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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73화 (73/621)
  • 73화. 착한 놈, 악한 놈, 더 악한 놈 (2)

    한빈은 노예 계약서를 쓰기 위해 늘 지필묵을 지니고 다녔다.

    그런데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니!

    주군을 존경하는 심미호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붓을 든 강유찬은 주변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했다.

    휙. 휙.

    강유찬은 일필휘지로 종이 위에 자신이 담고 싶은 말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탁.

    드디어 강유찬이 붓을 내려놓았다.

    찬찬히 자신이 쓴 내용을 확인한 강유찬은 서찰을 한빈에게 건넸다.

    “녀석이 일어나면 이 서찰을 건네주게.”

    “네, 알겠습니다.”

    “자네가 봐야 할 내용이니 건네주기 전에 꼭 보고.”

    “네, 그러지요.”

    서찰을 힐끔 살핀 한빈의 눈이 커졌다.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것은 이번 패배에 대한 설욕을 하기 전까지는 화산파로 돌아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강유찬이 화산파에 직접 기별을 넣는다고도 밝혔다.

    게다가 깨어나는 대로 매화삼경과 매화 패도 한빈에게 맡겨 두라 했다.

    즉, 비무의 약속을 강유찬이 나서 인정해 준 것이다. 다만, 한빈을 꺾고 소중한 화산의 신물을 되찾으라는 것이 강유찬의 지시였다.

    한빈의 표정도 시시각각 변했다. 그런 한빈을 본 강유찬이 말했다.

    “내가 소제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웠나?”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소제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그러니 소제도 그냥 날 편하게 대하게.”

    “네. 알겠습니다, 형님.”

    한빈이 작게 포권하자 강유찬이 말을 이었다.

    “서찰의 내용이 부담스러우면 없던 일로 해도 되네.”

    “아닙니다. 나중에 비무 한 번 더 하면 될 것을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그리하지요.”

    “하하, 고맙네. 이건 내가 소제에게 빚을 진 것으로 하지.”

    “네, 그럼 그 차용증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한빈이 너스레를 떨자 강유찬이 다시 웃었다.

    그 뒤로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웃음 섞인 대화가 오갔다.

    한빈은 강유찬을 보고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한빈을 대하는 강유찬의 태도는 시간마다 바뀌었다.

    처음에는 공자로, 다음에는 자네로.

    마지막에는 소제로.

    이 모든 호칭에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한빈은 생각했다.

    강유찬이 진심으로 한빈을 인정한 것일까?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는 것이 한빈의 판단이었다.

    이 서찰은 서재오를 책망함과 동시에 화산파의 체면도 세워 주는 것이다.

    매화삼경과 매화 패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잠시 맡겨 둔 상황으로 만들고 한빈에게 다음 비무의 의무까지 지웠다.

    그렇다면 한빈은 이 상황이 부담스러울까?

    그것은 아니다라고 한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 강유찬에게 보이는 한빈의 미소는 진짜였다.

    이 서찰이 한빈에게 하나의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를 마친 강유찬은 한빈에게 인사를 건넨 후 수하들에게 외쳤다.

    “자! 이제 돌아간다.”

    강유찬이 황금빛 장검을 높이 들자 정렬한 관군이 일사불란하게 돌아섰다.

    그 모습은 수백 개의 인형에 실을 달아 한 명이 조종하는 것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타닥.

    타닥.

    그들은 왔던 길을 돌아 행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금의위의 화려한 퇴장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뭘 본 거지? 지금 금의위에서 왔다 간 거 맞지?”

    “그럼, 난 저 강유찬이라는 양반 알아. 아마 도호가 청령이었지.”

    “아, 그 유명한 화산파의 청령이 저 양반이었군. 그런데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와는 무슨 얘기를 나눈 거였지?”

    “아무래도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가 황실과 인연이 있는 것 같은데.”

    “오호라.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혹시 황실과의 인연 때문에 화산파의 서재오가 사정을 봐준 게 아닌가?”

    “에이, 설마, 아까 비무는 자네도 봤잖나. 그게 어디 봐주고 자시고 할 상황이던가.”

    “하긴 그렇지.”

    비무를 지켜본 모든 이가 웅성거리는 가운데 길었던 하루가 막을 내렸다.

    한빈은 처소로 돌아가며 자신의 품속에서 강유찬이 주머니를 꺼내 봤다.

    그곳에는 붉은색 옥패가 있었다.

    그 옥패를 확인한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값이 꽤 나갈 것 같지만, 보물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옥패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남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한 옥패이니 쓸 일도 없을 것이었다.

    황실과 자신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이라 한빈은 생각했다.

    * * *

    그날 밤, 정화 부인의 처소.

    정화 부인은 다시 화첩을 꺼냈다.

    촤르륵.

    화첩을 넘기던 그녀는 난초 뒤에 사(四)라는 글자가 숨겨진 장에서 손을 멈췄다.

    그녀는 이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검게 칠해진 사를 노려봤다.

    오늘 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막내가 화산파의 초절정 고수를 꺾다니?

    화를 풀 곳을 찾지 못한 그녀는 애꿎은 탁자를 거칠게 때렸다.

    탁, 탁.

    잠시 뒤, 동작을 멈춘 그녀는 답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놈의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당한 거야.”

    이것이 정화 부인이 내린 결론이었다.

    화산파의 서재오는 원래 막내 공자 한빈이 포섭해 놓은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정화 부인은 비무가 끝난 후 바로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홀로 떠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초청한 빈객인 서재오가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짜증 나는 금의위의 행사도 봐야 했다.

    더 큰 문제는 금의위가 돌아가고 나서 생겨났다.

