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임시 제자 (2)
“흠.”
헛기침하는 홍칠개의 얼굴이 벌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착각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거지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당황하고 계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다.”
“왜 말까지 더듬으시고.”
“아니다, 그 제비는 나한테 주거라. 내가 저 위에 올려 주마.”
홍칠개는 뒤쪽 높은 기둥에 있는 제비 집을 가리켰다.
“저기 맞지?”
“네, 맞아요.”
한빈이 웃으며 제비 새끼를 건넸다.
“여기요. 그런데 정말 저 높은 곳에 올려 주실 수 있어요?”
“당연하지.”
“정말이죠?”
“그래, 내가 올려 주마.”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할아버지.”
한참을 가던 한빈이 다시 멈춰 홍칠개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거지 할아버지, 그 제비 잡아먹지는 마세요. 부탁드립니다!”
“험.”
홍칠개의 볼이 다시 달아올랐다.
한빈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뒤돌아섰다.
돌아선 한빈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마치 떡밥을 던진 낚시꾼의 모습이었다.
개방의 홍칠개가 그 떡밥을 물었다.
이번에 그에게 보여 준 것은 그가 제일 강조하던 인(仁)이었다.
한편 멀어져 가는 한빈을 바라보던 홍칠개는 양손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제비 새끼가.
한 손에는 은화 한 닢이 있었다.
재빨리 은화를 품에 집어넣은 홍칠개는 신형을 날렸다.
파박.
팍.
기둥을 밟고 날듯이 솟구쳐 오른 홍칠개는 재빨리 제비 새끼를 제비 집에 넣었다.
휙.
그 모습이 눈에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땅에 내려온 홍칠개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봤느냐?”
하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왠지 아까 봤던 청년이 눈에 밟혔다.
이래저래 당황해서 다 물어보진 못했지만, 기척도 없이 자신의 뒤에 숨는다라?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기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검 면으로 돌멩이를 쳐서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게다가 제비 새끼를 구하려는 측은지심까지?
“하!”
홍칠개는 절로 탄성을 흘렸다.
방금 봤던 소년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모두 갖춘 진정한 인재였다.
물론 확인이 필요했다.
홍칠개는 한빈이 사라졌던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타닥.
한참을 가던 홍칠개는 발길을 멈췄다.
아무리 찾아봐도 한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공을 펼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때 시장에서 가판을 펼쳐 놓은 상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홍칠개는 시장 상인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그러니까 붉은색 무복에다가…….”
홍칠개가 인상착의를 말하자 상인은 대번에 알아채고 답했다.
“아, 하북팽가 막내 공자 말이죠? 하북에서 유명한 최고의 겁쟁이…….”
“유명하다니? 게다가 겁쟁이?”
홍칠개의 눈이 커졌다.
* * *
한빈은 목검을 옆에 끼고 어슬렁어슬렁 천수장의 정문으로 향했다.
천수장까지의 거리는 앞으로 차 한 잔 마실 시간.
오늘도 제법 일찍 도착했다.
물론 이것이 모두 전광석화와 일촉즉발을 적절히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무리했는지 체력이 현저히 줄어 있었다.
[체(體) : 오(五)]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열두 시진만 지나면 모두 회복될 것이니 말이다.
정문에 도착하자 오늘 경비를 맡은 장삼, 조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주군, 괜찮으세요?”
“난 괜찮다.”
한빈이 손을 흔들자 장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한빈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한빈은 그 뜻을 알고 있다.
오늘은 사고 안 쳤냐는 뜻이기에 한빈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장삼, 지금 뭐 하는 건가? 남들이 보면 내가 사고나 치고 다니는 망나니인 줄 알잖아.”
“하하, 제 눈이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주군.”
장삼이 머리를 긁적인다.
물론 장삼의 속마음은 달랐다.
절호곡에서 강북 문파와 세가들에게 삥을 뜯던 모습이 아직도 장삼의 머릿속에 선했다.
덕분에 주군인 한빈의 활약은 반감되었고 말이다.
장삼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절호곡 이전의 한빈의 모습이었다.
걱정스러운 장삼의 모습에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장삼은 얼굴에 표시가 너무 나. 그 표정으로 연애는 못 하겠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이래 봬도 저 앞집에 사는…….”
장삼이 푼수처럼 변명하려 하자 조호가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그건 비밀이잖아요, 아저씨. 비밀로 하고 다리 놔드린 거잖아요.”
“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죄송합니다, 주군.”
“하하, 괜찮다. 조호. 그런 얘기는 언제 고자질해도 난 환영이란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흔들자 장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조호야. 인제 그만하자꾸나. 주군도 쉬셔야지, 자꾸 말을 걸면 안 되지.”
실수를 깨달은 조호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상하게도 한빈과 말을 섞으면 진실이 술술 흘러나왔다.
당황하는 조호의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그래, 그럼 수고하고. 내일 보자고, 제군들.”
한빈이 막 들어가려 할 때였다.
저 멀리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누군가가 달려왔다.
심상치 않은 속도에 장삼과 조호가 박도를 틀어쥐었다.
“주군, 오늘도 사고를 치셨군요. 일단 먼저 들어가세요.”
“네, 이쪽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장삼도 한빈의 앞을 몸으로 막으며 품속에서 뿔피리를 뺐다.
삐-익!
동시에 천수장의 담장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달려 나온 것은 맹호사대의 대주 소대섭이었다.
