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71화 (71/621)
  • 71화. 혈랑공자 (5)

    장자명은 들것에 서재오를 눕혔다.

    물론 들것으로 서재오를 옮기는 임무는 장삼과 조호가 맡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정리된 상황.

    한빈은 뒤돌아 모두에게 포권했다.

    “끝까지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비무를 계기로 하북팽가가 강호의 중심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한빈의 일장 연설에 옆에서 듣고 있던 홍칠개는 조용히 돌아섰다.

    그렇게 연무장을 빠져나가려던 홍칠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빈이 처음에 흘린 핏덩이가 떨어져 있었다.

    홍칠개는 가까이 가서 그 핏덩이를 손으로 찍어 입속에 넣었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 있던 팽대위는 보았다.

    아까 분명 한빈의 사부라 들었다.

    그런데, 저 행동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마인의 행동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착각도 홍칠개의 다음 말에 완전히 깨져 버렸다.

    “난 또 뭐라고. 돼지 피군.”

    말을 마친 홍칠개는 한빈을 보고 씩 웃은 뒤 연무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연무장에 한빈과 팽대위만 남은 상황.

    팽대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어르신이 지금 한 말은 대체 무슨 뜻이더냐? 돼지 피라니?”

    “집법당주님, 그건 비밀입니다.”

    “허허.”

    팽대위가 헛웃음을 뱉었다. 물론 어찌 된 상황인지 감이 잡히긴 했다.

    상대에게 허점을 보이기 위해 입안에 돼지 피가 담긴 주머니를 물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웃음도 잠시 팽대위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빈의 모습이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측은지심의 시선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하지만, 과감해진 한빈을 보고 속으로 응원했다.

    물론 집법당주로서 치우친 판단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맹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강호에서 몇십 년은 굴러먹은 노(老)고수와도 같았다.

    한참 고민하던 팽대위는 고개를 저었다.

    이기는 데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팽가의 가칙이기 때문이다.

    팽대위가 보기에 오늘 한빈의 행동은 이기는 전쟁의 전략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전략으로 이겼다.

    그것도 상대가 화산파였다.

    팽가의 도(刀)가 아닌 팽가의 검(劍)으로 꺾었다.

    이것은 강북 무림에 변화를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물론 하북팽가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변화였다.

    팽대위가 한빈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이제 그만 들어가 보자꾸나.”

    “감사합니다, 숙부.”

    “허.”

    팽대위가 탄성을 흘렸다. 한빈이 간만에 사적인 호칭을 썼기 때문이다.

    칼로 손목을 그어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집법당주 팽대위였지만, 한빈의 숙부라는 말 한마디가 그를 녹였다.

    팽대위가 웃음 짓고 있을 때였다.

    싸한 시선이 느껴진 팽대위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정화 부인이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팽대위의 앞에 선 정화 부인이 말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시죠. 집법당주님.”

    “네, 그러시죠. 형수님.”

    둘은 먼저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팽대위는 미칠 지경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할 팽강위는 때마침 폐관에 들어가 있고, 이런 복잡한 일은 모두 자신의 일이 되어 버렸다.

    팽대위는 한빈에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한빈에게 든든한 뒷배가 있었다면 하는 점이다.

    팽가의 소가주 후보 경쟁은 공평하면서도 불공평했다.

    가주가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공평했지만, 소가주 후보마다 뒷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은 불공평했다.

    가주와 형제들은 중립을 지키지만 다른 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을 모으는 것도 가주의 덕목이었다.

    한빈은 팽대위와 정화 부인의 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맹호사대의 무사들뿐 아니라 이곳을 보는 무수히 많은 시선은 정화 부인의 측근만이 아니었다.

    주변 중소 무관들의 무인들도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늘의 비무는 이들이 증인이었다.

    지금 정화 부인은 화산파와 하북팽가의 관계를 들먹이며 비무의 결과를 뒤집으려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시선은 생각하지 않고 정화 부인이 설치는 것은 자신을 만만히 봤다는 것.

    한빈은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시간이 됐는데……. 좀 늦는군.”

    말을 마친 한빈은 천수장의 정문 쪽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방정맞게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손님을 맞기 위해 정문을 맡겨 놓은 철노였다.

    철노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한빈에게 뛰어왔다.

    “공자님, 지금 큰일 났어요.”

    “손님을 맞으랬더니 왜 갑자기 호들갑이냐?”

    “그, 그게 아니라. 지금 이곳으로 관군이 몰려오고 있어요.”

    “아니, 내가 말했잖느냐? 정주섭 대인이 올 거라고.”

    “정주섭 대인은 안 보이고 관군 수백 명이 몰려오고 있다니까요? 혹시 사고 치신 거 아닙니까?”

    철노의 목소리가 컸는지 주변 사람들이 눈치를 봤다.

    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관군은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관과 무림이 별개라고 하는 것은 무림인이 관에 해를 끼치지 않았을 때에 해당된다.

    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강호의 법칙대로 알아서 하란 것이 황실이 내린 명이었다.

    관이 넓은 중원 곳곳에 손을 미칠 수 없으니까 그런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관군 수백 명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다면?

    그것은 이곳에 있는 누군가가 대형 사고를 쳤음을 의미했다.

    “누가 사고를 쳤지?”

    구경꾼 중 한 명이 말하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해 갔다.

    “뭔지 몰라도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성질 급한 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니, 조금 더 보고 있자고. 저쪽에서 숨어서 지켜보면 될 것 같은데…….”

    호기심이 강한 이는 숨어서 지켜볼 곳을 찾았다.

    얼마 가지 않아 연무장이 울렸다.

    쾅!

