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66화 (66/621)
  • 66화. 임시 제자 (3)

    한빈이 계약서를 가져온 이유는 간단했다.

    한곳에 묶여 있기 싫은 홍칠개의 성격 때문이다.

    사제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이곳에 계속 머물 홍칠개가 아니었다.

    한빈은 일정 기간 동안만 홍칠개가 필요했다.

    계약서도 그에 맞춰 썼고 말이다.

    홍칠개는 처음에는 귀 기울여 들었지만, 나중에는 듣는 듯 마는 듯 한빈의 설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사실 처음에는 천천히 설명해서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속도를 더해 갔다. 급기야는 빠른 속도에 사람들은 내용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한 가지였다.

    서로 둘 중 하나가 계약을 파기하고 싶다면 이건 종이 쪼가리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방아깨비처럼 자동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설명을 끝낸 한빈이 종이 끝을 가리켰다.

    “서명하시죠.”

    “여기에 서명하면 되겠느냐?”

    “네.”

    “그런데…….”

    홍칠개가 다시 망설이자 한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이것도 넣었습니다. 수습.”

    한빈이 계약서 한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갸웃한 홍칠개가 재빨리 물었다.

    “수습이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이냐?”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는 기간을 수습이라고 합니다. 그 기간은 삼 개월이고요.”

    “그런 말이 있었느냐?”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 부분입니다. 만약에 사부님 눈에 제가 안 들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사부님께선 강호에서 눈이 높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불민한 제자가 사부님의 뜻에 어긋날까 두렵습니다.”

    한빈의 추가 설명에 살짝 의심하던 홍칠개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허, 하긴 그렇지…….”

    홍칠개가 말끝을 흐렸다. 이건 제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부인 자신을 배려한 것이었다.

    진작 이런 제도가 있었다면 제자를 편하게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사삭.

    홍칠개는 활짝 웃으며 서명했다.

    “여기도 같은 내용입니다. 이곳에도 서명을…….”

    홍칠개와 한빈은 두 장의 계약서에 나란히 서명했다.

    계약서를 나눈 후 한빈은 미소를 피우며 종이를 펄렁거리며 말렸다.

    모든 것이 정리되자 한빈은 계약서를 소대섭에게 넘겼다.

    “이건 잘 보관해 주시고.”

    “알겠습니다, 주군.”

    모든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소대섭은 자신도 모르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계약서를 건네받은 소대섭은 조심스럽게 계약 사항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헉.”

    “왜 그래요, 소대섭 대주님?”

    “잠시, 시간 좀 내줘야겠어. 심 부대주.”

    소대섭의 표정이 묘하게 비장했다.

    잠시 후.

    홍칠개가 장삼의 안내를 받아 짐을 풀기 위해 방으로 사라지자 소대섭이 계약서를 펼치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주군에게 마구니가 낀 것 같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말도 안 되는 계약서란 말이야. 말이 사제 계약서지 이건 노비 문서에 가깝다네.”

    “노비 문서요? 누가 노비인가요? 혹시 주군이?”

    “그럴 리가 없지.”

    소대섭이 고개를 힘없이 흔들자 심미호도 한숨을 쉬었다.

    “휴, 내가 보기에 주군이 사고 친 것 같은데요.”

    “문제는 우리도 공범이라는 점이지.”

    소대섭은 자신도 모르게 천장을 올려다봤다.

    * * *

    다음 날 아침.

    천수장의 연무장에는 홍칠개가 말끔한 복장으로 서 있었다.

    거지 인생 육십 년 만에 처음으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홍칠개는 뭔가 부자연스러운지 옷을 계속 만졌다.

    “흠, 아무래도 원래 옷을…….”

    “안 됩니다. 사부님.”

    “어허, 나는 괜찮대도.”

    “아닙니다. 사부님, 스승을 제대로 모시는 것은 제자의 도리. 이곳에 머무는 동안이라도 최고로 모시고 싶습니다.”

    “어허, 이거 참.”

    홍칠개는 수염을 쓸어내렸다. 옷이 날개라고 했던가 그런 홍칠개의 모습은 득도한 도인 같았다.

