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79화 (79/621)
  • 79화. 뜨거운 토란 (1)

    이상한 것은 하얀 한지 대신 글자가 빽빽이 적혀 있는 종이였다는 점이다.

    철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종이를 펼치고 호리병 속에 미리 갈아 놓은 먹물을 벼루에 부었다.

    모든 일이 끝나자 철노는 마지막으로 붓을 한빈에게 건넸다.

    설화는 철노가 준비한 것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만두를 계속 입속에 욱여넣었다.

    한참을 먹던 설화가 목이 멘 목소리로 철노에게 말했다.

    “아, 아저씨, 물 좀 주세요.”

    그때 한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일단 서명부터 하고 먹자.”

    “무슨 서명이요?”

    “약속했잖아, 삼 년 동안 나를 따르기로.”

    “그야…….”

    설화는 말끝을 흐렸다. 이것은 흑천과 한빈의 약속.

    무조건 자신이 따라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이것은 살수로서의 생존 본능이었다.

    그 생존 본능이 이 자리에서 벗어나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때 철노가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말고 여기에 서명해. 나 못 믿니, 설화야?”

    철노는 사람 좋은 얼굴로 가슴을 탁탁 쳤다.

    혈화가 보기에 철노는 무공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한빈을 따르는 하인이었다.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붓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름이 더 돋았다.

    설화는 철노를 다시 바라봤다.

    약간은 멍청해 보이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사람을 속일 얼굴은 아니었다.

    설화는 아무런 의심 없이 계약서에 서명하려고 하다가 내용을 읽어 봤다.

    한참을 읽던 설화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예요?”

    “이건 천수장 식구들은 다 쓰는 계약서인데, 왜 그래?”

    철노가 고개를 갸웃하자 설화가 콧김을 내뿜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이건 고리대금 업자들이 쓰는 신체 포기 각서잖아요. 그리고 이건 또 뭐예요? 이건 아예 노예 계약서잖아요.”

    “서명하기 싫으면 집으로 돌아가도 좋아. 난 안 말린다.”

    한빈은 만두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신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설화는 이 상황이 외통수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철노를 바라봤다.

    철노는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생각해 보니 한빈이나 철노나 모두 한통속이었다.

    설화가 한숨을 내쉬며 붓을 들었다.

    “휴.”

    사삭.

    서명이 끝나자 철노가 말했다.

    “이건 좋은 조건에 속해. 내가 장담할게.”

    “이게 좋은 조건이라고요?”

    설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철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는 애먼 천장을 올려다봤다.

    대체 이곳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곳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 * *

    설화가 천수장에 입소한 다음 날, 하북팽가.

    팽대위는 앞에 쌓인 서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서류만 보면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밥맛이 없어지는 팽대위였다.

    하지만, 폐관에 든 그의 형 팽강위를 위해서라도 이 서류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렇게 평온한 하북팽가가 원망스러웠다. 사고라도 터지면 이 서류 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금 더 중요한 일에 자신이 나서고 덜 중요한 이런 서류는 총관에게 맡기면 되니 말이다.

    그가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가주전의 문이 열렸다.

    덜컹.

    다급히 뛰어오는 경비 무사.

    타다닥.

    발걸음 소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무사가 말을 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집법당주님.”

    그 말에 팽대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이제는 서류는 뒤로 미뤄 두고 칼춤을 출 때가 된 것이었다.

    팽대위가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그게, 하남정가에서 밀서가 도착했습니다.”

    “밀서라? 그쪽에서 온 무사는?”

    팽대위가 눈을 빛내고 있을 때 뒤쪽에서 집법당 무사의 부축을 받고 누군가가 절뚝이며 걸어왔다.

    팽대위는 눈매를 좁혔다.

    그의 복장으로 봐서는 하남정가의 무인이 맞았다.

    절뚝이며 다가온 하남정가의 무인이 팽대위 앞에서 멈췄다.

    “대협, 가주님의 서찰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남정가의 무사가 품속에서 서찰을 꺼냈다.

    서찰을 건네는 그의 손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가슴팍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무복이 감당하지 못하는 듯 뚝뚝 떨어지며 바닥을 적셨다.

    하남정가 무사는 바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하지만, 집법당 무사에게 부축을 받으며 조금이라도 팽대위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썼다.

    팽대위는 피로 얼룩진 서찰을 낚아챘다.

    휙!

    그는 서찰을 옆에 총관에게 건넸다.

    동시에 팽대위가 외쳤다.

    “하남정가의 무사를 치료받게 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나가 있거라!”

    “존명!”

    팽대위의 명에 집법당 무사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보고받기로 이 서찰은 밀서라 했다.

    게다가 이 밀서를 가지고 온 무사의 상태는 위중했다.

    그것을 받아 든 이설영 총관은 무사들이 빠져나가자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하북팽가 가주님께 부탁드릴 것이…….”

    서신의 내용을 듣던 팽대위가 미간을 좁혔다.

    내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하남정가 가주 정무룡의 병환이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같은 가주이지만, 하남정가의 가주 정무룡은 하북팽가 가주 팽강위의 장인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두 달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이 서신을 보내온 이는 하남정가의 대공자 정인지였다.

    정인지는 정화 부인의 오라버니로 장차 하남정가를 물려받을 것이라 예상되는 인물이었다.

    하남정가에서 원하는 것은 정화 부인이 예물로 가져온 청명환(晴明丸).