    쾅!

    말을 탄 장수가 금빛 투구를 빛내며 앞장선 상태였고, 그 뒤를 사두마차가 요란한 바퀴 소리를 내며 따르고 있었다.

    이어서 이를 따르는 수백의 병사들이 군화 소리를 내며 연무장 쪽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침을 삼키고 있을 때 한빈만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때 어느샌가 심미호가 옆으로 다가왔다.

    “주군, 어떻게 된 일이에요?”

    “뭐, 두고 보면 알겠지.”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자 심미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지금 한가하게 농담하실 때가 아니에요. 저기 마차에 실린 금빛 물체 보이세요?”

    “그래 보이는데, 왜?”

    “아무래도 그거 개작두 같아요.”

    “에이 설마.”

    한빈이 피식 웃자 심미호가 가슴을 탁탁 쳤다.

    “그러지 말고 사고 치신 거 있으시면 빨리 튀어요. 일단 목숨부터 부지해야죠.”

    “아, 심 부대주는 대체 나를 뭐로 보기에…….”

    한빈은 말끝을 흐렸다. 주변의 시선이 너무 따가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빈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와, 저게 개작두래.”

    “개작두면 금의위하고 개봉부에서만 쓴다는 그…….”

    “그렇지. 호랑이 목도 단번에 댕강하는 그 물건이 맞지.”

    누군가가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한빈은 그들의 대화에 어이없어 하늘을 바라봤다.

    대충 이 정도면 하북에서 명성을 쌓았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대체 자신을 뭐로 보기에 죄인 취급을 한다는 말인가?

    “휴.”

    한빈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드디어 수백의 행렬이 연무장 앞에서 멈췄다.

    쿵!

    동시에 금빛 투구를 빛내는 장수가 말에서 내렸다.

    착지하는 데 소리 하나 안 나는 것으로 봐서는 무공 수위가 범상치 않았다.

    그가 연무장이 떠나갈 듯 외쳤다.

    “팽한빈이 누구시오?”

    그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누군가가 외치자 금빛 투구의 장수가 그쪽을 노려봤다.

    순간 연무장 주변은 정적에 싸였다.

    그 정적 속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터벅터벅.

    물론 그것은 한빈이 내는 소리였다.

    한빈은 소매를 붙잡는 심미호를 뿌리치고 장수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한빈을 바라보는 심미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보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서 있는 정화 부인은 웃음을 참고 있었고 말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모두의 시선을 받은 한빈이 장수의 앞에 섰다.

    “제가 팽한빈입니다.”

    “…….”

    장수는 팽한빈을 말없이 살폈다. 너덜너덜해진 붉은 무복과 겉으로 보이는 살갗에는 여기저기 피딱지가 붙어 있다.

    장수의 이름은 강유찬.

    금의위의 수장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긴 했지만, 몰골을 보니 이자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딱 봐도 어디서 단단히 얻어맞은 모양새가 아니던가.

    하지만, 주변에서 반박하는 이가 없기에 일단 신분을 인정하기로 했다.

    금의위 수장인 강유찬은 내공을 실어 외쳤다.

    “팽한빈은 황제의 명을 받들라!”

    그 외침에 뒤쪽에 있는 심미호는 고개를 푹 숙였고, 멀리서 지켜보던 정화 부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빈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고 외쳤다.

    “신 팽한빈,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동시에 강유찬은 금빛 서찰을 펼쳤다.

    촤르륵.

    황금빛 성지는 마치 태양을 품고 있는 것처럼 반짝였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을 때 강유찬이 성지를 읽어 나갔다.

    “대대로 충신의 집안인 하북팽가의 팽한빈은 이번 절…….”

    성지의 낭독이 계속되자 사람들의 눈은 점점 커졌다.

    물론 그중 가장 커진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정화 부인이었다.

    절호곡의 토벌 작전의 성공으로 간단한 상이 내려올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금의위까지 대동한 행사라니?

    이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화 부인은 군사들을 보고 한빈을 벌하기 위해 왔다고 확신했다.

    지금의 일은 그녀에게 악몽 같았다.

    물론 한빈도 약간 당황했다.

    사실 며칠 전 정주섭으로부터 기별을 받기는 했었다,

    관원 몇 명과 함께 포상을 하러 이곳에 온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렇게 수백을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지금 온 이는 금의위의 수장이 아니던가?

    내단도 없는 천산혈랑을 바친 대가치고는 과한 것은 사실이었다.

    강유찬은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고 성지를 계속 읽어 나갔다.

    “······공을 세운 그대에게 혈랑공자라는 별호를 내린다.”

    마지막 말에 여기저기서 헛숨이 튀어나왔다.

    “허, 황제 폐하께서 직접 별호를…….”

    “허허, 이렇게 되면 막내 공자에게 줄을 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정화 부인의 측근까지 한빈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고금을 통틀어 황제가 무림인에게 칭호를 내린 것은 몇 안 되었다.

    이에 비해 한빈의 표정은 다소 무덤덤했다.

    별호라는 것은 강호에서 자연스레 퍼지며 불리게 되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팽가의 상징은 호랑이.

    호랑이 집안에 늑대의 별호를 쓰는 무인이라?

    살짝 의문이 들었다.

    전생에는 광귀, 현생에는 혈랑이라?

    이렇게 사파의 기운을 가득 담은 별호라니?

    하지만, 황제가 하사한 별호였다.

    성지를 다 읽은 강유찬은 힐끔 뒤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강유찬의 수하 몇이 마차에서 금색 관을 내렸다.

    멀리서 봤을 때는 개작두 같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금은보화가 담긴 상자가 분명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