경공을 펼치며 제비처럼 달려오는 그의 얼굴에서는 올 게 왔구나 하는 근심이 풍겨 나왔다.
소대섭은 속으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외쳤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소대섭은 지금부터 이루어질 경극의 무대에서 중요 인물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 천수장의 경비를 맡은 장삼과 조호는 지금 작전에 대해 모르기에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대할 것이었다.
* * *
드디어 먼지구름이 정문 앞에 멈췄다.
동시에 조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박도를 그대로 앞으로 내밀어 상대를 막았다.
공격은 먼저 안 하겠지만, 더 들어오면 검을 뽑겠다는 표시였다.
자욱했던 먼지구름이 걷히자 한 인물이 나타났다.
조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없어도 너무 없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여기저기 기워진 옷에 표주박 하나를 허리에 끼고 있었다.
영락없는 거지였다.
게다가 눈을 빛내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이상해 보였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고수라는 점이었다.
조호는 침착하게 박도를 거두며 포권했다.
“저는 천수장의 정문을 맡은 조호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귀하의 존성대명을 여쭙고 싶습니다.”
“난 개방의 홍칠개라 하네.”
조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정신을 차린 조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홍칠개 어르신이라면……. 혹시 개방의 장로이시며 정파 백대고수라 하는 바로 무제자 어르신입니까?”
사전에 아무런 정보를 전달받지 않은 조호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조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홍칠개가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홍칠개가 바로 내가 맞네.”
홍칠개의 확언에 조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제야 허리에 차고 있는 매듭이 보였다.
정파 백대고수라? 오랜만에 오는 귀빈이었다. 아니, 오랜만이 아니라 생애 최초였다.
백대고수에 개방 장로. 그의 위치만으로도 몸이 뻣뻣이 굳을 것만 같았다.
조호는 자신이 얼마 전 일류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얼었다.
그때 문득 생각이 났다.
지금 문제는 그가 아군이냐 적군이냐는 것이다.
조호가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홍칠개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현판을 확인했다.
[천수장]
눈을 가늘게 뜬 홍칠개는 얼마 전 하북지부장에게 받은 정보를 떠올렸다.
그것은 천수장이 하북팽가 막내 공자의 손에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아까 상인에게 들었을 때는 존재감 없는 하북의 막내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북 최고의 겁쟁이가 벌이는 이상한 행동들.
그것은 지금 개방에서도 한 단계 오른 정보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 정보를 들었을 당시만 해도 그냥 주화입마에 걸려 행동이 갈팡질팡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 본 한빈은 홍칠개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한참 동안 현판을 응시한 홍칠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북 오대세가 중 하나인 하북팽가!
호부 아래 견자 없다고 역시 호랑이의 자식이었다.
“역시 그렇군, 그래!”
뭔가 알았다는 듯 혼잣말을 뱉은 홍칠개는 자신도 모르게 기세를 뿜어냈다.
천수장의 현판을 보고 더욱 기세를 뿜어내는 홍칠개의 모습에 조호는 더욱 긴장했다.
조호가 이를 꽉 물고 닥쳐올 일을 준비하고 있을 때 홍칠개가 물었다.
“그럼 다시 묻겠네.”
“네, 말씀하십시오.”
“여기가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가 사는 집 맞나?”
홍칠개의 질문에 조호는 세상을 올 게 왔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지만, 우리 주군이 무슨 사고라도…….”
조호의 목소리가 심히 떨렸다.
정파 백대고수의 입에서 막내 공자 이름이 나왔다.
또 사기를 친 것일까?
아니면 개방 방도를 죽도록 팬 것일까?
그도 아니면 홍칠개 공의 지인에게 이상한 노예 계약서를 내민 것일까?
이상하게 주군과 관련된 일에는 좋은 일이 안 떠올랐다.
거기에 이렇게 급히 쫓아왔다면 분명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다.
팽가에 닥쳐올 위기를 상상하며 조호가 어깨를 가늘게 떨 때 뒤쪽에서 해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거지 할아버지!”
이상한 일이었다.
한빈의 목소리는 팽팽했던 긴장의 끈을 단번에 끊어 놓았다.
정파백대 고수에게 저런 호칭으로 대하다니?
조호와 장삼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둘이 의문을 띠고 있을 때 한빈이 옷에 먼지를 털어 내며 홍칠개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때 정신을 차린 장삼이 막아섰다.
“주군, 이 일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장삼, 뭘 처리해?”
“그러니까…….”
장삼은 말끝을 흐리며 한빈과 홍칠개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 어색함에 홍칠개는 연달아 헛기침했다.
“험, 험.”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홍칠개의 앞에 섰다.
“거지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무슨 사두마차도 아니고 왜 그렇게 먼지를 피워 대며 뛰어와요? 저는 마적이 쫓아오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습니까.”
한빈이 앞에 서자 홍칠개는 뿜어내던 기세를 모두 지우고 동네 할아버지처럼 사람 좋은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이것 보세요. 제가 아껴 뒀던 옷인데 먼지 다 묻었잖아요.”
한빈이 소매를 털며 떨어지는 먼지를 가리켰다.
한빈의 말대로였다.
붉은 무복은 황토색 먼지가 묻어 천 리 길을 달려온 적토마 같았다.
그 모습에 홍칠개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분명 경비 무사의 뒤쪽에 있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텐데도 녀석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다.
“미안하구나.”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혹시 돈이 모자라서……. 아, 그건 양심이 좀 없는 거 아닌가요?”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