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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62화 (62/621)

62화. 빈객 전쟁 (3)

자신과 비무를 하려면 성의를 표시하라는 신호 같았다. 한빈이 모른 척 재빨리 답했다.

“죄송합니다, 대협. 제가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화산파의 검과 마주하기에는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서재오를 쭉 훑어봤다.

이건 거지도 이런 거지가 없었다.

물론 복장이 거지라는 것은 아니었다. 한빈이 말한 것은 구결 거지였다.

서재오에게는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한 개도 안 보였다.

사실 한빈은 구결에 목말라 있었다. 서재오에게 점이 하나라도 보였다면 그의 제의를 마다할 리 없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서재오가 미간을 좁혔다.

“사질뻘 되는 자네가 내 비무 제의를 거절한다는 거지?”

살짝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서재오의 말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질뻘이라? 대협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말해 보게. 자네의 행동이 무례하긴 하지만, 사숙뻘 되는 처지에서 들어 주겠네.”

“대협님은 나이보다 배분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럼, 나이보다 중요한 것이 배분이지.”

“그럼, 위 배분에 있는 자가 요청하면 뭐든 수락해야 한다는 겁니까?”

“난 그렇게 생각하네.”

“그럼 맹세하실 수 있습니까?”

“맹세하지.”

“그럼 계약서 하나 적고 가시겠습니까?”

“계약서라?”

서재오가 눈썹을 꿈틀댔다. 계약서라는 단어가 나오자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껄껄!”

모두의 시선이 웃음소리가 나는 쪽을 향했다. 그쪽에서는 집법당주 팽대위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거구의 그가 천천히 한빈과 서재오의 가운데에 섰다.

한빈이 뜨악한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난데없는 등장이었다. 그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도를 하늘 높이 들었다.

일도양단의 기세로 거도를 내리쳤다.

팡!

파공성이 울리며 도풍(刀風)에 한빈의 소매가 날렸다.

거도가 바닥 한 치 앞에서 멈췄다.

그 주변은 마치 청소를 한 듯 먼지 한 톨 남지 않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서재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매화검수인 그의 경지는 초절정 하급이었다. 초절정 상급인 팽대위의 무공을 보고 압도적이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팽대위가 왜 이러냐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한 행동의 의미를 한빈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안하무인인 서재오의 행동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팽대위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도를 바닥에 다시 찍었다.

쿵!

이어서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도가 그대들의 약조를 기억했다.”

짧지만 명쾌한 문장.

하지만, 서재오는 그게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한빈이 나섰다.

“대협, 집법당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간단해요. 나이보다 배분이 중요하다고 한 점, 그리고 위 배분의 사람이 시키는 일을 아래 배분의 사람이 따라야 한다는 점. 그걸 당주님의 칼이 기억했다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집법당주님.”

한빈이 팽대위를 바라보자 그가 입가를 씰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서재오가 팽대위에게 포권했다.

“증인이 되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막내 공자에게 부탁하는 것도 공증을 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말씀해 보시오.”

“저는 막내 공자에게 비무를 청하는 바입니다.”

순간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또 붙나 봐. 와, 이번에도 운이 통할까?”

“아니지, 이번에는 화산파인데, 그깟 운이 통하겠어?”

“또 모르지.”

“그럼 자네는 막내 공자한테 걸 텐가?”

“예끼, 이 사람아. 돈 날릴 일 있어!”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한빈이 답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말씀해 보시게.”

서재오가 사람 좋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자 한빈이 재빨리 답했다.

“비무는 한 달 뒤에 천수장에서 했으면 합니다.”

“난 지금 하고 싶은데.”

다시 서재오의 행패가 시작되자 한빈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제가 지난번 임무에서 중상을 입는 바람에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많이 아픈 모습이었다.

물론 이것은 한빈의 연기였다.

기사회생의 효용으로 상처는 바로 회복되었고 회복의 구결로 인해 흉터까지 없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서재오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는 피하지 않는다고 약조하는 걸세. 남아일언!”

“중천금입니다.”

한빈이 답하며 깊숙이 포권했다.

이것은 연장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다음에 볼 때는 연장자고 나발이고 조금의 양보도 없을 테니 말이다.

뒤돌아서서 가려던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맹호사대 모두가 서재오를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호는 콧김까지 뿜어 대고 있다.

“저 자식 때문에 내일 향이와 약속한 것도……. 흑흑.”

“참자, 참아.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하지 않느냐. 나도 저놈 때문에 딸아이와 못 본다고 생각하니 이가 갈린다.”

소대섭이 맞장구치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오늘부터 화산파 새끼들이랑은 상종을 안 하렵니다.”

“가다가 벼락이나 맞아라!”

오랜만에 하나가 되는 맹호사대의 모습에 한빈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증오도 사랑도 모두 가슴에서 나오는 힘의 근원이었다. 이런 게 쌓여야 험난한 강호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될 것이었다.

* * *

한빈과 헤어져 처소로 돌아가던 서재오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에 뒤따르던 팽무빈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갑자기 귀가 가려워서. 누가 내 욕을 하나?”

