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내 밥은 내가 지킨다 (2)
정주섭의 옆에 선 한빈이 외쳤다.
“사체를 해부하는 걸 도와주실 문파는 나와주십시오. 단, 백 냥을 건 문파에 한해서입니다.”
잠시 웅성거림 속에 백 냥을 건 문파들이 모두 나왔다.
그들의 눈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탐욕이었다.
이제 한빈은 탐욕이라는 호수 속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보기로 했다.
한빈이 정주섭과 함께 그들의 가운데로 걸어갔다.
정주섭을 등에 업은 한빈은 시종 여유 있는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봤다.
하나하나 모든 문파에 시선을 던진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천산혈랑은 신장에 사는 마수입니다. 그리고 그 가죽은 질기기가 거북이의 등껍질과도 같아서 화살도 못 뚫는다고 하죠. 가장 중요한 것은 천산혈량의 내단이겠지요. 강호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혈랑의 내단은 반 갑자의 공력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만년설삼의 무려 세 배입니다.”
한빈의 말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의 표정을 본 한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천산혈랑을 해부할 텐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한빈이 잠시 말을 끊었다.
모두는 한빈의 다음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빈은 천산혈랑의 사체와 참여한 문파를 힐끔 바라볼 뿐 입을 떼지 않았다.
참다못한 정주섭이 물었다.
“대체 문제가 무엇인가?”
“네, 문제는 간단합니다. 천산혈랑이라는 마수의 성질은 매우 흉포하다고 알려져 있지요. 그 흉포하고 변화무쌍한 성질 때문에 내단이 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럼 조심해서 꺼내면 될 것이 아닌가?”
“문제는 칼을 잘못 댔다가는 내단이 망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해체하면서 생기는 과오는 오롯이 해당 문파가 책임져야 함을 물론이고요.”
“흠.”
정주섭이 잠시 헛기침했다.
한빈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짜 아이 엄마를 찾아 주기 위해 아기를 반으로 잘라서 나누라던 포 대인의 일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던가!
여기서 나오는 자를 일단 제외시키면 된다고 정주섭은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조정의 관료인 정주섭의 정상적인 판단이었다.
정주섭을 한술 더 떠 문파의 대표들을 바라봤다.
“자신 있는 자는 어서 나오시게!”
“…….”
하지만, 모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하늘만 바라봤다.
한빈이 말한 대부분이 사실이었다. 끝에 말한 내단이 움직인다는 것도 얼핏 생각해 보면 그럴듯해 보였다.
더 중요한 것은 천산혈랑이라는 마수의 가죽이었다.
마음대로 자르게 되면 그 값어치는 현저히 떨어진다.
잘랐는데, 다른 문파의 흔적이라도 나오게 되면?
그 떨어진 값어치는 고스란히 자신의 문파가 물어내야 한다.
정주섭은 문파들의 대표자를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저들의 눈빛이 익숙하다. 정주섭은 자신도 모르게 가끔 들르는 도박장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눈빛은 도박장에서 판돈을 건 노름꾼들과 같았다.
정주섭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이곳을 도박장으로 만들어 버린 한빈만 여유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들의 침묵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도 계속되었다.
한빈이 뒤쪽을 보며 심미호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심미호가 달려와 두 손으로 공손히 검을 건넸다.
한빈이 흡족한 표정으로 월아를 받아 들었다.
그 모습에 정주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장 먼저 검을 드는 자는 천산혈랑과 관계가 없는 자라 생각했는데, 한빈이 검을 들더니!
한빈이 천산혈랑의 앞에 섰다.
“무림 동도 여러분, 무림 말석인 제가 여러분을 대표해서 천산혈랑을 가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른 부분에서 증거가 없다면 저는 깨끗이 물러나겠습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흠, 그렇다면야.”
“그래, 그렇게 포기한다면야.”
웅성거림 속에서 황보견우가 앞으로 나왔다.
“그런데 자네 무위로 천산혈량의 가죽을 벨 수 있겠는가?”
“제가 천산혈랑의 가죽을 가르지 못한다면 물러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하게나.”
둘의 대화에 구경꾼들은 혀를 찼다. 누가 봐도 일방적으로 한빈이 당하는 모습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하북팽가에서 호랑이가 아닌 하룻강아지가 나왔네그려.”
“에구, 내 자식이라면 그냥 콱!”
그들의 웅성거림에 황보견우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방해하지 말라는 표시였다.
한빈은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보견우에게 말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황보 대협이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는가?”
“제가 내려칠 곳 아래를 잡아 주십시오.”
한빈이 검집으로 천산혈랑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살짝 튀어나온 곳이 있었다. 마치 생선 가시가 박힌 모습이었다.
황보견우가 호기롭게 천산혈랑의 목덜미를 바닥에 고정했다.
“잡았네.”
“감사합니다.”
한빈은 월아를 검집에서 뽑았다.
스릉!
월아가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이며 그 자태를 드러냈다.
“헉.”
황보견우가 긴 탄성을 흘렸다. 처음에는 월아의 아름다움에 흘린 탄성이었고 마지막은 갑자기 밀려드는 두려움에서 나온 소리였다.
새파랗게 질린 황보견우를 본 한빈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네.”
황보견우는 대답하면서도 한빈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황보견우가 생각하는 한빈의 무위는 이류.
이류 무사가 저리 날카로운 검을 쓴다면?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치 않을 것이었다.
그만큼 항보견우가 바라보는 한빈의 검술 실력은 최하였다.
그때 갑자기 더 두려운 생각이 밀려들었다.
“잠깐만, 팽가에서 도(刀)가 아닌 검(劍)을 쓴다고? 언제부터 검을 다루기 시작했나? 자네!”
