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임시 제자 (3)
한빈이 눈매를 좁히자 홍칠개는 뒷걸음치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여기 구걸하러 온 건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 잠시 왔단다.”
“물어보세요, 거지 할아버지.”
“그런데, 거지는 좀 빼 주면 안 될까?”
이것은 진심이었다.
개방이 거지의 집단이 맞지만, 한참 어린 한빈에게 거지, 거지 하며 반복해서 들으니 왠지 기분이 상했다.
사실 이런 기분도 처음이었다.
뭔가 감정이 꼬여 가는 기분.
딱 그것이었다.
그때 쉴 틈 없이 한빈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할아버지 거지 아니에요?”
“그건 아니지만…….”
“개방이면 거지 맞잖아요.”
“아, 그게 사실의 문제가 아니고 느낌의 문제라고 할까.”
“그럼 홍칠개 할아버지라고 불러 드릴까요?”
“그러니까……. 좋지, 좋아. 험.”
홍칠개는 다시 헛기침으로 말을 맺자 한빈이 눈을 빛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신 거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는 단어에 홍칠개의 표정이 봄날 햇살이 비춘 듯 포근해졌다.
한빈을 멍하니 보고 있던 홍칠개는 여기 온 이유가 떠올랐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듯 서 있는 한빈을 보자니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물어야 했다.
이것을 물어보지 않으면 오늘 밤은 꼬박 새울 것 같았다.
긴 침묵 끝에 홍칠개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너의 무공 수위가 알고 싶단다.”
조금은 추상적인 질문이었다.
한빈은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한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무공이요?”
“그렇다.”
홍칠개는 오뚝이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옆에 있던 조호가 입가가 실룩대기 시작한 것이다.
“흠, 컥. 아니, 공자님은 무공보다는…….”
물론 사기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조호는 작게 웃었고 장삼은 사레들린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에 홍칠개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왜 그리 웃는가?”
그 물음에 장삼과 조호가 동시에 입을 막았다.
눈앞에 있는 홍칠개가 누군지 다시 떠올린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백대고수!
실수를 깨달은 조호는 자신도 모르게 검집을 잡고 있던 손을 떨었다.
덜덜덜.
게다가 자랑할 일이 아니라 수하가 된 도리로 답할 수도 없었다.
장삼과 조호가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제가 마음이 약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무장에도 못 나가다가 최근에서야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거든요.”
홍칠개의 눈이 커졌다.
“무공을 최근에 익혔다고…….”
“뭐, 쉽게 말해서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마음이 약해도 너무 약했던 거죠.”
“어허, 그런 일이.”
“소림의 대환단을 먹어도 고치지 못하는 마음의 병이라 들었습니다.”
한빈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남의 이야기를 하듯 이어 나가는 한빈의 설명에 홍칠개는 자기 일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불행한 일이……. 휴.”
한숨은 복잡한 홍칠개의 심정을 대변했다.
한빈이 보인 재능은 뭐란 말인가?
홍칠개는 뭔가 꼬여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 병이란 게 피만 보면 기절하는 거였는데, 최근에 그 질병이 씻은 듯 나왔습니다.”
“오, 잘된 일이구나.”
홍칠개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개방의 정보를 맞춰 보니 이제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살기가 전해졌다.
그 살기를 타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일-입니까?”
냉랭한 말투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정문 안쪽으로 고정되었다.
그곳에는 소대섭이 박도를 들고 살기등등하게 서 있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얽혔다.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서로에게 떠넘기는 분위기다.
그 모습에 한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내가 설명할게. 소 대주.”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군, 또 사고를 치신 겁니까?”
“아, 소대주도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그래. 이분은 그냥 길 가다 만난 할아버지야.”
“정말입니까?”
소대섭이 눈매를 좁히자 한빈은 가슴을 탁탁 쳤다.
“날 못 믿는 거야? 소 대주.”
“아, 아닙니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소대섭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억!”
비명에 이어서 심미호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주군을 보필하고 있는 심미호라고 합니다. 우리 주군과는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심미호 덕분에 분위기가 반전되자 홍칠개는 그제야 한 발 다가서서 포권했다.
“나는 개방의 장로인 홍칠개라 하네. 사실, 내가 오늘 한빈이에게서 재능을 본 것 같아서 염치를 무릅쓰고 이리 오게 됐었네.”
홍칠개의 소개에 소대섭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럼, 무제자 어르신입니까?”
“그렇다네.”
“후배 소대섭. 무제자 어르신께 인사드립니다.”
소대섭이 깊이 포권하자 홍칠개가 손을 내저었다.
“모든 게 허명이네. 그런데 막내 공자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인가?”
“아, 그러니까…….”
소대섭은 한빈과의 관계를 적절히 양념을 쳐 가며 늘어놓았다.
소대섭은 자신과 심미호가 한빈을 모시는 호위이며 돌아가신 한빈의 어미에게 부탁을 받은 보모와도 같은 관계라 설명했다.
거짓과 진실을 오가는 아리송한 설명에 조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여기서 끼어들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 무슨 일이 있어도 소대섭과 심미호의 말에 끼어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호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강북 문파를 넘어서 이제는 구파일방이라는 개방의 원로에게까지 사기를 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소대섭과 심미호까지 합세했다.
힐끔 옆을 보니 장삼의 표정도 똑같았다.
