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76화 (76/621)
  • 76화. 뜻밖의 임무 (2)

    한빈을 쫓던 혈화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발길을 멈췄다.

    이곳은 천수장과 저잣거리를 가로막고 있는 뒷산.

    반나절이면 넘을 고개에 불과한 이 산을 사람들은 불 화(火) 자가 들어간 송화산(松火山)이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으로 불렀다.

    사실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푸른색의 소나무로 울창했던 이곳은 마을의 명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은 불이 난 것처럼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산이라 부르며 가기를 꺼려 했다.

    혈화가 잠시 발길을 멈춘 것은 알 수 없는 불길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시 송화산을 바라봤다. 이곳은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의 말대로 저주받은 곳이 분명했다.

    붉은 소나무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빛 때문일까?

    타오르는 불꽃처럼 삐져나와 있는 솔잎은 화선지 위에 튄 핏물처럼 보였다.

    한참 동안 송화산의 전경을 보던 혈화는 옆에 다가온 수하 십팔호를 바라봤다.

    십팔호라 불리는 중년의 사내는 절호곡에서 한빈과 맞닥뜨린 경험이 있는 자였다.

    그런 이유로 이번 임무에 동참하게 되었다.

    “십팔호, 이곳이 맞나?”

    “네, 조장. 분명 이곳을 지났습니다.”

    “십팔호는 나머지 인원을 통솔해서 주변을 감시해.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고 감시만. 알았지?”

    “존명!”

    “절대 죽이지는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십팔호는 복면 사이로 드러낸 두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혈화는 천천히 송화산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발길을 멈추고 지난 두 달간의 급박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흑천은 거짓 정보로 자신을 농락한 정화 부인에 대해 철저히 응징을 가했다.

    그동안 혈화의 검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정화 부인이 주관하는 상행이 아예 끊길 정도가 되어서야 흑천의 칼이 멈추었다.

    모든 보복이 끝나자 흑천은 한빈에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북팽가의 겁쟁이인 한빈이 흑천의 특급 살수와 초특급 살수를 연달아 격파한다?

    게다가 전설의 마수인 천살혈랑의 숨통을 끊어 놨다라?

    이것은 흑천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혈화는 이곳에 오기 전에 지시를 받았다.

    첫째, 하북팽가 막내 공자의 정체를 밝혀라.

    둘째, 그를 포섭하라.

    셋째, 임무의 기간은 무기한.

    이것이 흑천의 주인이 내린 명이었다.

    즉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되면 돌아오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사실 혈화는 이 임무보다 한빈과의 승부가 먼저였다.

    혈화는 절호곡 사건 이후 밤마다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며 일어났다.

    육체의 상처는 치료되었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여전했다.

    “훗.”

    한숨을 뱉은 혈화는 자신의 옆구리를 만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혈화였다.

    자신의 목숨을 단번에 끊을 수 있었는데 보내 준 한빈.

    게다가 정면 승부도 아니고 살수의 은밀함에서 밀렸다라?

    이것은 흑천을 물려받을 그녀에게는 크나큰 오점이었다.

    송화산 중반에 들어선 혈화는 고개를 숙여 흙을 한 움큼 집어 코에 갖다 대었다.

    “음.”

    잠시 침음을 내뱉은 혈화는 주변을 바라봤다.

    한빈이 남기고 간 흔적이 점점 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지척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앗.”

    “왜 남의 오줌 냄새를 맡고 그래?”

    “뭐? 오줌이라고!”

    혈화가 소스라치게 놀라면 재빨리 흙을 땅에 던졌다.

    동시에 그녀의 시야에 일렁이는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송화산의 붉은 배경 사이에서 일렁이는 붉은 무복.

    그는 분명 한빈이었다.

    한빈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농담이니 걱정하지 마. 아까 보니 멧돼지가 잠시 실례하고 가더라고.”

    “지금 날 놀리는 거냐?”

    “뭘 그리 발끈하고 그래? 잘 지냈어?”

    “지금 무슨 짓이더냐?”

    뒷걸음치던 혈화가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그 모습에 한빈이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나보고 그런 거야? 이걸 보고 사돈 남 말한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맞는 건가?”

    한빈의 말에 혈화는 안쪽 볼을 씹었다.

    몰래 그를 감시하던 것은 혈화 자신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상황이 반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한빈은 검을 뽑지도 않은 채 혈화를 비웃고 있었다.

    혈화는 한빈을 다시 살폈다.

    오른손에 동냥 그릇을 든 채 아무 표정 없이 혈화를 바라보는 한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의 구역에 왔으면 일단 인사는 하고 가야지 않겠어?”

    맞는 말이지만, 인정하기 싫은 혈화가 인상을 구겼다.

    이런 모습을 흑천의 살수들이 봤다면 놀라 자빠질 것이었다.

    혈화는 흑천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혈화의 또 다른 별호는 냉혈화였다.

    혈화라는 별호에 차가움을 뜻하는 냉(冷)이라는 글자가 붙은 것이다.

    그녀는 오늘만큼은 냉정하지 못했다.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혈화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남의 물건을 빼앗아 튄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네.”

    “내가 튀었다고?”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혈화가 동냥 그릇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럼 튄 게 아니고 뭐야? 내 동냥 그릇이 거기 있잖아.”

    “살수가 언제부터 개방의 구역을 넘본 거야?”

    한빈이 동냥 그릇 속 철전을 소리 나게 굴리며 놀리듯 혈화를 바라봤다.

    그녀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말을 이었다.

    “살수는 동냥하지 말란 법 있나? 댁이 우리 밥줄을 가져간 거라고.”

    혈화가 성을 내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에이, 말은 정확히 해야지. 난 내 돈을 찾은 것뿐이야.”

