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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78화 (78/621)

78화. 뜻밖의 임무 (4)

동시에 혈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냥 그릇에 검을 찔러 넣은 자신의 행동이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 같았다.

한빈에게 또 속았다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푼 일각비초는 해독하고 거기에 칠종칠독을 풀어 놨다고?

이가 갈렸지만, 지금은 해약이 먼저였다.

“그럼 지금 빨리 내놔요.”

혈화가 손을 내밀자 한빈이 무복의 앞섶을 풀었다.

순간 드러나는 일곱 개의 죽통.

한빈이 말했다.

“첫 번째 독이 발작한 후 하루 안에 해독을 안 하면 두 번째 독이 발작하지. 첫 번째 독을 해독해도 두 번째 해독을 하지 않으면 일주일 후에 독이…….”

한빈의 설명을 듣던 혈화가 천천히 손을 내밀며 죽통을 가져가려 했다.

그때 한빈이 피식 웃자 혈화가 손을 멈췄다.

한빈은 혈화의 손을 검지로 살짝 밀어낸 뒤 말을 이었다.

“문제는 일곱 개의 해독 약에 순서가 있다는 거야. 순서가 틀리면 그건 너도 알 거야. 간격도 맞춰야 하고. 일곱 번째 해약을 건네는 시기는 앞으로 삼 년 후.”

한빈의 말에 혈화는 손을 멈췄다.

한빈은 그녀가 정신을 잃었을 때 하나의 해독 약을 썼고 깨어났을 때 하나를 썼다. 한빈은 그녀에게 총 두 개의 해독약을 썼다.

그 두 개의 해독약마저 저 일곱 개 사이에 섞여 있었다. 즉 저 해독약을 뺏어도 순서를 정확히 지킨다는 보장은 없었다.

순서는 오직 한빈만이 알고 있었다.

마지막 해독은 정확히 삼 년 뒤라고 했다.

왜 흑천에서 이 내기의 결과를 인정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의문 하나가 남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내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말해 주지.”

한빈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시간에 흑천과 어떻게 연락을 한 거죠?”

“험, 너는 왜 짧은 시간이라고 단정하는 거지?”

“내가 잠든 것이 노을이 남아 있던 시간이었어요. 지금도 노을은 남아 있고요.”

“그 정답은 앞으로 남은 네 살수 인생을 위해 남겨 둘 테니 잘 생각해 봐.”

“…….”

혈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잠든 시간에서 잘해야 차 한 잔 마실 시간만 흘렀을 뿐인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때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따라오라는 말도 없이 휘적휘적 붉은 노을을 밝고 걸어갔다.

혈화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꼬르륵.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자 혈화가 재빨리 숨을 멈췄다.

그녀는 지금이 만 하루가 지난 시점이라는 것은 꿈에도 깨닫지 못했다.

붉은 소나무 숲에서 사라지는 둘을 바라보던 십팔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뒤쪽에 널브러진 수하들을 바라봤다.

어제부터 오늘 오전까지 한빈과 흑천의 살수들은 절호곡의 결전에 이은 두 번째 싸움을 벌였다.

그 싸움을 가른 것은 절묘한 한빈의 보법과 계책이었다.

결과는 대패(大敗)!

십팔호는 자신들이 호랑이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고 생각했다.

호랑이와 싸워서 이길 순 있어도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은 싸움이 아닌 자살행위.

십팔호는 자신을 희생해서 수하들을 구한 뒤 한빈에게 끌려가는 혈화의 뒷모습을 보며 묵념했다.

어느새인가 일어난 수하들도 한빈에게 끌려가는 혈화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가 고개 숙이며 말했다.

“조장의 희생은 잊지 않겠습니다.”

“충성!”

흑천의 살수 중 하나가 가슴을 손바닥으로 치며 외쳤다.

잠시 묵념이 끝난 후 십팔호가 수하들에게 나지막이 외쳤다.

“돌아간다.”

“조, 존명.”

수하들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답했다.

* * *

뒤쪽의 따가운 시선에도 한빈은 평온한 표정으로 산길을 걸었다.