    청명환은 곤륜파의 신단으로 소림의 대환단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환약으로 평가받는다.

    청명환은 곤륜파와 하남정가의 끈끈한 인연으로 인해 받은 보물이었다.

    이제는 연단술이 끊기고 곤륜에도 단 세 개밖에 안 남았다고 전해지는 청명환.

    이 약은 죽은 자도 일각 안에만 먹이면 생기를 되찾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환약이었다.

    예물로 보내온 청명환을 다시 돌려달라는 것은 예의에서 벗어난 일.

    하지만, 하남정가 가주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팽대위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뭐든 옳다 싶으면 물불 안 가리고 밀어붙이는 그였지만, 이번은 시기가 묘했다.

    둘째 형수인 정화 부인의 입지가 줄어드는 상황에 그녀가 주최하는 상행마저도 연신 약탈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남정가 가주까지 위독하다?

    게다가 두 달이라는 시간적 제약까지.

    툭. 툭.

    팽대위는 끊임없이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을 때면 나오는 습관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없이 팔걸이를 두드리던 팽대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총관 이설영이 놀라 물었다.

    “당주님, 어디를 가십니까?”

    “폐관동에 잠시 들렀다가 오겠네.”

    “흠, 가주님께서 출입 금지라 선포하시지 않았습니까?”

    “총관, 그게 문제인가? 내가 죽게 생겼는데 말이야.”

    “집법당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남정가로 가는 상행이 막히다시피 했잖나? 그런데 공교롭게 강호인들이 눈독을 들일 청명환을 운송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네. 그게 과연 우연일까?”

    팽대위는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대답을 마무리하고는 천천히 대전을 빠져나갔다.

    총관 이설영은 그런 팽대위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겉보기에는 곰처럼 보이는 팽가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여우같이 꾀를 내는 것이 이 가문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 * *

    잠시 후.

    폐관동에서 가주 팽강위와 독대하고 온 팽대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팽강위의 대답은 간단했다.

    ‘가주 대행인 네가 알아서 해!’

    팽강위 역시 이번에 어떤 결정을 내려도 하북팽가의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결정을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마치 뜨거운 토란 같았다.

    노릇하게 구운 토란은 침이 넘어가기 마련.

    하지만, 그것을 당장 입안에 넣는다면?

    아마도 입이 멀쩡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식을 때까지 놔둔다면?

    반대로 퍽퍽해서 맛이 없어질 것이었다.

    하남정가로 가는 상행이 약탈당하는 지금의 상황.

    두 달이라는 시간적 제약.

    하지만, 반드시 결정해야 했다.

    하남정가 지원의 결정권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팽강위에게 건네받은 팽대위는 머리를 감싸 쥐며 이번 회의에 필요한 사람들을 불렀다.

    사람들이 모이자 팽대위가 서찰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모두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남정가라면 강남 오대세가 중 한 곳.

    그곳에서의 태풍은 하북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북팽가와 하남정가는 사돈 사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기도 했다.

    팽대위는 가장 중요한 사항을 확인해야 했다.

    “둘째 형수님.”

    “네, 집법당주님.”

    “청명환이 하남정가에서 보내온 예물이긴 해도, 그 소유권은 오롯이 둘째 형수님이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명환을 하남정가로 보내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물론이지요. 아버지가 아프다는데 딸인 제가 어찌 모른 척을 할 수 있겠어요. 다만…….”

    정화 부인이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의 시선이 지나간 곳에 있던 원로와 각주는 모두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이 임무를 자신에게 맡길까 두려워서였다.

    임무에서 정체불명의 무사들과 칼을 맞댄다는 것은 비무와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상대를 알고 칼로 상대와 대화를 나눈다.

    이것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뛰게 만들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 칼이 날아와 뒤통수를 뚫을지 모르는 일은 가슴 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쫄리는 일이었다.

    거기에 이번에 하남정가로 가져갈 물건은 무림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청명환이었다.

    만약에 이게 소문이라도 돌게 된다면?

    단순히 도적만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게 된다.

    무림의 도적이란 도적, 아니 정파마저도 도적으로 위장하고 끼어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일을 수행한다면 하북팽가에서 자신의 위상이 올라갈까?

    하북팽가의 영웅으로 군림하기보다는 하남정가의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알맞은 임무였다.

    적어도 하북팽가 내에서는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높은 위험도에 이익은 적은 임무였다.

    고개 숙인 원로와 각주들은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처자식을 떠올렸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자 정화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를 탁 쳤다.

    “여기 계신 분들은 하남정가를 도와주실 생각이 없으신가 봐요. 저희 하북팽가가 언제부터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됐죠?”

    그 말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주작각의 각주 가기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 그 말은 취소하시죠! 하북팽가가 이빨 빠진 호랑이라뇨?”

    주작각주 가기군이 외치자 정화 부인이 비릿한 미소를 보냈다.

    “그럼,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닌가요? 하북에서 하남까지 지금 가도 시간이 빠듯해요. 상대는 제 아버지이기 전에 강남 정파의 기둥이에요. 그런데 강북의 정파 하북팽가가 이 문제를 고민한다고요? 흥.”

    그녀가 콧방귀를 뀌자 가기군은 불편한 듯 말했다.

    “적어도 하북팽가 내에서는 가주님의 명을 거역할 사람은 없습니다. 부인이 임무를 맡길 자를 추천해 보시죠.”

    가기군은 당당하게 정화 부인을 바라봤다.

    주작각의 각주인 가기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