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68화 (68/621)

68화. 혈랑공자 (2)

한빈의 앞에 선 정화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깔보는 듯한 눈빛만을 보냈다.

대신 삼공자 팽무빈이 한빈의 앞으로 와 말을 건넸다.

“그동안 잘 지냈나?”

“덕분에 아주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른 시간이 아닌가요?”

“귀곡장이라 불리던 이곳을 구경하기 위해 조금 일찍 왔다네.”

“여기에 귀곡장이 있다고요? 귀곡장이 어디 있습니까?”

한빈은 눈썹 위에 손을 올려 챙을 만든 뒤 주변을 살피는 척했다.

그 모습에 팽무빈이 말했다.

“바로 여기가 아닌가?”

“다 좋은데 말조심하시지요. 만약 땅값이 떨어지면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그 책임은 돈으로 받지는 않을 것이고요.”

한빈이 팽무빈의 한쪽 팔을 바라보자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한빈의 특기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한빈은 팽무빈과 팽경빈에게 내기를 걸며 하북팽가를 뒤집어 놨었다.

그 내기의 승자가 저리 말하니 빈말 같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만 들어 본다면 누가 봐도 가족이 아닌 적이었다.

비무의 시작 전에 신경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신경전의 승자는 누가 봐도 한빈.

이를 지켜보던 정화 부인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혔다.

“무빈이는 시간 낭비 말고 빨리 귀빈들을 소개하거라.”

팽무빈은 그제야 뒤쪽에서 기다리는 고수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화산파의 서재오보다 배분이나 무공 수위가 더 높은 고수들이었다.

실책을 깨달은 팽무빈이 포권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말을 마친 팽무빈은 한빈 일행에게 그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곤륜에서 오신…….”

소개가 끝나자 팽무빈은 한빈의 뒤에 있는 홍칠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분은 누구신지…….”

팽무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분은 제 사부님이십니다. 저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때 정화 부인이 한빈의 말을 끊었다.

“됐으니, 어서 비무나 진행하자꾸나.”

한빈의 것이라면 털끝 하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순간 홍칠개의 눈썹이 팔자 모양이 됐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한빈만이 보이지 않게 웃을 뿐이었다.

* * *

한 시진 후.

약속된 비무 시간이 되자 모두는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연무장 가운데에는 미리 대기하고 있는 한빈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피곤한 이유는 홍칠개 때문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홍칠개는 여러 조언을 했다.

조언 대부분은 화산파의 검을 상대하면서 새겨야 할 주의 사항이었다.

하지만, 전생에 수없이 화산파의 도인들과 칼을 맞대 본 한빈에게 그것은 쓸데없는 참견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새벽부터 구걸십팔보를 펼쳐 보라고 보채는 홍칠개 때문에 잠도 설친 한빈이였다.

한빈은 사부가 적인지 아군인지 고민해 봐야 했다.

만약 홍칠개의 말대로 새벽에 구걸십팔보를 펼쳤다가는 지금 공력이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한빈이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본 곤륜의 이진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강북 오대세가의 체통이 있지, 참 너무하는군요.”

“그러게 말이네. 만일 우리 점창파라면 한 보름은 면벽수도 해야 할 것이야.”

점창의 원로 정창명이 맞장구치자 그 옆에 있는 정화 부인이 속삭였다.

“저게 팽가의 본모습이라고 생각지는 마세요. 사실 팽가에서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아픈 손가락이지요.”

정화 부인은 속삭이듯 말했으나 그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고의로 주변 사람이 들으라는 듯했다.

또한 그녀의 말투에서는 이 승부가 이미 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묻어났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정화 부인의 측근도 고개를 끄덕였다.

측근이 봤을 때도 이 비무에서 승자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매화검수가 어디 딱지치기로 얻을 수 있는 허명이던가?

화산파는 매화검수를 뽑는 것에만큼은 조금의 양보도 없었다.

서재오가 화산파의 돈줄이기는 해도 실력만큼은 진짜라는 얘기였다.

정화 부인과 같이 온 고수들도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허, 알겠습니다.”

점창파의 원로 정창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화산파의 서재오가 한빈의 앞에 서서는 두리번거렸다.

이제는 비무가 시작되어야 할 때.

참관인으로 오기로 한 팽대위를 찾는 것이었다.

그때 연무장 가장자리에서 곰만 한 덩치가 솟아올랐다.

하늘로 솟구친 덩치는 정확히 한빈과 서재오의 중간으로 떨어졌다.

쾅!

연무장의 먼지가 휘날리자 모두는 소매로 입을 막았다.

먼지가 걷히자 그곳에는 팽대위가 거도(巨刀)를 어깨에 걸쳐 메고 서 있었다.

“내가 좀 늦었네. 업무가 바빠서 말이지. 이런다고 월급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내가 바빠서 그러니 빨리 시작하지.”

말을 마친 팽대위가 그들로부터 몇 걸음 물러나며 거도를 땅에 찍었다.

쾅!

그 울림이 끝나기도 전에 팽대위가 내공을 담아 외쳤다.

“이제부터 비무의 규칙을 말하겠다. 첫째, 친선 비무임을 잊지 말고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말 것. 둘째, 상대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거나 장외로 물러나면 비무는 즉시 중단한다. 셋째, 무기와 초식은 자유다. 이제부터 비무를 시작한다!”

말을 마친 팽대위는 옷자락 끄는 소리만 남기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이제 연무장 가운데에 한빈과 서재오만 남은 상태.

서재오가 싱긋 웃으며 검을 잡은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 검의 이름은 매화삼경이라 한다. 봄에 꽃눈을 틔우는 매화와 여름에 만개한 매화, 가을에 향기를 숨긴 매화의 모든 기운을 불어넣은 검이며 길이는 삼 척하고도 칠 촌이다. 수많은 무림 공적이 내 검 매화삼경에 목이 떨어졌지.”