    뭐, 화산이나 무당에서 내려온 도인이라고 해도 백이면 백 속아 넘어갈 분위기였다.

    한참을 못마땅한 듯 옷을 살피던 홍칠개가 말했다.

    “너는 마지막 시험에서 합격했다.”

    “네? 마지막 시험이라니요?”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홍칠개를 어제 한빈과 나눴던 계약서를 꺼냈다. 그러고는 한빈의 앞에 내밀었다.

    한빈은 굳이 그 계약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홍칠개의 행동이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피식 웃으며 손에 들렸던 서찰을 바라봤다.

    동시에 서찰에 불이 화르르 붙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심미호가 입을 벌렸다.

    “삼매진화!”

    초절정 중에도 최상급에 들어서야만, 펼칠 수 있다는 기술이었다.

    홍칠개가 주변에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진정한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하셨다는 거지요. 계약은 종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요.”

    “그래, 영특하구나. 나는 인의예지신을 모두 갖춘 제자를 찾으러 이제껏 돌아다녔다. 하지만, 내가 진짜 찾는 인재는 거기에 하나를 더 갖춰야 함을 어제야 깨달았다.”

    “그게 무엇인지요?”

    “그것은 사(邪)다.”

    “제가 아둔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 척하지 말거라. 나는 내 제자가 어디에서 지는 것도 싫고 어디에서 뒤통수 맞는 것도 싫다. 어제 계약서를 살펴봤더니 너는 어디에서 맞고 들어올 놈은 아니더구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질 싸움은 걸지도 않겠지.”

    “그럼 저도 답을 드려야겠습니다.”

    한빈도 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바로 계약서를 허공에 날리자 바람에 둥실 뜨며 어디론가 날아가려 했다.

    동시에 허리에 찬 월아를 뽑았다.

    스릉!

    ‘전광석화.’

    ‘일촉즉발’

    한빈이 날아가는 종이를 공중에서 그었다.

    반으로 잘린 계약서를 다시 긋자 네 등분이 되었다.

    한빈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계약서를 먼지로 만들었다.

    순간 홍칠개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린 나이에 성취가 대단하구나. 대단해!”

    “아, 그렇습니까? 저는 잘…….”

    한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홍칠개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계약의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뭐, 굳이 말하면 홍칠개가 원하던 바를 모두 행했던 한빈이였다. 물론 전생의 기억에 있던 내용이었다.

    홍칠개의 마음을 얻은 것일까?

    한빈은 그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의 호기심을 얻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홍칠개는 당분간 이곳에 남을 것이다.

    그의 호기심이 해결된다면?

    그때가 오면 그는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것이다.

    한빈이 생각하는 유효기간은 최소 육 개월.

    그 정도면 한빈도 만족했다.

    한빈의 표정을 본 홍칠개가 말했다.

    “개방은 구대문파처럼 기명제자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주는 매듭을 허리에 차면 개방의 방도가 될 것이며 안 찬다고 해도 너는 내 제자다. 다만, 개방의 방도로서 권리가 없을 뿐이지.”

    “그 권리가 무엇입니까?”

    “빌어먹을 권리지.”

    “그럼 저는 매듭을 안 받겠습니다.”

    한빈이 작게 고개를 숙이자 홍칠개가 웃었다.

    “그래도 받아라. 이건 내 선물이니.”

    홍칠개가 오른손을 뻗었다.

    휙!

    매듭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한빈이 그것을 가볍게 잡았다.

    매듭을 확인한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붉은 매듭이었다.

    붉은 매듭은 비루하게 태어났지만, 천수를 누리라는 의미에서 주는 개방의 첫 번째 매듭이었다.

    한빈은 그것을 품 안에 넣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홍칠개는 처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여 있던 이들은 할 말을 잃었다.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심미호였다.

    “주군,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심 부대주, 왜 그래?”

    “어제 분명히 무제자 어르신께 사기를 쳤잖아요.”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어젯밤 눈치채신 것 같은데 화내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는 게 이상해서요.”

