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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67화 (67/621)
  • 67화. 혈랑공자 (1)

    잔 속의 차가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출렁였다.

    마치 그녀의 요즘 심정과도 같았다.

    한빈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하북의 후계 구도는 첫째 공자와 둘째 공자로 추려져 있었다.

    사실 한빈이 팽가의 칼을 받았을 때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첫째와 둘째만의 경쟁이 너무도 지루하기에 잔잔한 호수 위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놓는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돌멩이가 호수 위에 뛰놀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때 삼 층 입구의 문이 열렸다.

    스르륵.

    문으로 들어온 사내의 소매에는 곤륜파를 나타내는 구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어서 다른 이들도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어느덧 정화 부인이 앉은 큰 탁자에는 꽤 많은 이들이 모였다.

    정화 부인은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잔을 든 채 일어나 모인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남정가의 변화를 위해 이렇게 자리해 주신 분들께 제가 한 잔 올릴게요.”

    잔을 든 정화 부인의 목소리는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달콤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독사처럼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바로 표정을 감췄다.

    정화 부인이 잔을 올리자 모두가 잔을 들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느새인가 자리한 예인들의 칠현금 소리가 흥을 돋웠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 선풍도골의 중년이 입을 열었다.

    “하남정가도 이제 바뀔 때가 된 거지요.”

    말한 이는 곤륜파의 일대제자 이진명이었다.

    그는 하남정가에 묵고 있는 빈객(賓客)이었다.

    “도장,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드려요.”

    “별말씀을요.”

    이진명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이번에는 하얀 무복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었다.

    “하남정가를 위해서 그리고 미래의 가주를 위해서 한 잔 올리겠습니다.”

    잔을 든 사내의 가슴에는 점창파를 나타내는 문양이 선명했다.

    그는 점창파의 원로인 정창명.

    그의 말에 정화 부인이 손을 저었다.

    “가주라니 당치 않습니다. 아직은 먼 이야기이지요.”

    “앞으로 일이 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리 말해 주니 고마워요.”

    정화 부인이 작게 고개를 숙이자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일까?

    정화 부인은 하북팽가에 빈객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사람을 심어 놓았듯 하남정가에도 자신의 사람을 심어 놓았던 것이다.

    그녀의 첫 번째 목표는 사실 하북팽가가 아닌 하남정가였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일찌감치 하남정가에 자신의 사람을 대거 추천해 자리 잡게 했다.

    그리고 이곳 다루는 그녀의 야망을 이뤄 줄 전초기지가 됐고 말이다.

    그 후 그들은 정치적인 얘기는 쏙 빼고 가벼운 이야기만을 나눴다.

    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그녀가 모두를 보며 말했다.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니 일주일 후에 하북팽가로 방문해 주시지요.”

    정화 부인이 잔을 들자 곤륜파의 이진명이 말했다.

    “무슨 좋은 구경거리가 있습니까?”

    “제가 하북팽가의 검을 보여 드리지요.”

    “하북의 검이라?”

    “하북의 검은 과연 호랑이를 닮았을까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닮았을까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팽가의 도라면 호랑이의 용맹함을 떠오르지만. 검이라면 생소합니다. 내 꼭 가서 견식을 넓히겠습니다.”

    이진명이 잔을 들자 모인 이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웃음 때문일까. 장하의 물결은 오늘따라 유난히 넘실거렸다.

    * * *

    일주일 후 천수장.

    새벽부터 연무장 가운데에 서 있는 한빈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 헉!”

    얼굴이 하얗게 질리도록 무공을 펼친 한빈보다 더 하얗게 질린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홍칠개였다.

    “네가 지금 구걸십팔보를 극성까지 펼친 것이냐?”

    홍칠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홍칠개가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가까이 됐다.

    그동안 홍칠개와 한빈 사이에는 수많은 신경전이 펼쳐졌다.

    홍칠개가 한빈에게 매듭을 준 이유는 간단했다.

    매듭을 맨 진짜 거지에게만 개방의 비기를 전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개방 최고의 장법인 청룡십팔장(靑龍十八掌)도, 개방이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병기술인 타구봉술(打狗棒術)도 말이다.

    개방 최고의 무공을 미끼로 내놓았지만, 한빈은 모두 거절했다.

    물론 한빈에게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거지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고, 둘째는 한빈에게는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절세신공이라 할 수 있는 용린검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무공을 전수하는 일은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개방 최고의 경신술이자 보법이라 할 수 있는 구걸십팔보였다.

    그 보법만큼은 개방의 방도가 아니더라도 전수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구걸십팔보는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가르쳐 봐야 고작 일 성이나 이 성 정도의 경지에 머무는 것이 다였다.

    홍칠개도 거지 인생 육십 년 만에 펼칠 수 있는 것이 구 성의 경지였다.

    그렇다면 과연 구걸십팔보의 최고 단계는?

    그것은 구걸십팔보의 창시자인 장칠공밖에 모른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극성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것도 구걸십팔보를 전수한 것이 어제였다.

    하루 만에 극성이라?

    이건 둘 중 하나였다.

    한빈이 진짜 거지의 운명을 타고났든가 아니면 장삼봉이나 달마대사도 울고 갈 무공의 천재이든가 말이다.

    홍칠개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헉헉거리면서도 허허롭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홍칠개의 눈에는 모든 것을 초월한 도인처럼 보였다.

    물론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용린검법의 비급이었다.

    어제 홍칠개에게 구걸십팔보를 받은 후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용린검법에 새로운 장이 추가된 것이다.

    [융합편(融合篇)]

    융합편의 설명은 간단하다.

