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내 밥은 내가 지킨다 (1)
백도문의 무사가 칼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백도문이라면 산동의 문파.
“우리가 먼저 발견하고 깃발을 꽂았다.”
“그게 과연 이 마수의 주인을 가릴 수 있는 증거가 될까? 이 마수를 죽인 것은 바로 우리 첫째 공자님이시다.”
황보세가의 무사가 뒤쪽에서 팔짱 끼고 있는 훤칠한 사내를 가리켰다.
그는 바로 황보세가의 대공자 황보견우.
황보견우가 천천히 천산혈랑의 사체 쪽으로 걸어 나오자 이번에는 백도문의 무사가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황보견우와 비슷한 덩치의 사내가 구환도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구환도란 칼등에 아홉 개의 구멍이 뚫려 있고 각각의 구멍에 고리가 달려 있는 거도를 말한다.
구환도를 어깨에 걸친 사람의 이름은 백도문의 박필우. 그 역시 백도문의 대공자였다.
천산혈랑의 사체를 두고 맞선 황보견우와 박필우는 칼을 뽑지도 않았는데도 불꽃이 튀었다.
격렬한 눈싸움이 지나가고 박필우가 말했다.
“황보세가라는 이름으로 우리 중소 문파를 누르려는 것이오?”
“우린 세가의 이름으로 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오. 깃발은 그쪽에서 먼저 꽂았으나, 천산혈랑의 숨통을 끊은 것은 바로 우리 황보세가외다.”
천산혈랑이라는 단어에 구경꾼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게 천산혈랑이라고?”
“저거 가죽만 팔아도 평생 먹고살 돈을 얻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저게 누구 거라는 증거는 없잖아.”
“누구 것이긴,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지.”
“아무래도 동시에 주운 것 같은데.”
“그럼 힘센 놈이 임자고.”
그 술렁임에 백도문의 박필우가 구환도를 바닥에 찍었다.
쿵!
그 소리에 구경꾼들이 입을 닫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박필우는 시선을 황보견우에게 고정했다.
“허, 달린 입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나.”
“지금 달린 입이라고 했소?”
황보견우는 눈썹을 꿈틀했다가 바로 검을 뽑았다.
스릉.
그의 검에 맞춰 백도문의 박필우도 구환도를 세워 상대를 겨냥했다.
휙!
일촉즉발의 상황.
한빈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몇 시진 동안 천산혈랑과 사투를 벌인 것은 흑천과 자신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죽였다는 자도 있었고 자신이 먼저 발견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사파나 마교보다도 질이 떨어지는 자들이다. 뭐, 사파니 마도니, 정파니 나누는 건 어찌 보면 왈패들이 구역을 나눠 관리하는 것과도 같았다.
자신의 이익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정파의 법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마도의 법도에서 벗어나는 셈이다.
한빈은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이들을 어떻게 요리할까를 고민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그들의 가운데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난데없는 제삼자의 등장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은 뭐지?”
“그러게 말이야. 괜한 싸움에 말려들었다가 목이 댕강 잘려도 할 말 없을 텐데.”
그때 황보견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신분을 밝히시게.”
“아, 저는 하북팽가의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팽한빈이라면……. 풋.”
이름을 떠올린 황보견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몇몇은 황보견우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하북 최고의 겁쟁이잖아.”
“아니, 얼마 전에는 산동악가의 악비광도 꺾었잖아.”
“에이, 그건 팽한빈이 강한 게 아니라 악비광이 약한 걸로 판명 났잖아.”
그들의 말에 한빈은 힐끔 뒤를 돌아 악비광의 표정을 확인했다.
울 듯 말 듯한 표정을 보건데, 이상한 소문이 퍼져 나간 것 같았다.
하북 최고의 겁쟁이라는 악명이 얼마나 자자하기에 이리도 오명을 씻기 어렵단 말인가!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파란만장했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모습에 백도문의 박필우가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외쳤다.
“남의 일에 상관 마시고 비키시오.”
“황보세가의 일에 끼어들다가 횡액을 당하지 마시게나. 하북팽가면 우리 황보세가와 함께 강북 오대세가에 이름을 올린 가문이 아니던가. 그 가문의 자제에게 손을 쓰고 싶지는 않네.”
한마디로 이구동성.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분은 천산혈랑의 사체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에 뭘 거실 수 있는지요?”
한빈의 의도는 명확했다.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라는 것이었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정주섭도 용기가 났는지 한빈의 옆에 섰다.
“저는 하북성의 관리 정주섭이라고 합니다. 이 행사는 황명을 받들어 진행하는 토벌 작전. 어떤 불미스러운 일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황명이라는 말이 나오자 백도문과 황보세가의 무사들이 한 걸음씩 물러섰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정주섭이 한빈을 바라봤다.
“혹시 팽 공자께서는 이 사체의 주인을 가릴 묘수가 있을는지요?”
“네, 있습니다.”
순간 주변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하는 거지?”
“아니야, 잠시 기다려 보자고, 무공이 낮으니 지략이 뛰어날지도 모르는 거잖아.”
“하긴. 그렇지.”
주변의 웅성거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이 모두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제 소견으로는 천산혈랑의 사인부터 밝히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러다 보면 누가 이 마수를 죽였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고 당연히 주인도 정해지리라 봅니다.”
그와 동시에 정주섭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죠. 대인.”
“왜 그러시죠? 팽 공자!”
“모두가 천산혈랑의 사체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럼 저도 이 사체게 제 것이라 주장하면 인정이 되는 건가요?”
“그건…….”
“그런 이유로 제가 제안드리는 바입니다. 이 사체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려면 은자 백 냥을 걸어 주십시오. 그 정도의 책임감도 없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막무가내라고 봅니다.”
