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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70화 (70/621)

70화. 혈랑공자 (4)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한빈과 서재오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서로를 노려보며 검 끝을 겨눴다.

그때 서재오의 검 끝이 스르르 내려갔다.

탕!

그의 검 끝이 바닥을 찍었다.

정확히는 바닥을 찍은 것이 아니라 쓰러지는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 비무는 내가 부족했다.”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빈은 이번만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 말과 동시에 사람들은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짝짝.

짝짝.

이것은 투혼을 불태운 무인에 대한 찬사.

그때 점창파의 정창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검을 오른손으로 움켜잡고 바닥을 찍었다.

쿵. 쿵.

박수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분위기는 전염되기 마련. 옆에 있는 이진명도 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쿵.

동시에 연무장 주변이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이것은 천군만마가 행군하는 소리와도 같았다.

참관인 자격으로 비무를 지켜보던 팽대위는 아직 판정을 내리지 않았다.

승부야 이미 난 것이고 이 여운을 즐기고 싶기 때문이었다.

둘에게 보내는 찬사가 잦아들 즈음, 팽대위가 외쳤다.

“이번 비무는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승자는 하북팽가의 팽한빈.”

팽대위가 내공을 실어 거도를 높이 들었다.

팡!

비록 비무는 끝났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곤륜파의 이진명도 멍하니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

고개를 돌려 보니 정화 부인이 입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표정을 숨기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속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이진명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정화 부인의 목소리가 이진명의 귓전에 박혔다.

“즐거우셨는지요?”

“비무가 끝났으니…….”

이진명이 말끝을 흐렸다. 무인의 혼을 깨운 비무가 끝났고 이제 현실로 돌아와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진명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희가 해 드릴 것은 없을 것 같군요.”

“대협은 이 비무가 정당하다고 보십니까?”

정화 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실력이 아닌 권력으로 누르라는 말이었다.

그때 연무장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빈과 서재오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내공의 한 톨까지 모두 쓴 서재오는 곧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뭐, 한빈의 모습도 만만치 않았다.

소매를 타고 흐르던 피는 멈췄지만, 붉은색 무복은 피에 절어 있는 상태.

어떻게 보면 한빈의 상태가 서재오보다 위독해 보였다.

하지만, 한빈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복(復) : 이(二))

회복의 효용을 담은 구결을 두 개만 남기고 모두 소모한 상태였다. 물론 ‘기사회생’의 구결을 소모할 내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무공을 펼칠 힘은 안 되지만, 그렇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빈이 서재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누가 봐도 서재오를 부축하려는 모습이었다.

투혼을 불태웠던 두 무인의 대결이 훈훈하게 끝을 맺으려는 모습에 모두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서재오가 손을 내밀며 한빈의 부축을 받으려 했다.

“고맙네.”

하지만, 뜻밖의 상황이 일어났다.

한빈은 서재오의 손을 잡는 대신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손바닥을 보였다.

“잠시만요, 대협.”

“왜 그러는가?”

“뭐, 잊으신 게 있지 않나요?”

“잊은 거라…….”

고개를 갸웃한 서재오는 바닥에 떨어진 검집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 검집을 챙겨 주려고 하는 건가? 고맙네.”

“그게 아니고 약조 말입니다.”

“약조라?”

“그 검 제게 주시기로 하셨잖습니까? 매화삼경이라고 하셨던가요?”

“…….”

서재오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제야 비무 전에 약속했던 말이 기억난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뜨거운 무인의 혼을 검으로 나눈 사이가 아니던가?

한빈이 매화삼경을 요구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물론 놀란 것은 서재오뿐만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뭐야? 진짜 달라는 거야?”

“이번 비무로 서로 친구가 된 게 아니었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질 때 누군가 연무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는 점창파의 원로 정창명이었다.

터벅터벅.

마치 고의로 내공을 실어 걷는 것 같이 그의 발걸음은 연무장의 청강석이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가 보고 있는 곳에는 팽대위가 있었다.

팽대위가 난데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할 때 정창명이 말했다.

“이 비무는 무효네.”

제삼자의 난데없는 선언에 팽대위가 연무장 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팽대위는 착지하며 내공을 실어 진각을 밟았다.

쿵.

들썩이는 연무장.

팽대위가 물었다.

“어르신, 지금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정창명의 배분이 자신보다 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헛소리를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창명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 비무를 무효라고 하는 이유는 한 가지라네.”

“말씀하시지요.”

“그것은 이 비무의 참관인으로 나선 자네가 하북팽가의 사람이라는 걸세.”

“허. 이 비무를 약속했던 시점 저는 증인이 되기로 약조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까?”

“생각을 해 보게. 이 비무는 화산파와 하북팽가의 비무였네. 그렇다면 제삼자가 진행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닌가?”

“어르신, 지금 억지를 부리시는 것입니까?”

“억지가 아니라, 무림의 법도를 말하는 것일세.”

“강호의 법도 중 그런 건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둘의 대화에 한빈은 미간을 좁혔다.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정화 부인이 이곳에 혼자 나타날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자신이 이겨도 억지를 부리리라는 것도 알았다.

