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착한 놈, 악한 놈, 더 악한 놈 (3)
한빈이 말했다.
“저와 비무를 하고 싶으면 일단 약속을 하시죠, 사질.”
말끝마다 사질이라고 해도 서재오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대신 자신도 원래 대하던 대로 말을 낮추었다.
“무슨 약속을 말이냐?”
“비무를 하기 전까지 천수장의 규칙에 충실히 따를 것을 약조하시죠.”
“그게 무슨 말이냐? 당장 겨루면 될 것을 왜 조건을 붙이느냐?”
“제 몸이 회복 안 됐습니다, 사질.”
“흠.”
서재오는 할 말이 없었다. 몸이 불편하다는데 억지로 비무를 청할 수는 없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제가 문서로 약조해 주겠습니다.”
“지금 한 말 진심이더냐?”
한빈은 대답하는 대신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어디에선가 철노가 달려왔다.
한빈의 앞에선 철노는 자연스럽게 오른손에 든 보따리를 풀어 지필묵을 펼쳤다.
그 모습에 서재오가 적잖이 놀랐다.
한빈이 말했다.
“제가 뱉은 말은 여기에 다 적어 놓았습니다. 문서는 두 장. 저와 사질이 서명하면 이 문서는 비무를 약속하는 계약서로 효력을 갖습니다. 제 비무 약속을 받아들이겠습니까?”
한빈은 진지한 눈으로 서재오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마주한 서재오는 가슴 속에서 뭔가가 꿈틀대며 일주일 전 비무가 떠올랐다.
그 비무에서 마지막에 잡았던 깨달음의 끝.
비무도 비무지만 서재오는 그 깨달음의 끝을 계속 갈망하고 있었다.
한빈과 다시 검을 맞댄다면 그 깨달음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거기에 더해 지금 서명을 안 한다면 자신이 도망치는 꼴이었다.
서재오는 손을 내밀어 한빈이 건넨 붓을 받아 들었다.
휙.
서재오가 서명하자 한빈이 계약서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사질. 이 내용은 사문의 명예를 걸고 지키겠습니다, 사질.”
“나도 사문의 명예를 걸고 지키겠네.”
서재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계약서를 들고 홍칠개와 사라졌다.
혼자 남은 서재오는 계약서의 내용을 살펴봤다.
사실 내용은 별것이 없었다.
비무 전까지 천수장의 규칙에 따른다는 것이 다였다.
그때였다.
옆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대나무가 울창한 곳이었다.
이상하다 느낀 서재오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사사-삭.
옷 끌리는 소리는 들렸지만, 상대는 서재오의 기척을 못 느낀 듯 계속 목소리가 커졌다.
가까이 가서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서재오의 눈이 커졌다.
자신도 익히 아는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심미호가 손을 벌리며 모두에게 외쳤다.
“자 자, 내 말이 맞지? 다들 판돈이나 내놓으라고?”
“와, 미치겠네,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나서 넘어가냐고? 심 부대주는 어떻게 알았어?”
소대섭이 기가 찬 표정으로 심미호를 바라봤다.
그때 옆에 있던 장자명이 씩씩대며 말했다.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요? 저는 내일 넘어간다고 걸었는데, 하루 차이인데 저한테도 받으실 건가요?”
“장 의원님, 내기는 내기죠.”
“돈도 많으신 양반이 너무하시네. 심 부대주님, 저 무료 봉사인 거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알아요?”
“와, 주군 옆에 오래 계시더니 성격까지 닮으셨네.”
“장 의원님, 지금 욕하신 거죠?”
“허, 내가 무슨 욕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주군을 닮았다는 게 욕입니까?”
“장 의원도 주군을 닮아 가는 거 아세요?”
“아, 왜 그런 험담을······.”
장자명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고개 돌린 장자명의 시야에 낯익은 사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들에게 내기의 대상이 되었던 서재오였다.
서재오는 이들이 얘기한 대상이 자신임을 대충 알아챘다.
황당한 것은 대화를 들켰음에도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서재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뒤에서 사람 험담을 하다니. 그것도 대화산파의······.”
하지만, 서재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심미호가 자신의 옆을 가리키며 손짓했기 때문이다.
“일단 이쪽에 앉으세요.”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던 겁니까?”
서재오의 말투는 담담했다.
사실 얼마 전 같으면 불같이 화를 낼 그였다.
하지만, 지금 배분으로 밀린 형국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 다른 건 아니고 대협이 노예 계약서를 언제 쓸지 내기를 하고 있었어요.”
“노예 계약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허허.”
“아니, 서명해 놓고도 모르시는 거예요?”
“저는 노예 계약서에 서명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비무를 약조받았을 뿐입니다.”
“호호, 내용은 읽어 보신 거예요?”
“물론 확인했습니다. 저 대화산파의 제자입니다. 그런 제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리 없죠. 천수장의 규칙을 준수한다는 조건밖에 없었습니다.”
“호호.”
“기분 나쁘게 왜 웃으십니까?”
“천수장의 규칙은 찾아보셨나요?”
“그건······.”
“천수장의 첫 번째 규칙이 뭔지 아시나요?”
“······.”
서재오가 눈만 껌뻑이자 옆에서 지켜보던 장자명이 말했다.
“첫째, 천수장에 속한 모든 이는 사 공자인 팽한빈의 지시에 죽고 산다. 이게 첫 번째 규칙이죠.”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협께서 분명히 천수장의 규칙에 따른다고 하셨으니 이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죠.”
“저는 비무만 끝나면 돌아갈 사람입니다.”
“만약 비무를 안 받아 주면요?”
“비무를 안 받아 줄 리가요? 회복되면 받아 준다고 약조했습니다.”
“그럼 다 회복됐다는 것을 누가 확인하죠?”