“…….”
아무도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물러서자니 천산혈랑의 사체가 탐이 났고 나서자니 뒤가 찜찜했기 때문이다.
황보견우는 눈매를 좁히며 천산혈랑의 겉모습을 살폈다.
아까도 확인했지만, 천산혈랑의 겉모습은 멀쩡했다. 겉보기에 치명상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사냥꾼이 풀어 놓은 독에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들이 쓰는 독은 줄줄 꿰고 있으니 사인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적당히 둘러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계산을 마친 황보견우가 말했다.
“저 천산혈랑의 사체가 내 것이라는 것은 진실이기에 저는 아낌없이 은자 백 냥을 걸겠소.”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한빈이 그의 앞에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그럼 이곳에 서명하십시오.”
사사삭.
황보견우는 아무 의심 없이 그곳에 서명했다.
그것이 대참사의 시작이었다.
은자 백 냥을 걸면 황금 백 냥의 가치가 될지 모르는 천산혈랑의 사체를 취할 수 있다?
이것이 토벌 작전에 참가한 문파들의 생각이었다.
무려 열 개가 넘는 문파가 천산혈랑의 사체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했다.
계약서에도 문제는 없었다.
천산혈랑의 내부에서 문파의 표식이 나오면 바로 인정한다는 것이 첫 번째 규칙이요, 두 번째 규칙은 보증금으로 낸 은자 백 냥은 천산혈랑의 주인에게 귀속된다는 것이다. 은자 백 냥은 승자가 원하는 장소와 일시에 인도하면 되고 말이다.
물론 인적도 없는 이곳에 은자 백 냥을 가지고 온 문파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한빈이 계약서의 내용을 정주섭과 확인하고 있을 때 멀리서 지켜보던 조호가 달려왔다.
“주군, 이건 너무하잖아요. 저는 주군 옆에 쓰러진 천산혈랑을 분명 봤습니다. 그런데, 모두 자기 것이라 우기다니요. 이러고도 명문 정파라 할 수 있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쉿.”
한빈이 다급하게 조호의 말을 막았다. 조호는 눈을 올망졸망 뜨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을까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잘못은 없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조호야, 목소리 낮추고 잘 들어라.”
“말씀하십시오. 주군.”
“장사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부대주 옆에 가 있거라.”
“장, 장사요?”
“쉿, 조용히 하래도.”
한빈에게 쫓겨난 조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계약자의 서명을 살펴보던 한빈은 힐끔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산동악가의 악비광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조호가 달려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를 보고 있나?
고개를 갸웃한 한빈이 악비광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악 공자는 참여 안 할 건가? 아무리 봐도 좋은 기회 같은데.”
“글쎄요, 조금 느낌이 싸한 것 같습니다만.”
악비광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발 물러섰다.
그 모습에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악비광의 뱃속에 여우가 들어섰다고 하는 건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이건 여우가 아니라 이무기였다.
욕심 앞에서 느낌만으로 한발 뺀다는 것은 장사꾼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좌중을 둘러본 한빈이 외쳤다.
“천산혈랑의 사체 검시에 참여할 가문이나 문파 계십니까?”
“…….”
더는 없는지 침묵으로 답하자 한빈이 입맛을 다시며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팽한빈.
옆에서 보던 정주섭은 소스라치게 놀라 한빈에게 물었다.
“대체 뭐 하는 것인가?”
놀란 그에게서는 자연스러운 하대가 나왔고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붓을 놓으며 답했다.
“기회가 공평하다는 건 저도 포함해서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대인.”
“허, 그건 그렇지만…….”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돈도 없는 막내 공자가 참여하려고 하나?”
“그러게, 하북팽가는 돈이 많아도 막내 공자는 무일푼이라 들었는데.”
직설적인 인신공격에 한빈이 정주섭을 바라봤다.
“대인, 제가 취한 늑대의 머리가 몇 개죠? 아마 백 개는 넘을 겁니다.”
“허, 아까 백 개까지 세다 이쪽으로 왔다네. 그러니 당연히 백 개는 넘겠지.”
“분명 토벌 작전의 조건이 늑대 머리 하나당 은자 한 냥이 맞지요?”
“그렇지.”
“그런 제게는 관아가 보증하는 은자 백 냥이 있는 것도 맞을는지요?”
“허, 그러고 보니 그것도 맞네, 그려.”
정주섭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체 검사에 참가하겠다는 문파와 구경꾼들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큰 의문은 하북의 겁쟁이 한빈이 늑대 백 마리를 토벌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한마디로 해결되었다.
“늑대 목을 하북의 직계가 직접 따나? 수하들이 유능한 것이지.”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 그래, 수하 덕에 나팔 부는 거지.”
그들의 웅성거림에 한빈이 계약서를 내밀며 외쳤다.
“빠지실 분은 지금 빠지셔도 좋습니다. 이건 관아나 제가 강요한 조건이 절대 아니니까요.”
한빈의 말에 정주섭은 눈썹을 꿈틀했다.
듣고 보니 자꾸 관아를 엮어 넣으려 하는 한빈이 의심스러웠다.
이대로라면 관이 이 계약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때 황보경우가 힘차게 검을 들어 올렸다.
“남아일언!”
그 말에 다른 이들이 따라 외쳤다.
“중천금!”
싸울 때는 언제고 갑자기 호흡이 척척 맞는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의 끝에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낙장불입.”
“뭐라고 했나?”
정주섭이 물었지만, 한빈은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뭐, 마지막까지 기회를 줬으니 원망할 사람도 없다 생각했다.
이제 운명이 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