    “아마, 내가 먼저 찌르지 않았으면 내 뒤통수를 쳐서라도 날 시험할 양반이야.”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뭐, 칼 밥 먹는 사람들 습성이 다 비슷하지.”

    “…….”

    심미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때 한빈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심미호에게 내밀었다.

    “이건 잘 보관해 둬.”

    “이게 뭔가요?”

    “계약서.”

    “무슨 계약서요?”

    “에이, 심 부대주 왜 그래? 꼭 무림 초출 같잖아.”

    “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

    “그럼 펴 봐.”

    한빈의 말에 슬쩍 서찰을 확인한 심미호의 눈이 커졌다.

    “이건 사제 계약서잖아요. 그런데 그 계약서는 아까 공중에서…….”

    심미호는 아까의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허공과 계약서를 번갈아 바라봤다.

    “심 부대주. 원래 강호에서는 정에 휩쓸리는 순간 끝이야. 내게 유리한 건 끝까지 가져가야지. 아마 무제자 어르신도 계약서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어제 밤잠을 설치셨을 거야. 힘으로 누르면 해결되지만, 갖고 싶은 걸 포기할 수도 없는 성격이거든. 어르신이야 힘으로 언제든 판을 뒤집을 수 있는 분이고 나 같은 피라미는 끝까지 유리한 걸 놓치면 안 되는 거야.”

    말을 마친 한빈은 홍칠개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피식 웃었다.

    심미호는 힐끔 고개를 돌려 소대섭을 바라봤다.

    둘은 눈빛을 교환했다.

    심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소대섭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감동이 깨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 대주와 심 부대주는 내가 공중에서 조각낸 서찰의 내용 못 봤지?”

    “주군, 그걸 어떻게 봅니까?”

    소대섭이 화들짝 놀라 답하자 한빈이 웃었다.

    “하하. 무제자 어르신은 봤을 거야. 그러고 보니 임시 제자를 들였으니 이제 별호를 바꾸셔야 하나?”

    한빈의 말에 소대섭은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부터 종종 자신이 하룻강아지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오늘도 그런 기분이었다.

    같은 시간 철노의 안내를 받고 식당으로 향하던 홍칠개도 자리에서 멈춰 자신이 걸어온 뒤쪽을 바라봤다.

    물론 그곳에는 한빈이 있을 것이었다.

    인의예지신을 겸비한 탐나는 인재를 얻었지만, 지나치게 똑똑했다.

    특히 지(智)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오늘따라 과유불급이라는 단어가 그리 와닿을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첫인사치고는 적당했고 일단 여기에 머물며 한빈에 대한 호기심부터 푸는 것이 먼저였다.

    홍칠개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때 철노가 물었다.

    “어르신.”

    “왜 그러나?”

    “원래 스승과 제자는 닮는 건가요?”

    생뚱맞은 질문에 홍칠개는 눈매를 좁혔다.

    “그게 무슨 말인가? 철노.”

    “우리 공자님이랑 어르신의 표정이 똑 닮아서 그러죠. 신기하네요.”

    “허허.”

    홍칠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욕인지 칭찬인지 판단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홍칠개는 걸음을 옮겼다.

    * * *

    삼 주 후, 하북의 남단에 위치한 다루.

    이 다루는 하북에서 꽤 유명한 다루였다.

    하북과 하남의 경계에 있는 장하(章河)가 흐르고 멀리는 정문산이 보였다.

    마치 좌로는 청룡이, 우로는 백호가 서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수려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는 다루.

    이곳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하북팽가의 둘째 부인인 정화 부인이 운영하기 때문이었다.

    본래 이 다루는 하남정가의 소유.

    하지만, 하남정가의 가주는 집을 떠난 딸에게 이곳을 넘겼다.

    하북의 사람이 될 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하남정가의 가주는 생각했다.

    오늘은 정화 부인이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날이었다.

    그녀가 앉은 곳은 다루의 최상층인 삼 층.

    그녀는 오늘 그곳에 어느 손님도 받지 않았다.

    정화 부인은 멀리 흐르는 장하를 바라보며 찻잔을 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