그때 뒤쪽에서 혈화가 외쳤다.

“조금 쉬었다 가요!”

이건 혈화의 진심이었다.

한빈에게 당한 독으로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혈화는 내공을 끌어올리려 노력했지만, 독에 당한 후유증 때문인지 한 톨의 내공도 끌어올릴 수 없었다.

내공을 쓸 수 없는 혈화의 몸은 연약한 여자아이의 몸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흑천의 명에 따라 삼 년간은 꼼짝없이 한빈의 옆에서 지내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임무가 혈화 앞에 떨어졌지만, 당황하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빈과의 관계에 있어 어느 정도 선을 정해 놓고 싶었다.

그 선은 혈화에게 유리해야 했다.

한빈이 걸음을 멈추자 혈화는 최대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혈화는 자신의 이런 표정에 사람들이 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열다섯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녀가 이렇게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살수라는 것을 알고도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이런 면에서 혈화는 실로 태세 전환이 빨랐다.

혈화가 정한 이상적인 관계는 오라비와 동생의 관계.

아니나 다를까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혈화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에 혈화가 침을 꿀꺽 삼켰다.

터덜터덜 다가온 한빈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박아.”

아무 감정도 없는 말투에 혈화가 비명을 질렀다.

“앗!”

“후렴구는 넣지 말고!”

씩 웃는 한빈에 모습에 혈화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가, 가면 되잖아요.”

* * *

다음 날 점심.

한빈은 천수장에 정문에 도착했다.

때마침 정문에 나와 있던 조호가 번개같이 튀어 왔다.

“주군, 대체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어제 안 들어오셔서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빈말이겠지만 고맙다, 조호.”

“빈말 아닙니다. 주군이 안 오시는 바람에 다들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노느라고 밤을 꼬박 새웠겠지, 안 그래? 조호.”

“아, 아닙니다. 그러니까…….”

조호는 말끝을 흐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농담이니 걱정하지 마, 하루 정도는 쉬어야지.”

“그건 그렇죠,”

“뭐, 다음 날 빡세게 구르면 되니까 말이야.”

“주, 주군…….”

말끝을 흐리던 조호가 한빈 옆에 혈화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옆에 이 꼬마는 누구예요?”

“오늘부터 내 시녀가 될 아이다.”

“시녀요? 시중을 들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은데요.”

조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혈화를 바라봤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열다섯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녀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조호의 착각이었다.

혈화의 나이는 열아홉이 다 되어 가는 중이었다.

조금 작은 체구와 앳되어 보이는 외모 덕분에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혈화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

혈화가 갑자기 조호를 바라봤다.

순간 혈화의 살기가 조호를 덮쳤다.

이곳까지 걸어오며 혈화는 내공을 회복한 상태였다.

조호는 순간 자신을 향해 검이 날아오는 착각이 들었다.

그 검은 조호의 목덜미에서 한 뼘을 남겨 놓고 멈춘 것만 같았다.

조호는 자신의 목덜미를 만져 봤다.

다행히 목은 제대로 붙어 있었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검날도 사라졌다.

조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제 무리를 했나 보네요. 이 아이한테 못 볼 꼴을 보였네요, 휴.”

조호가 한숨 쉬자 표정을 수습한 혈화가 말했다.

“아니에요,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죠. 오라버니.”

“아, 나한테 오라버니라고 부를 필요는…….”

“아니에요.”

혈화가 손을 내젓자 조호가 물었다.

“너는 이름이 뭐니?”

그 물음에 혈화는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혈화가 말했다.

“설화라고 해요.”

설화는 한빈과 혈화가 상의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혈화라고 하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여자아이의 이름에 피 혈(血) 자를 쓰겠는가?

그래서 만든 이름이 설화였다.

“아, 이름도 얼굴만큼이나 귀엽구나. 꼬마야.”

조호는 설화의 머리를 헝클며 웃었다.

이제 설화로 불리게 된 혈화는 겨우 표정을 숨기며 속으로 외쳤다.