조호의 마음을 아는지 장삼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시받은 대로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들이 어쩔 줄 모르는 사이에도 소대섭은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소대섭의 이야기는 제법 길었다.
그리고 마치 한빈의 앞날에 결정할 권리 중 일부를 위임받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홍칠개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 모습에 심미호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홍칠개 어르신. 그럼 우리 주군을 가르치시고 싶다는 건가요?”
갑자기 훅 들어온 심미호의 질문에 홍질개가 적잖이 당황했다.
제자 욕심에 온 것은 맞았다.
하지만 아직 제자로 확정한 것은 아니었다.
물고 뜯고 맛을 보고도 망설이는 홍칠개였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인다면, 무제자라는 별칭이 괜히 생겼겠는가!
하지만, 부정도 할 수 없었다. 한빈에 대한 호기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홍칠개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왜 오셨나요?”
“재능을 엿본 것 같아서…….”
다시 말끝을 흐린다.
흔들리는 마음과 까다로운 그의 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심미호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럼 제자로 삼고 싶다는 거잖아요?”
심미호가 다시 치고 들어왔다.
“…….”
홍칠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 같았다.
우연히 받은 은화 두 닢.
그리고 기척도 없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청년.
이것이 호기심을 자아내 그를 여기로 이끌었다.
책으로 치면 삼국지 첫 권을 봤는데 상대는 지금 완결 편의 감상을 원하는 것과 같았다.
홍칠개는 한빈을 힐끔 바라봤다.
먼저 출발하긴 했지만, 자신은 개방 최고의 경공인 구걸십팔보를 극성까지 펼쳤었다.
구걸십팔보가 어떤 경공술이던가?
개방 초대 방주인 장칠공이 개방의 방도를 먹이기 위해 섬서를 하루 만에 다 돌며 식량을 조달했다고 하는 전설적인 경공술이었다.
빠르기라면 강호의 어떤 경공술에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저 팽한빈이라는 청년이 먼저 도착했다.
분명 한빈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홍칠개는 그 비밀이 미치도록 궁금했다.
홍칠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로 삼고 싶네.”
이것은 짧은 고민 끝에 나온 진심이었다.
인의예지신을 겸비한 인물을 제자로 삼지 않는다면 대체 누굴 제자로 삼는다는 말인가?
홍칠개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그 진지한 분위기에 소대섭이 끼어들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소대섭이 막아서자 심미호가 눈을 흘긴다.
“왜 그래요? 대주님. 홍칠개 어르신이면…….”
심미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대섭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요?”
“개방 방도의 제자라면 주군도 거지, 아니 개방 방도가 되는 게 아닙니까?”
“아, 그럼 주군이…….”
심미호가 짧은 탄성을 흘렸다.
이어 소대섭이 말을 받았다.
“그럼 주군의 소가주 후보 지위도 상실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는데…….”
그들의 대화를 들은 홍칠개는 끓어오르는 분을 억누르고 있었다.
정파 백대고수인 자신이 이렇게 홀대받은 일이 있던가?
사실 어디에 가더라도 자신을 사부로 모시겠다는 자제들로 줄을 세우면 십 리는 갈 것이었다.
그런데, 강북 오대세가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 하북팽가가 이리 홀대를 하다니.
사실 확인하고 싶었을 뿐 한빈을 무조건 제자로 삼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이리 나오니 자꾸 안달이 나는 홍칠개였다.
자꾸 몰려드는 화에 홍칠개는 심마가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그때 한빈이 나섰다.
“잠시만! 소 대주, 심 부대주.”
“네, 주군.”
심미호가 정중히 포권하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스승이 거지라고 해서 제자가 거지가 될 필요가 있는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주군.”
심미호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묻자 한빈이 지체 없이 답했다.
“황제에게도 스승이 있잖아?”
“그야 그렇지요.”
“그럼 황제가 스승을 모시면 학사가 되어야 하는가?”
“아, 그건…….”
심미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진짜 놀라고 있는 것은 홍칠개였다.
한빈의 반박은 합리적이었다.
거기에 황제를 비유했다.
여기서 황제가 학사가 되어야 한다고 반박하는 순간 불충한 백성이 된다.
홍칠개는 한빈이 인의예지신을 모두 갖춘 인재라 확신했다.
논란을 종식시킨 한빈은 홍칠개를 바라봤다.
한빈이 해맑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할아버지!”
“그래, 맞다!”
말을 한 홍칠개는 다급하게 기억을 떠올렸다.
개방의 방칙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제자 중에 거지 아닌 녀석이 있었던가?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때 홍칠개가 생각할 틈도 한빈이 물었다.
“저를 제자로 삼고 싶다는 거 거짓말 아니죠?”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말은 상고시대부터의 진리란다.”
“그럼 잠깐 기다려 보시죠.”
말을 마친 한빈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차 한 잔 마실 사이에 나타난 한빈은 홍칠개에게 붓과 종이를 건넸다.
“이게 뭔가?”
“사제 계약서입니다.”
홍칠개의 눈이 커졌다.
뭐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조호와 장삼의 눈도 커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제 계약서라는 건 처음 들어 보는군.”
홍칠개의 눈이 살짝 떨렸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말을 더욱 굳히는 게 바로 계약서입니다. 여기에는 제자가 스승에게 할 도리가 적혀 있으며…….”
한빈의 입은 물레방아 돌 듯이 쉼 없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