    깨어난 서재오가 한빈의 곁에 남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도 정화 부인은 아무 말 못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서로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단순한 빈객인 서재오를 구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재오에게 더 많은 돈을 제시했을 터.

    화가 치민 정화 부인은 한빈을 나타내는 암어가 담긴 장을 신경질적으로 뜯어냈다.

    하지만, 정화 부인은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싸워야 할 상대임을 알았던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포기할 것은 빠르게 포기해야 대업을 이룰 수 있다.

    깊은 고민에 빠졌던 정화 부인은 눈을 떴다.

    순간 빛나는 눈동자. 그녀는 표정을 바꾸고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 근심은 어디에도 없었다.

    딱.

    그 소리에 밖에서 호위 무사가 들어왔다.

    호위 무사를 바라보는 정화 부인의 얼굴에는 겨울 살얼음이 한 장 끼어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 평정심을 찾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서찰을 하남에 전하라.”

    “네, 알겠습니다.”

    포권한 호위는 바로 정화 부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일주일 뒤 천수장.

    한빈이 바삐 걷고 있었다. 그 뒤에는 어제 비무의 상대였던 서재오가 쫓아오며 외쳤다.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그의 외침에 걸음을 멈춘 한빈이 뒤돌아봤다.

    “참, 이 양반.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시네.”

    “못 알아듣다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아니, 왜 자꾸 생떼를 쓰십니까?”

    “내가 무슨 생떼를 썼다고 그러느냐? 몸도 회복되었으니 어서 비무를 받아 주거라.”

    “아니, 몸이 회복된 것하고 비무랑 무슨 상관입니까?”

    “너도 서찰을 보지 않았더냐? 너를 꺾지 못하면 나는 화산파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허, 사숙뻘 되는 내게 너무 버릇이 없구나.”

    “아, 말끝마다 자꾸 배분 따지시는데, 배분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강호에서 배분은 진리와도 같다. 윗사람이 말하면 당연히 아랫사람이 따라야 하는 것이 강호의 도리이거늘······.”

    “그러면, 우리 사이에도 그게 적용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정도에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윗사람의 명을 따라야 하는 것이 법칙이다.”

    “흠.”

    한빈은 헛기침했다. 이건 헛소리였다.

    같은 문파에서는 통하지만, 문파가 다르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같은 문파도 아닌데 윗사람이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저렇게 우기니 나이 어린 한빈은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뭔가를 결심한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럼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말이냐?”

    “문파가 다르더라도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명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게 약속할 일이더냐? 당연한 강호의 도리이거늘.”

    “약속하십시오.”

    “그래, 약속하마.”

    서재오가 활짝 웃으며 답하자 한빈이 두리번거렸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어딘가를 보고 외쳤다.

    “사부님!”

    그 말에 어디선가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사-삭.

    구걸십팔보를 펼치며 홍칠개가 나타난 것이다.

    홍칠개의 등장에 서재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비무 당일 보고 일주일 만에 보는 이였다.

    그 당시 한빈이 자신의 사부라 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출신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무림 고수라면 당연히 자신이 알고 있어야 하거늘, 상대는 처음 보는 자였다.

    아마도 하북 변두리에서 방귀깨나 뀌는 실력자임이 틀림없었다.

    서재오가 보기에는 사부란 자는 화산파 앞에서 더욱 쪼그라들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는 정신을 잃고 난 후 상황에 대해서는 서재오가 모르기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비록 그날 깨어났지만, 천수장의 의당에서 어제까지 누워 있었던 서재오였다.

    서재오가 홍칠개를 가벼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한빈이 말했다.

    “사부님, 이자가······.”

    한빈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홍칠개가 입을 열었다.

    “나도 다 들었다.”

    홍칠개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서재오를 바라봤다.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서재오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발견한 것처럼 번뜩이는 홍칠개의 눈에 서재오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체 왜 그러느냐?”

    “왜 그러냐고 했냐?”

    “대체 누구기에 내게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

    “뭐, 하나만 묻겠다. 혹시 너희 장문인은 잘 계시냐?”

    “헉, 누군데 대화산의 장문인을 욕보이려 하는 것이냐?”

    “허허, 그러고 보니 내가 너희 장문인을 못 본 지도 꽤 됐구나. 예전에는 참 귀여웠는데······.”

    말도 안 되는 홍칠개의 말에 서재오의 눈이 커졌다.

    “대, 대체 누구시오?”

    “나? 개방의 홍칠개라고 하는데, 보통 무제자라고 하지. 아니 지금은 제자를 거뒀으니 유제자인가······.”

    “헉.”

    서재오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그러고는 재빨리 홍칠개를 살피기 시작했다.

    무제자 홍칠개라? 그를 서재오가 모를 리 없었다.

    화산에 놀러 온 것만 몇 번을 봤다.

    역마살이 있는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은 성격이라 화산에 머물렀다가도 어느새인가 곤륜에 가 있는 개방의 고수였다.

    그렇다면 배분은?

    구파일방이 동도이니 사숙조뻘이라 할 수 있다.

    서재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홍칠개라고 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단정했다.

    저건 거지의 차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서재오가 고민하고 있을 때 홍칠개가 하얀 무복의 허리춤을 뒤로 젖혔다.

    순간 들어오는 개방의 매듭.

    서재오의 눈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한빈의 낭랑한 목소리가 서재오의 귀에 파고들었다.

    “일단 약조를 했으니 배분에 대해 진지한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사질.”

    “······.”

    사질이라는 말에 서재오는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서재오는 아무리 노력했지만,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배분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과연 주워 담을 수 있을까?

    서재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한빈을 비무에서 꺾고 여길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하, 배분을 따지기 전에 일단 비무를······.”

    그의 말을 한빈이 바로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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