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내 밥은 내가 지킨다 (3)
“허, 만년한철에 하북으로 시작하는 패라면 뻔하잖아.”
“그럼 저게 하북팽가의 가주 패라고?”
“왜 저게 여기 있어?”
“그러면…….”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하북팽가의 가주 패가 천산혈랑의 몸에서 나왔다라?
그렇다면 계약서에 적힌 대로 천산혈랑의 사체를 한빈에게 양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실을 믿을 수 없는 문파 대표는 만년한철로 만든 하북팽가의 가주 패를 서로 만져 보았다.
만년한철로 만든 가주 패를 위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빈이 말했다.
“이제 그만 확인하시지요. 가주 패 닳습니다.”
“험, 알겠네.”
정주섭은 가주 패를 한빈에게 돌려주었다.
가주 패를 돌려받은 한빈은 황보견우를 바라봤다.
“황보 대협, 진실을 밝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흠, 응당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네.”
황도견우는 미치고 팔딱 뛸 일이었다. 천산혈랑의 사체를 넘겨주는 것만 해도 미치겠는데, 그 일을 도와준 꼴이 되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감사하기는 한데, 천산혈랑의 목을 자르면서 제가 말한 곳을 살짝 벗어났더군요. 혹시 거기에 내단이라도 있으면…….”
“그럴 리가 없네.”
“네, 물론 그래야겠지요. 이 천산혈랑의 사체는 황제 폐하께 바칠 물건이니까요.”
“화, 황제 폐하라고?”
황보견우의 눈이 한계까지 커질 때 한빈이 정주섭을 바라봤다.
“신 하북팽가의 팽한빈은 이 천산혈랑의 사체를 황제 폐하께 바치는 바입니다. 그러니 대인이 대신 받아 주시지요.”
한빈이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하자 이번에는 정주섭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무림인이라면 탐내는 것이 영약과 영수, 마수의 내단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렇게 넘기다니?
고민도 잠시 보는 눈이 많기에 정주섭은 재빨리 답을 해야 했다.
“고맙네, 이건 성주님께 보고하고 재빨리 폐하께 진상하겠네.”
말을 마친 정주섭은 어딘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동시에 모든 이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한빈의 행동에 모든 무림인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가문이 아닌 나라를 위해 쓰겠다는데 이걸 걸고넘어질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한빈을 바라보는 무림인들의 눈이 바뀌었다.
사실 한빈이 손해 보는 것은 없었다.
천산혈랑과 같은 특급 마수의 가죽은 내단이 있는 상태에서 가공을 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야 그 견고함을 살릴 수 있었다.
물론 내단을 완벽히 취하려면 다른 곳으로 기가 빠져나가기 전에 한빈처럼 내단을 끄집어내야 한다.
천산혈랑의 현재 상태는 알맹이가 쏙 빠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이 상태에서 한빈은 최고의 실리를 취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무대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선망의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은 한빈이 정주섭에게 말했다.
“혹시 내단이 없거나 상했다면, 황보 대협이 잘못 자른 탓도 조금 있으니 노여워 마십시오.”
“헉.”
옆에서 듣던 황보견우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이것은 한빈의 꼬장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뒤돌아선 한빈이 계약서를 펼쳐 든 것이다.
그 모습에 무림인들은 놀랐다.
“저걸 왜 펼쳐 든 거지?”
“그러게 말이야. 황제 폐하께 천산혈랑을 바친다고 했잖아.”
모두가 불만을 토해 내자 한빈이 말했다.
“여기에 보시면 천산혈랑을 죽인 자가 보증금을 모두 갖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산혈랑은 폐하의 것이지만, 은자 백 냥은 제 것입니다. 여기에 서명한 문파 및 세가 여러분들은 은자를 들고 앞으로 나오시지요.”
한빈이 뒤를 보며 손가락을 튕기자 심미호와 조호가 바람처럼 달려왔다.