    용린과 어우러질 무공을 전수받는다면 용린검법의 구결을 사용할 수 있다.

    해당 무공에 대해서는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서 생략한다.

    그러고는 아래에 구걸십팔보가 떡하니 자리 잡았다.

    [구걸십팔보 – 개방 최고의 경공술. 용린의 기운을 담고 있는 무공입니다. 용린검법의 구결 중 속(速)을 사용하여 효과를 높일 수 있습니다.]

    속의 구결을 사용해 구걸십팔보를 펼친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다.

    바람에 실린 낙엽처럼 가볍고 번개처럼 빨랐다.

    몸의 무게를 느낄 사이도 없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으며 생각보다 발이 먼저 움직이는 경지였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속의 구결 열 개를 사용하자 일각이 지난 후 몸이 현저히 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느려진 것이 아니라 용린검법의 속을 얻기 전 상태가 되었다.

    [속(速) : 공(空)]

    속의 구결은 지금 완전히 비어 있는 상태.

    한빈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용린검법 기본편 구결들은 각각 열 개.

    과연 그 구결들은 각각 열 개가 한계일까?

    정파 백대고수 안에 들기 위한 최소 내공은 일 갑자.

    그렇다면 공(功)의 구결만 해도 최소 육십 개까지는 늘어나야 했다.

    응용편 인급 구결의 획득으로 기본편의 책장이 간략화된 것은 다음 확장을 위한 포석이라 생각했다.

    그 한계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구걸십팔보에 속의 구결을 모두 쏟아 넣어 봤다.

    결론은 실패.

    극도의 피로감만 쌓일 뿐이었다.

    홍칠개가 한빈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제자야.”

    “네, 사부님.”

    “혹시 내가 준 매듭은 버리지 않았지?”

    홍칠개는 내심 기대하는 눈치로 바라보자 한빈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제 방 어디엔가 있을 겁니다.”

    “허허, 고얀 놈 같으니라고, 내가 이 정도로 네게 정성을 쏟았으면 멋으로라도 허리에 차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그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습니다.”

    한빈은 깊숙이 포권한 후 재빨리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홍칠개의 표정과 말투는 다소 위험했다. 한빈을 진짜 거지로 만들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홍칠개가 한빈을 따라가며 외쳤다,

    “제자야, 같이 가자!”

    * * *

    다음 날 아침.

    한빈은 연무장이 아닌 처소 앞 평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모습에 홍칠개가 물었다.

    “제자야. 어제 펼쳤던 구걸십팔보를 한 번 더 보여 줄 수 있겠느냐?”

    한빈이 감았던 눈을 떴다.

    “스승님.”

    “왜 그러느냐? 제자야.”

    “죄송하지만, 운기조식 중에는 말을 걸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허허, 그냥 눈만 감고 있었던 것이 아니더냐? 내 눈에는 어떤 기도 느껴지지 않거늘.”

    “운기조식에는 기를 순환시키는 것보다 명상이 더 중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명상 대신 수련으로 하면 안 되겠느냐?”

    “그럼, 청룡십팔장이라도 내놓으시든가요?”

    “그것이면 되겠느냐?”

    “진짜 주시렵니까?”

    “내가 준 매듭만 찬다면야 청룡십팔장이 아니라 타구봉술도 전부…….”

    한빈이 홍칠개의 말을 끊었다.

    “그건 싫습니다.”

    한빈이 손을 내젓자 홍칠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 신경전이 시작된 것이다.

    누가 보면 사부와 제자의 관계가 아닌 저잣거리에서 상인과 손님이 흥정하는 모습이다.

    그것을 옆에서 보던 장자명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물론 그 옆에는 심미호와 소대섭도 있었다.

    모두의 표정은 판화를 찍어 놓은 것처럼 같았다.

    아무리 임시 사제 간이라지만, 이건 무림의 법도에서 완벽히 어긋났다.

    모두가 한빈과 홍칠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홍칠개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네 무공을 보여 줄 마음이 생긴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그럼 어서 펼쳐 보아라.”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이 아니라고?”

    홍칠개가 고개를 갸웃할 때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한빈은 그 모습에 씩 웃었다.

    누군지 감이 잡힌 것이다. 저렇게 방정맞게 뛰어올 자는 이곳에 철노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먼지구름이 걷히자 철노가 숨을 몰아쉬며 한빈 앞에 섰다.

    “공자님, 드디어 왔습니다.”

    “드디어 왔구나!”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홍칠개가 물었다.

    “대체 무엇이 왔다는 것이냐?”

    “화산파의 매화검수가 저와 검을 나누기 위해서 왔습니다.”

    “오호라.”

    홍칠개가 눈을 빛냈다.

    그때였다.

    장삼과 조호의 안내를 받은 팽무빈의 일행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원래 화산파의 서재오와 참관인으로 약속된 팽대위만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원이 제법 많았다.

    가만 보니 곤륜의 무복도 보이고 점창의 무복도 보였다.

    게다가 가장 뒤에 오는 것은 정화 부인이었다.

    마치 무림의 배분으로 찍어 누르기 위해 깔아 놓은 병풍 같았다.

    배분이라?

    한빈은 피식 웃으며 힐끔 홍칠개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개방 원로 무제자 홍칠개의 모습은 없었다.

    하얀 무복을 차려입은 선풍도골의 노인이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그들은 홍칠개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한빈은 ‘아니다’에 말린 무말랭이 한 봉지를 걸 수 있었다.

    그때 그들의 행렬이 한빈의 앞에 도착했다.

    가장 뒤쪽에 서 있던 정화 부인이 앞으로 나오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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