지금 매화삼경이나 매화 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화 부인은 한빈이 이번 비무에서 이겨 명성을 쌓아 가는 자체가 죽기보다 싫을 것이었다.

한빈은 팽대위와 정창명의 싸움에 끼어드는 대신 뒤를 힐끔 바라봤다.

물론 홍칠개가 있는 곳이었다.

팽대위와 정창명의 언쟁이 계속되자 좌중은 눈살을 찌푸렸다.

영혼이 담긴 수묵화를 한 시진 동안 그려 놓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을 찢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사-삭.

연무장에 신발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언쟁을 벌이는 둘의 뒤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신형에 팽대위가 말을 멈췄다.

그것은 정창명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홍칠개.

홍칠개는 아무 말 없이 정창명을 바라봤다.

호의적인 눈빛은 아니었기에 정창명은 헛기침하며 물었다.

“험, 대체 누구시길래 곤륜파와 하북팽가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오?”

“지금 나한테 물어본 것이냐?”

반듯한 옷차림새에 비해 나오는 말투는 시정잡배와도 같았다.

이것은 분명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 정창명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럼 여기에 누가 있겠소?”

“허허, 이놈아. 관부터 볼래, 눈물부터 흘릴래? 아니면 피부터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그 말에 정창명은 검집을 잡았다. 그때 돌개바람이 연무장에 스쳐 지나갔다.

휙.

바람에 홍칠개의 옷자락이 날렸다.

펄럭.

“대체…….”

정창명은 말을 잇지 못했다.

홍칠개의 허리 언저리에서 매듭을 봤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넷…….

매듭을 세던 정창명은 눈을 크게 떴다.

상대는 개방의 육결제자였다. 그렇다면 자신과 같은 배분일 터.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때 홍칠개가 정창명에게 속삭였다.

“내가 말이지, 소싯적에…….”

“헉.”

정창명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그러고는 바로 고개를 떨궜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점창파의 원로 정창명은 축 처져서 연무장을 떠났다.

누가 보면 정창명이 비무를 치른 것으로 오해할 법도 했다.

터덜터덜.

힘없이 자리에 앉은 정창명에게 곤륜파의 이진명이 물었다.

“대체 왜 그러십니까?”

“…….”

정창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얀 옷을 입은 선풍도골의 노인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네 사부와 함께 네 똥 기저귀를 간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정창명의 기억에 그런 사람은 단 하나였다.

무제자 홍칠개.

점창파에 놀러 오면 반년은 놀다 가던 개방의 고수이자 망나니.

어릴 적 그에게 참 많이도 맞았었다.

그것은 한 수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이루어진 구타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를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시에 무림 백대고수였으니 지금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일 것이다.

홍칠개는 마지막에 한빈이 자신의 제자라고도 밝혔다.

그 말은 한빈의 배분이 정창명과 같다는 말이었다.

정창명은 주변을 둘러봤다.

구대문파의 장문인과 같은 배분의 자신이 이리 밀릴 줄은 몰랐다.

더욱이 한빈이 자신과 같은 배분이라는 것도 황당했다.

정창명은 이쯤에서 끝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 정화 부인이 뾰로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야기가 잘 안 된 건가요?”

“험, 나는 팽가의 막내 공자와의 일에서는 손을 떼겠소. 부탁한 하남정가의 일은 약속대로 이행하겠소.”

정창명은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때 그는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수장을 떠났다.

연무장 주변은 난데없는 상황에 다시 소란이 일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러게 말이야?”

“저 하얀 무복의 노인이 대체 누구길래 그러지?”

“혹시 무당의 도사 아니야?”

“에이, 곤륜파의 원로가 뭐 꿀릴 게 있다고 저렇게 질려서 나가?”

“혹시 빚쟁이인가?”

“허허, 그럴 수도 있겠네.”

모두가 이 상황을 추리하고 있을 때 한빈이 서재오에게 말했다.

“매화 패도 주시죠.”

“헉.”

그때야 매화 패도 걸었다는 것을 떠올린 서재오가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왜 매화 패까지 걸었을까?

후회하던 서재오의 머릿속에 비무 초반이 떠올랐다.

분명 한빈은 자신의 내공을 받지 못해 피를 한 움큼 쏟았었다.

그 때문에 서재오는 자만이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에 새겨졌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 후 이루어진 대결을 생각한다면 초반에 보여 줬던 허술한 모습은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대체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왜? 왜?…….’

서재오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동시에.

울컥!

피를 한 바가지 쏟았다.

서재오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털썩!

그는 연무장에 쓰러졌다.

의식이 멀어지는 그에게 이제 ‘왜?’라는 의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오늘의 비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검을 쓰든 무슨 상관이 있으며 매화 패가 없으면 또 어떠할까?

더 나아가 자신이 매화검수가 아니면 어떠할까!

서재오는 깨달음의 끄트머리를 잡은 채 정신을 잃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멀리 있는 장자명을 보며 손짓했다.

신호를 받은 장자명은 번개처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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