조호는 튼실한 자루를 들고 왔고 심미호는 붓과 한지를 준비했다.
한빈은 옆을 힐끔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악비광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안도의 숨.
씩 웃은 한빈이 문파와 세가들과 일대일 면담을 시작했다.
잠시 후 한빈은 백도문을 마지막으로 면담을 끝냈다.
“대협, 저희 백도문이 그리 큰 문파가 아닌지라…….”
“그래서 제가 이율을 조정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조금 더…….”
“허어, 누가 보면 제가 고리대금업자인 줄 착각하겠습니다.”
한빈의 호통에 박필우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가 보기에 한빈은 고리대금업자가 맞았다.
하북의 전장과 거래를 트지 않은 백도문이기에 그 많은 은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산동까지 다녀와야 했다.
그런데 그 기간마저 이자를 매긴 것이다.
물론 타 문파도 형편은 똑같았다.
한 문파만 당한 것이라면 다른 문파에게 빌리면 됐을 텐데 이건 동시에 당했으니 자금이 씨가 마른 것이다.
박필우는 할 수 없이 한빈이 내건 조건에 서명을 했다.
그러고는 깊숙이 포권하며 자리를 떠났다.
사실 한빈의 욕심이 과한 면도 없잖아 있긴 했지만, 자신의 밥그릇에 허락도 없이 숟가락을 올리려 했던 자들을 두 발 뻗고 자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에게 추가 계약서를 받은 한빈이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네, 주군.”
심미호가 깊숙이 포권했고 그 뒤의 다른 무인들도 따라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모두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한가득이었다.
한빈의 모든 행동을 지켜본 자는 이곳에 없기 때문이었다.
심미호가 조호를 바라봤다. 눈빛을 받은 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대로 사건의 전말을 맞춰 보자는 신호였다.
그들이 절호곡 근처에서 멀어질 때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몇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흑천의 살수였다.
상처가 깊지 않은 몇몇은 한빈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살수 하나가 혈화에게 다가왔다.
“조장님, 이제 그만 떠나시죠.”
“잠시만, 기다려.”
혈화는 점점이 멀어지는 한빈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안 보입니다. 조장님.”
“십팔호, 너는 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해?”
십팔호라 불린 살수는 한빈에게 처음 당했던 특급 살수였다.
여기저기 찔리긴 했어도 묘하게 급소만 피해서 찔렸기에 그나마 서 있을 수가 있는 상태였다.
“묘한 사내입니다.”
“묘하긴 하지, 십팔호가 보기에 저 인간이 겁쟁이 같아?”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십팔호는 말끝을 흐렸다. 전날 받았던 고문이 몸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치를 떠는 십팔호를 본 혈화가 물었다.
“왜 그래?”
“저 인간, 아니 저 새끼는 지옥에서 온 고문 기술자입니다.”
“풋, 살수가 아니라 고문 기술자라고?”
“네, 맞습니다. 살수면 상대의 목을 가장 효율적으로 딸 생각을 하죠, 그런데 저 인간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데? 말해 봐.”
“저 인간을 고문 자체를 즐깁니다. 한마디로 변태 같은 놈이죠. 다시 보면…….”
십팔호가 뒷말을 삼키자 그 모습에 흥미가 동한 혈화가 다시 물었다.
“왜 자꾸 말을 끊고 그래, 계속 말해 봐.”
“다시 보면 죽이고 싶은데, 절대 다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흠, 그렇단 얘기지. 저 인간에 대한 건 일단 접어 두고 돌아가는 대로 불량 고객부터 정리해야겠지.”
“네, 맞습니다. 그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말을 마친 십팔호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모든 살수의 표정은 마찬가지였다.
제거 대상에게 동정을 받았다.
즉, 한빈에게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은 거짓 정보를 전한 의뢰인에게 있었다.
남은 살수들은 살의를 불태웠다.