실제 매화삼경의 검집에는 화산파의 풍경이 음각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검은 만금 전장에서 천금을 투자해 만든 보검이었다.

말을 마친 서재오가 검을 뽑았다.

스릉!

동시에 눈부신 검날이 예기를 발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한 가지 질문 있소. 물어봐도 되오?”

“말해 보아라.”

“검의 길이가 잘못된 것이 아니오?”

“내 검 매화삼경은 분명히 삼 척하고 칠 촌이다.”

“내가 보기에는 세 치를 더해야 계산이 맞는 것 같소만.”

“세 치라? 그게 무슨 말이지?”

“세 치 혀를 그렇게 잘 놀리니, 검의 길이에 혀의 길이를 더하는 것이 올바른 계산법 같소.”

순간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비무에서 격장지계를 쓰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입으로 상대를 이길 수 있다면 뭔 짓이든 못 할까?

하지만, 한빈의 격장지계는 차원이 달랐다.

비무를 관전하던 곤륜의 이진명이 속삭였다.

“마치 시정잡배 같군요.”

“하북팽가가 사파였나?”

점창파의 원로 정창명도 맞장구쳤다.

그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한빈을 바라봤다.

허여멀건 얼굴에 밋밋한 태양혈.

아무리 봐도 고수의 풍모는 보이지 않았다.

굳이 말하면 서생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외모였다. 그런데 저렇게 저렴한 말을 늘어놓는다니!

사파가 와도 저리는 안 할 것이었다.

하지만, 한빈의 도발에도 서재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화산파 매화검수의 말석이긴 하나 서재오는 무림 공적의 목을 벤 것만 열 번이 넘는다.

그동안 순순히 목을 바친 악적이 어디 있으랴.

모두 한빈처럼 마지막까지 악을 썼다.

한빈의 이런 태도는 두려움을 숨기기 위함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도 잠시, 서재오의 시선이 한빈의 입꼬리에 멈췄다.

자신을 얕보듯 웃고 있는 한빈의 표정을 보자 이상하게 부아가 치밀었다. 그만큼 지금 한빈의 표정은 얄미웠다.

‘단번에 박살 내 주리라!’

서재오는 가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 검도 소개해야겠군.”

한빈이 검을 뽑았다.

스릉.

월아가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여인의 나신처럼 잘빠진 검신은 모두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꿀꺽!

모두가 침을 삼킬 때 한빈이 말했다.

“내 검은 월아. 길이는 재 보지 않아 모르겠고. 멍청이를 마주하면 이렇게 예기를 발하지.”

한빈의 말에 저 멀리서 웃음이 터졌다.

풋!

그것은 멀리서 이 비무를 지켜 보고 있는 맹호사대와 장자명의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입을 막고 표정을 굳혔다.

한빈의 상대인 서재오의 무위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심미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오는 초절정 고수잖아요. 우리 주군의 경지를 아는 분 계신가요?”

“일류?”

고개를 갸웃하며 답한 사람은 소대섭이었다.

모두가 소대섭을 바라봤다.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던 소대섭이 말했다.

“우리랑 같은 일류 맞잖아? 그럼 절정인가? 안 그래? 심 부대주.”

“제가 알기에는 잘해야 절정일 거예요. 제 말은 절정하고 초절정하고 싸우면 절정이 이길 가능성이 있냐는 말이에요.”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심 부대주, 그건 무로 칼을 베는 것과 같잖아.”

“그럼, 우린 어떻게 해요? 주군이 우리 돈줄이고 밥줄이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나?”

“말리긴 힘들어도 응급처치는 잘해야 할 것 같아요.”

심미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전속 의원 장자명에게 모였다.

시선을 받은 장자명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오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 같은 느낌에 한숨을 내쉬었다.

“휴.”

진한 한숨을 토해 낸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백독곡에 두고 온 사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돌아가고 싶다.’

그때 첫 번째 합을 알리는 쇳소리가 연무장에서 들려왔다.

챙!

둘이 동시에 달려들어 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매화삼경과 월아가 서로 인사하듯 중간에서 만났다.

끼기긱!

쇠 긁는 소리가 울리자 서재오가 비릿하게 웃었다.

“하하, 승부는 이미 났군. 자네가 내기를 좋아한다지?”

“용케 소문을 들었군요. 후.”

한빈은 첫 번째 합에서 숨이 가쁜지 거친 호흡을 뱉어 냈다.

그 모습에 서재오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지금의 첫 합은 초식이 아닌 내공으로 간을 보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한빈이 자신의 내공을 받아 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화려한 수법으로 이길까를 고민해야 했다.

자극적으로.

가장 처참하게.

이것이 오늘 서재오의 목표였다.

“이 승부에 그 검을 걸 수 있는가?”

“제가 월아를 걸면 무엇을 거시렵니까?”

“내 매화삼경을 걸지.”

“부족합니다.”

“그럼 무엇을 원하나?”

“매화검수의 패도 주십시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동시에 서재오는 내공을 불어넣은 검으로 한빈을 튕겨 내며 뒤쪽으로 물러났다.

본격적인 초식 싸움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였다.

멀리 튕겨 난 한빈이 쿨럭하고 피를 쏟았다.

한빈의 턱을 타고 묽은 피가 흘러내린다.

주르륵.

한빈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퉤.

탁!

내장 조각으로 보이는 붉은 덩어리가 연무장 위에 떨어졌다.

한빈은 동시에 지지 않겠다는 듯이 악다구니를 쓰며 외쳤다.

“매화 패를 못 거는 걸 보니 쫄리시는군요.”

“내가?”

“망설이는 것을 보면 이 승부에서 질 수도 있다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한빈의 말이 맞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