    “그게 무슨 말이지?”

    “생각해 봐. 내가 부자도 아니고 왜 거지한테 은전을 던지겠어?”

    “그럼 왜 은전을 던진 거지??”

    “그건 잘못 준 거야. 철전을 던진다는 게, 은전이 잡혔지 뭐야?”

    “그럼 그냥 돈만 찾아가시면 되지 왜 남의 그릇을 가지고 튄 거지?”

    “튄 게 아니래도, 이게 손에 붙어서 안 떨어지는데 어떻게 하라고?”

    한빈은 눈짓으로 동냥 그릇을 가리켰다.

    천연덕스러운 한빈의 변명에 혈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빈의 말이나 자신이 뱉은 말이나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

    그때 한빈이 동냥 그릇에서 철전 하나를 꺼냈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철전.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철전의 옆면을 돌리며 바라봤다.

    철전을 바라보는 한빈은 입꼬리를 점점 올렸다.

    잠시 후 한빈은 그 철전을 다시 동냥 그릇에 넣고는 빙글빙글 돌렸다.

    쨍그랑. 쨍그랑.

    철전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자 혈화가 잠시 마음을 놓았다.

    순간 한빈은 철전을 몇 닢 집어서는 던졌다.

    휙!

    혈화가 반사적으로 철전을 잡았다.

    탁!

    그녀는 몇 닢의 철전을 눈 깜짝할 사이에 품속에 넣고 외쳤다.

    “나머지도 빨리 주시지!”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철전이 꼭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네.”

    “…….”

    혈화는 답하지 않고 침을 삼키며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목표의 무위는 절정 이상으로 파악된다고?”

    “헉!”

    혈화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이 흑천의 암어를 알아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분명 이것은 철전에 적혀 있는 정보였다.

    짧은 탄성의 끝에 혈화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거기에 써 있잖아. 왜 모른 척하고 그래?”

    “뭐, 뭐가 써 있다고 그래?”

    “…….”

    한빈은 대답 대신 철전 몇 닢을 꺼내 다시 살폈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말했다.

    “이건 조금 읽기가 힘드네. 이건 흑천의 주인이 내리는 명령인가?”

    말을 마친 한빈이 다시 철전을 던졌다.

    휙!

    탁!

    혈화가 허공에서 동전을 낚아챘다.

    “휴.”

    그녀가 한숨을 내쉬자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속이기 쉬운 아가씨네.”

    “뭐가 속이기 쉽다는 거지?”

    혈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다섯 살 때부터 받았던 살수 교육.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혈화의 감정은 요동쳤다.

    그녀의 표정을 본 한빈이 말했다.

    “내가 그 철전에 뭐가 적혀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 대충 때려 맞힌 거지.”

    “…….”

    혈화는 가만히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가 사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없었고 거짓이라도 해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이라 혈화는 판단했다.

    혈화는 분통함에 살며시 어깨를 떨었다.

    동시에 그녀는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혈화는 은밀하게 발끝에 내공을 담았다.

    하나, 둘…….

    상황을 보던 혈화가 발끝에 담은 내공을 폭발시켰다.

    순간 그녀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파팍!

    일직선으로 세운 그녀의 검이 한빈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슝!

    공간을 접듯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간 그녀의 검이 어딘가에 박혔다.

    혈화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검 끝을 바라봤다.

    챙그랑.

    자신의 검이 꿰뚫은 것은 동냥 그릇이었다.

    검 끝에 매달린 동냥 그릇 속 철전은 마치 종처럼 소리를 냈다.

    혈화는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한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알아챘다.

    붉은 무복과 송화산의 절묘한 조화.

    그것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와도 같았다.

    그에 비해 자신의 무복은 검은색.

    붉은 송화산에서 이 무복은 눈에 띄어도 너무 띄었다.

    즉, 공평한 승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한빈이 보여 준 경공은 절호곡에서의 경지와는 비교가 안 될 수준이었다.

    절호곡 사건 이후 한빈은 구걸십팔보를 전수받았기에, 그 경공의 경지는 몇 배 뛰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혈화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멀리서 붉은 무복의 한빈이 나타났다.

    “거참, 살벌하기는!”

    한빈의 표정은 옆 동네에 마실 나온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혈화의 얼굴은 그와는 반대로 붉으락푸르락 변화무쌍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감정을 수습한 혈화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체가 뭐지?”

    “나?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몰라서 묻는 거 맞아.”

    “하북팽가 막내 공자잖아.”

    “그거 말고.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가 그렇게 검을 쓴다고? 대체 그 검술은 어디에서 배운 거지? 내가 조사해 본 바로는 하북팽가의 빈객 누구도 그런 검술을 쓴 적이 없어.”

    혈화는 목숨이 오가는 도중에도 정보를 캐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냥 길 가다 배웠다고 해 두지.”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의 그 분위기는 대체 뭐지?”

    “갑자기 왜 분위기 타령을 하고 그래?”

    “당신에게서 우리와 똑같은 냄새가 나서 그래.”

    “냄새라고? 나 오늘 목욕했는데.”

    한빈이 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자 혈화가 미간을 좁혔다.

    “그 냄새 말하는 게 아니잖아. 당신에게서 이상하게 진한 혈향이 느껴진다고. 솔직히 말해 봐. 당신은 어느 조직 소속이야?”

    “참, 바보 같기는!”

    “뭐가 바보 같다는 거지?”

    “너 같으면 네가 속한 조직을 술술 불겠어? 바보도 아니고.”

    “…….”

    혈화는 다시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모두 맞는 말이긴 하지만, 실실 웃는 한빈의 표정을 보니 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빈은 계속해서 혈화를 바보라 칭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더욱 분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내기라고?”

    혈화가 호기심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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