“설마, 하북팽가에서 사숙 어르신을 욕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아까 보아하니 멀쩡한 것 같은데, 왜 한 달이나 비무를 미루는 것일까? 사질은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가?”

“정말 아픈 것이겠지요. 아니면 겁나서 시간을 벌어 둔 것일 수도 있고요.”

“둘 다 아니야. 놈의 눈빛을 보면 전혀 날 무서워하지 않고 있었어. 그리고 기의 흐름도 막힌 곳이 없는 듯 생생했고 말이야.”

서재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천재는 못 돼도 수재는 된다는 화산파의 인재였다. 지금 이 짧은 만남으로 한빈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

사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서재오에게도 필요했다. 방금 봤던 한빈의 모습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만약 화산파의 매화검수가 하북팽가의 검객에게 패한다?

이것은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한빈을 보고 나니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서재오는 멀뚱히 서 있는 팽무빈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연무장 좀 쓰겠네.”

말을 마친 서재오는 매화 문양이 선명한 검집을 움켜잡았다.

그 모습에 팽무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북팽가에 온 이후로 서재오가 이런 진지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 *

며칠 뒤 천수장.

매화검수 서재오의 결심과는 달리 한빈은 해결책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다.

한빈은 탁자 위에 써 놓은 두 글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배분(配分).

이것이 한빈이 생각하는 궁극적인 해결책이었다. 사실 이것은 서재오의 도발을 상대할 때만 쓰일 무기가 아니었다.

강호를 누비다 보면 항렬과 배분이라는 글자에서 자유로운 이는 얼마 안 된다.

만약 배분이라는 두 글자에서 자유로운 자가 있다면 그것은 떠돌이 낭인이든가 천하제일인일 것이다.

지금 화산파의 매화검수 서재오는 정화 부인이 초빙한 첫 번째 빈객일 터.

이 빈객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간단했다. 높은 배분을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 한빈 곁에는 비장한 표정으로 모두가 모여 있었다.

한빈의 그림자 호위 이무명.

맹호사대의 대주 소대섭.

맹호사대의 전속 의원인 장자명 등 모두가 한빈처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한빈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빈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기에 동조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중 장자명은 미칠 지경이었다.

‘배분이 어쨌길래?’

이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알아서 처리하면 되지, 오래간만에 쉬려는 자신을 이 회의에 부른 한빈이 미웠다.

장자명은 어떻게 하면 이 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지만,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옆을 힐끔 보니 소대섭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이 하품을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주변의 보이지 않은 아우성에도 한빈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한빈이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스르륵.

한빈에게 다가온 것은 역시 심미호였다.

“주군, 부탁하신 자료 여기에 추려 놨어요.”

심미호가 서찰을 건넸다.

펼친 서찰에는 이름 몇 개가 가지런히 쓰여 있었다.

이름을 확인한 한빈이 심미호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이 전부 하북에 있다는 거지?”

“네, 맞아요. 주군, 제가 직접 확인했어요. 뭐 오늘 움직였다면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요.”

심미호가 자신 있게 말하자 한빈의 눈이 빠르게 서찰을 훑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의 시선이 서찰의 이름 중 하나에 멈췄다.

“그럼, 이 사람으로 한다.”

한빈이 서찰을 펼친 후 하나의 이름을 손으로 가리켰다.

홍칠개.

소대섭을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심미호는 화들짝 놀랐다.

“주군, 홍칠개는 불가능해요.”

“이유가 뭐지?”

“개방의 원로인 데다가 최고의 배분을 가진 자이긴 해도 사람을 사귀는 게 극도로 까다롭다는 것이 강호의 평판이에요.”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필요한 것이 배분이 높은 빈객이잖아요. 그런데 홍칠개 같은 무림 원로가 여기에 오려고 하겠어요? 주군은 홍칠개의 별호가 뭔지 아세요?”

“…….”

한빈은 말없이 이무명에게 턱짓했다. 대신 대답해 달라는 신호였다.

신호를 받은 이무명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홍칠개는 강호에서는 흔히 무제자라고 불립니다.”

무제자라는 별호가 나오자 그제야 흥미가 동한 듯 사람들이 눈을 반짝였다.

“무제자라면 사람을 보는 눈이 하도 까다롭다고 해서 사십 년 동안 제자를 고르고 있다는 그 무제자 말씀인가요?”

소대섭이 묻자 이무영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네, 맞습니다. 배분으로만 치면 소림사 방장이나 화산파 장문인보다 윗대라고 할 수 있죠.”

“흠, 그런 거물을 포섭한다는 게…….”

소대섭이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피식 웃으며 서찰을 집어 들었다.

“홍칠개가 안 된다면, 여기 있는 인물 중 포섭할 만한 사람을 말해 봐.”

한빈이 쫘르륵 서찰을 펼쳤다.

그곳에는 몇몇 이름이 나타났다.

서문세가의 원로에서부터 곤륜파의 장로까지 모두가 지금 하북에 있는 무림명숙들이었다.

하지만, 만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 한빈이 말했다,

“그래도 거지가 제일 만만하지 않겠어?”

“아!”

이무명이 입을 딱 벌렸다. 체면을 중시하는 그였기에 평상시 같으면 보이지 않을 태도였지만 지금은 표정을 속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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