑천과 구대문파와는 척을 진 상황.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뿜었다.

그 모습에 화산파의 매화검수 서재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얘야, 나한테 왜 그러느냐?”

“…….”

설화가 말없이 서재오를 노려보자 한빈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순간 사라지는 살기.

한빈이 서재오에게 물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사질뻘 되시는 대협.”

이제는 호칭까지 바뀐 상황.

서재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언제까지 내 검을 피할 건가? 사숙뻘 되는 조카님.”

서재오도 맞받아치자 한빈이 웃었다.

한빈과 서재오의 나이 차는 열 살이 넘는다.

이런 식으로 공방을 주고받으면 손해 보는 것은 서재오였다.

한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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