“아.”
“노름판 속담에 따고 배짱이라는 말이 있어요.”
“흠.”
“따고 배짱부리면서 판돈을 안 걸면 끝이라는 얘기죠. 들어 보니 배분도 낮다고 하던데. 쯧쯧.”
심미호가 혀를 차자 서재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하북팽가의 직계가 화산파의 제자에게 사기를 치려고요······.”
그때 장자명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대협, 몇 년 계약입니까?”
“허, 몇 년 계약이라뇨, 비무만 끝나면 갈 거라고 했잖습니까? 의원님.”
자신을 밤낮으로 돌봐 줬던 장자명을 대하는 서대오의 태도는 공손했다.
사실 장자명도 일주일이나 그를 돌보며 측은지심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고 말이다.
“어디 계약서 좀 보여 주십시오.”
장자명이 서재오의 계약서를 낚아챘다.
그의 곁으로 몰려드는 심미호와 소대섭 그리고 맹호사대의 대원들.
천천히 계약서를 살피던 장자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종신 계약이네요.”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아까 심 부대주의 말대로, 우리 공자님이 비무를 안 한다고 우기면 끝까지 남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 우리야 좋죠. 매화검수가 함께해 주신다면 말이죠.”
장자명이 씩 웃자 서대오가 물었다.
“그럼 장 의원님도 쓰신 겁니까?”
“저는 다행히 삼 년입니다.”
말을 마친 장자명은 가슴을 활짝 폈다.
사람은 항상 남들과 비교를 하며 살아가는 생물이었다. 무보수에 삼 년간 죽도록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장자명은 처음에는 우울했다.
하지만, 이렇게 종신 계약을 한 자가 나타나자 괜스레 우월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사실 서재오는 만감이 교차했다.
비무를 하던 중 느꼈던 깨달음을 손에 넣기 위해서 한빈과의 비무는 필수였다.
즉, 나가라도 해도 비무 전까지는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강제로 묶이고 싶지는 않았다.
화산파의 제자로서 천하를 주유하며 호연지기의 꿈을 펼치려 했는데. 당분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때 장자명이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대협.”
“뭐, 괜찮습니다. 그런데 비무뿐 아니라 이런 사소한 거래에서까지 졌다고 생각하니 조금 분하네요.”
“우리 주군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장자명이 뭔가를 떠올리듯 표정을 굳히자 서재오도 상체를 기울였다.
“무슨 말이길래 그렇게 표정이 심각합니까?”
“뭐, 별말은 아니니 가볍게 들으세요.”
“네, 경청하겠습니다.”
“대협은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승부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합니까?”
“그야, 정도의 길을 걷는 화산파 제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틀에 박힌 이야기 말고요. 정파라고 다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솔직히 말씀드리죠. 누가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강호에서라면 악한 놈이 유리하다고 봅니다.”
“네, 그렇지요. 그런데 꼭 악한 놈이 유리한 건 아니라고 합니다.”
장자명은 얼마 전 기억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산공독을 푼 자신은 어찌 보면 나쁜 놈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장자명의 말에 서재오가 물었다.
“꼭 유리한 게 아니라면 착한 사람이 이길 때도 있다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더 악한 놈이 이긴답니다.”
일부분 맞는 말이긴 했기에 서재오는 반박할 수 없었다. 다만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의 물음에 장자명은 대나무 숲의 밖, 어딘가를 바라봤다.
서재오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물론 그곳은 한빈과 홍칠개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 * *
한빈과 홍칠개는 천수장의 정문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사부님, 진짜 가시려고 합니까?”
“네게 전수할 무공은 어차피 구걸십팔보밖에 없었다. 그 경지가 나를 뛰어넘었으니 더는 가르칠 것이 없구나. 그리고······.”
총칠개가 잠시 말을 멈추자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시지요.”
“어차피, 내 지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더냐?”
“아, 그건······.”
한빈이 말끝을 흐리자 홍칠개가 득도한 도인처럼 웃었다.
“하하, 내 눈을 피하는 것을 보니 아직 우리 제자한테 양심은 남아 있나 보구나.”
“물론입니다. 양심 빼놓고 저를 소개한다면 그것은 활시위를 빼고 활을 논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 알았으니 입에 침은 그만 발라도 좋다. 내가 이곳을 떠나더라도 너는 내 제자가 맞으니 가슴을 펴고 다니거라.”
한빈은 고개를 들어 홍칠개의 눈을 바라봤다.
지금 홍칠개의 말은 임시 사제 관계가 아닌 정식 제자로 인정하겠다는 말이었다.
의무는 없지만, 마음만은 서로를 인정하자는 말과도 같았다.
한빈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래. 나는 그만 가 보마.”
홍칠개가 한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때 한빈이 옆을 힐끔 보며 철노에게 턱짓했다.
철노가 한빈에게 보따리를 건넸다.
그 모습에 홍칠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제자야.”
“오해는 마십시오. 사부님, 이것은 제자의 성의입니다. 그리고 옷은 빨지 않고 그대로 뒀습니다.”
홍칠개는 보따리에 슬쩍 코를 대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이곳에 입고 온 옷이었다.
그리고 슬쩍 금화도 보인다. 그것은 한빈이 황궁에서 받은 선물이었다.
홍칠개가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 대신 풀 밟는 소리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사-삭.
구걸십팔보를 극성으로 펼친 것이다.
한빈과 있으며 홍칠개의 구걸십팔보도 만개한 것이었다.
* * *
두 달 후.
하북팽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상시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천수장도 마찬가지였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비명이 이곳이 예전에 귀곡장이라는 곳으로 불렸다는 것을 떠오르게 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 비명은 실제 사람의 울부짖음이었다.
“제발 내 계약서를 내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