* * *
삼 일 후, 하북팽가의 가주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한빈과 맹호사대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가주 대행인 집법당주 팽대위가 자리에 앉자 한빈이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에서 가주 패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가주 패를 요긴하게 잘 썼다는 이야기가 돌던데?”
“적당히 잘 썼습니다. 가주 패가 없었으면 저는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래?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가주 패를 팔아서 돈벌이에 이용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흠.”
한빈이 헛기침하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올려놓으려던 문파들에게 엿을 먹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로 인한 반발이 생겨났다.
일전에 당한 문파들이 하북팽가의 가주 패로 한빈이 사기를 쳤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덕분에 한빈의 활약은 반감되었다.
좋게 말하면 힘을 숨길 수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빛 좋은 개살구가 된 것이다.
물론 겉보기만 그렇다는 말이었다.
한빈의 표정에 팽대위가 호쾌하게 웃었다.
“껄껄! 이미 조사가 끝난 일이니 안심해도 된다. 내가 농을 한번 던져 본 것이야. 남의 그릇을 채 가려는 놈들은 당해도 싸지. 그나저나 천산혈랑을 잡은 것이 신기하군. 맹호사대로는 벅찼을 텐데.”
“죽자 살자 덤비니 어떻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지만요.”
한빈은 흑천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놨다.
만일 흑천에 대한 이야기를 가문에서 안다면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정화 부인을 처단하려는 계획은 물 건너갈 것이었다.
흑천에게 복수하겠다고 들쑤시는 날 정화 부인은 꼬리를 자를 것이 분명했다.
물론 흑천이 하북에서 활동할 입지도 좁아진다.
그 때문에 서로 말을 맞춘 상태.
대외적으로 백 마리가 넘는 늑대 토벌과 천산혈랑 사냥은 모두 한빈과 맹호사대의 결실이었다.
팽대위는 아무 말 없이 한빈의 눈을 응시했다.
마치 한빈의 마음을 읽겠다는 듯 말이다.
그 눈빛을 한빈이 담담히 받자 팽대위가 살짝 하얀 이를 드러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형님께서 폐관에서 나오시면 축하할 일이 쌓이겠어.”
“네, 감사합니다.”
한빈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마 팽대위가 본 것은 한빈의 경지일 터였다.
한빈의 내공은 반 갑자.
내공만 봐서는 절정의 수준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본신 내공만 따지면 아직 일류의 수준이다.
일류 중에서는 최상급.
절정까지는 얇은 벽 하나 정도가 존재하고 있다.
팽대위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집법당 무사들이 나무 쟁반을 들고 한빈과 맹호사대의 앞에 섰다.
“이건 가문에서 내리는 포상이다.”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한빈이 가주를 대하듯 정성껏 포권하자 뒤쪽에 선 일행도 포권했다.
“가주님께 충성을!”
“하북팽가에 영광을!”
그 여운은 한동안 맹호사대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물론 한빈은 감동은커녕 그와 비슷한 감정이 한 톨도 없었다.
한빈이 진짜 기대하던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한빈이 기대하던 소식을 들은 것은 정확히 삼 주가 지난 후였다.
한빈이 연무장 옆 바위에 기대 용린검법의 구결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왔다.
한빈은 황소처럼 뛰어오는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흙먼지가 걷히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철노였다.
한빈의 앞에 멈춘 철노는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공자님!”
“대체 무슨 일이야? 천화루에 불이라도 났어? 아니면 다른 세가에서 팽가에 쳐들어온 거야?”
“공자님도 참, 왜 다른 세가에서 우리 팽가에 쳐들어옵니까? 혹시 찔리는 거라도 있으신 거 아니에요?”
“에이, 내가 무슨 찔리는 일을 해. 지난번 토벌 때문에 얼마 안 있으면 황제 폐하의 성지가 내려온다는 소문도 있잖아.”
“아, 성지 얘기는 아니에요.”
“그럼 대체 무슨 일이야? 철노.”
“지금 하북팽가에서 보낸 상행이 빈번하게 털리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