하지만, 한빈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쾌검난마!’
‘일촉즉발!’
두 가지 효과를 월아에 담았다.
육안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일렁이는 검기에 황보견우가 외쳤다.
“잠시만 기다리게!”
그때였다.
심미호가 다급히 나왔다.
“주군, 잠시만요. 검을 이렇게 잡으시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그랬나?”
한빈이 뒷머리를 긁적이자 심미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찌해서 내공을 일류로 올려놓으셔도 초식이 못 따라가면 전부 필요 없어요. 마수의 목을 베려다가 황보 대협의 손목을 베면 대체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니야. 심 부대주. 움직이지 않는 마수쯤은 자신 있어. 나 한번 해 볼 거야. 심 부대주가 말리면 나 도와주겠다고 나선 황보 대협의 꼴이 뭐가 돼?”
한빈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심미호가 할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
“주군, 그럼 조심하셔야 해요. 손목 말고 꼭 천산혈랑의 목이요. 꼭이요.”
심미호는 보이지 않게 입꼬리를 올리며 사라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연기!
한빈은 역시 이번 임무에 심미호를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몇 번을 부탁하는 심미호의 말에 황보견우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솟아났다.
그 방울이 또르르 뺨을 타고 자신의 손목에 톡 하고 튀기자 황보견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치 자신의 손목이 떨어져 나가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보견우는 조심스럽게 한빈을 살폈다.
혹시나 전에 원한을 맺은 적이 있는가를 되짚기 위함이었다.
그것도 잠시 황보견우는 고개를 저었다.
하늘에 맹세코 한빈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하북팽가와 원한을 맺은 적도 없었다.
황보견우의 머릿속에 근심이 차곡차곡 쌓여 갈 때 한빈이 다시 말했다.
“황보 대협, 다시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에 검을 잡으니 조금 떨리는군요.”
한빈의 마지막 말에 황보견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다리게, 팽 소협.”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협이란 말로 높여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대협.”
“차라리 내가 대신 잘라 주면 안 되겠나? 소협이 원하는 곳을 말해 보게.”
“아, 이게 잘못 자르면 문파 책임이라 공헌해 놓는 바람에…….”
“내가 정확히 자르면 되지 않나! 팽 소협.”
“뭐 그러시다면, 이쪽을……. 그럼 제가 잡고 있겠습니다.”
한빈인 황보견우와 위치를 바꾸었다.
황보견우가 검을 뽑았다.
스릉!
그에 맞춰 한빈이 천산혈랑의 목덜미를 고정했다.
다만, 손이 아닌 검집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 모습에 황보견우가 물었다.
“왜, 손으로 안 누르고 검집으로 누르는 것인가?”
“위험하잖아요. 제 검술 실력이 미천하다 보니 원하는 곳을 정확히 칠 확률이 굉장히 낮거든요.”
황보견우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했으면 자신의 무인 인생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생각했다.
“후.”
심호흡한 황보견우는 검을 내리그었다.
쉭!
허공을 가르는가 싶었던 그의 검은 어느새 다시 검집에 꽂혀 있었다.
그야말로 쾌검!
모두가 박수를 쳤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백도문의 박필우가 말했다.
“어라? 멀쩡하게 붙어 있는데? 하하.”
그 웃음은 점점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이 되었다.
“아, 그럴 줄 알았다니까. 빨라도 너무 빨랐어.”
“껄껄.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냥 검을 뽑았다 다시 넣은 거잖아.”
“황보세가의 대공자가 저런 실수를 하다니 긴장한 모양이네.”
물론 가까이서 지켜본 한빈은 결코 웃지 않았다.
황보견우의 검은 분명 천산혈랑의 목덜미, 그것도 정확히 자신이 가리킨 부위를 통과했다.
모두가 웃고 즐기고 있을 때 천산혈랑의 목에서 희미한 핏줄기가 비쳤다.
그것을 가장 먼저 본 것은 정주섭이었다.
정주섭이 외쳤다.
“천산혈랑의 목이…….”
그때였다.
천산혈랑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툭!
그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멈췄다.
“역시 황보세가의 대공자야.”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갑자기 바뀌는 분위기에 한빈은 헛웃음을 흘렸다.
황보견우의 검이 빠르고 정확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한빈이 내단을 취하지 않았다면 과연 검이 놈의 가죽을 자를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했다.
절정 최상급인 흑천의 살수도 못 뚫은 천산혈랑의 가죽이었다.
지금은 내단이 없어진 상태이므로 그 강도가 확연히 줄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겨우 표정을 수습한 한빈이 떨어져 나간 천산혈랑의 목을 가리켰다.
“저기 뭔가 보이는데, 황보 대협이 직접 확인해 주시죠.”
“험.”
황보견우는 잠시 헛기침하며 잘려 나간 단면을 확인했다.
뭐지?
천산혈랑의 목에 박힌 물체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았다.
살짝 닿는 손끝의 감촉은 마치 겨울 고드름을 맨손으로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냉기를 품은 철이라?
황보견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만년한철이었다.
만년한철이 대체 왜 여기에?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의문을 억누른 채 황보견우는 만년한철을 집었다.
피에 절어 있는 만년한철이라?
대체 이건 뭘까?
그때 한빈이 말했다.
“황보 대협, 그 물건은 정주섭 대인과 무림 동도 여러분과 같이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네.”
황보견우의 곁으로 모두가 모이고 황보견우는 피에 절은 만년한철을 무명천으로 닦아 냈다.
서서히 드러나는 만년한철의 정체.
[하북……]
“헉.”
정주섭이 헛숨을 들이켰다. 전혀 예상 못 한 물건이었다.
그것은 하북팽가의 가주 패였다.
헛숨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