‘꼬마라고 부르지 말아라, 애송아!’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순간 발출되는 설화의 살기!

“헛,”

조호가 헛숨을 삼켰다.

일류의 경지에 오른 조호였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살기였다.

조호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방금 조호는 날카로운 검날이 자신의 손을 썰고 지나간 것만 같은 환영을 보았다.

이것은 설화의 기세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설화가 조호를 부축했다.

“괘, 괜찮으세요? 오라버니.”

“괜찮아. 오늘따라 몸이 안 좋아서…….”

조호는 뒷말을 흐리며 물러났다.

그 모습에 한빈은 피식 웃었다.

설화는 살수가 아닌 경극단에서 연극을 하는 것이 더 어울렸다.

그것이 한빈의 결론이었다.

* * *

천수장 정문을 지난 한빈은 설화에게 요깃거리를 가져다주었다.

한빈은 송화산을 넘어오며 육포라도 씹었지만, 설화는 하루 반을 굶은 상태였다.

꾸역꾸역 만두를 먹는 설화를 본 철노가 말했다.

“얘야, 아직 많으니 천천히 먹어라.”

“괜찮아요, 아저씨.”

설화가 만두를 입에 욱여넣으며 볼멘소리로 답하자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한빈의 미소는 살수를 대하는 눈빛은 절대 아니었다.

한빈이 설화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조금은 복잡한 문제였다.

한빈은 설화와 검을 나누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설화에 대해 몇 가지를 확인하기로 하고 목숨을 붙여 놨다.

그 후 한빈은 흑천과 교섭하며 설화가 전생의 옛 수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생에 한빈이 맡았던 귀검대의 막내.

그녀가 바로 설화였다.

자신 대신 정의맹에 칼에 맞아 쓰러졌던 대원 중 하나.

그 사실은 그녀를 거둘 이유로 충분했다.

당시 귀검대에 왔을 때 그녀의 모습은 지금과는 영 딴판이었다.

얼굴은 칼자국으로 성한 데가 없었으며 다리는 절고 있었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쇠를 갈아 넣은 듯했다. 성대가 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설화의 전생 모습이었다.

그런 이유로 수하였던 그녀를 알아보는 데 한참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흑천과 약속한 삼 년이면 횡액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그녀를 거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한빈은 허겁지겁 만두를 먹는 설화의 이마를 바라봤다.

이마에는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보인다.

한빈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젓가락을 집었다.

그러고는 그 점을 향해 젓가락을 찔러 들어갔다.

만두를 먹던 설화가 화들짝 놀라 텅 빈 만두 통을 들어서 막았다.

탁!

그 모습에 철노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표정은 이 아이도 무공을 하냐는 물음이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철노의 눈이 더 커졌다.

하지만, 한빈은 설화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설화의 이마에서 일렁이던 점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과거로 돌아오고 구결이 보이기 시작한 후 이런 현상은 처음이었다.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자신의 공격을 피해 달아난다라?

어찌 보면 난공불락의 목표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은 자나 동물에게서는 구결이 사라지니 살아 있을 때 그것을 취해야 하지만, 그 점이 도망치듯 이동한다면?

한빈은 설화를 옆에 두고 천천히 연구해 보기로 했다.

그때 철노가 혀를 차며 한빈을 말렸다.

“공자님, 아무리 장난을 치고 싶어도 그렇죠.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괴롭히세요.”

“아, 철노. 미안해.”

한빈이 손을 흔들며 웃자 그 광경을 보던 설화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철노가 한빈의 약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철노만 공략한다면 천수장에서 편히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한빈이 철노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만두 말고 다른 것도 가져오라고 했잖아.”

“아, 물론 준비했습니다. 공자님.”

“그럼 좀 펼쳐 줘.”

“네, 알겠습니다, 공자님.”

철노는 만두가 놓인 곳을 피해 탁자 위에 보따리를 올려놨다.

그러고는 재빨리 보따리를 풀었다.

촤르륵.

보따리를 펼치자 그곳에는 지필묵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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