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이이제이 (2)
상처의 구 할이면 목숨 하나가 더 늘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십오 년이라고?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남아 있는 용린검법의 공력은 세 개.
열두 시진이 끝나고 다 회복된다고 해도 열 개였다.
그런데 열다섯 개의 공력이 필요하다니?
이것은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다시 비급에 글귀가 나타났다.
[인급 구결 최초 획득으로 본신의 내공과 용린검법의 공력이 소통합니다.]
한빈의 본래 단전에 깃든 내공 십 년과 용린검법의 공력을 합쳐 쓸 수 있는 말이었다.
한빈이 용린검법의 글귀를 곱씹는 동안 천산혈랑은 숨을 돌릴 틈을 찾았다.
천산혈랑은 마수답게 더욱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여차하면 도망갈 듯 살수들의 포위 밖으로 물러났다.
살수들도 마찬가지로 여유를 찾았다.
천산혈랑의 발톱과 살수의 검이 대치한 상황.
혈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까지 분명 아홉이 천산혈랑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열 명인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혈화가 외쳤다.
“한 명이 더 있다!”
그 말은 살수들의 합격진에 혼란을 주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적은 없었다.
다시 천산혈랑의 발톱이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팡!
파공성과 함께 살수 하나가 나가떨어졌다.
그때였다.
혈화가 다시 인원을 확인했다.
그는 눈매를 좁혔다.
분명 한 명이 더 있었는데, 그사이에 한 명이 없어진 것이다.
‘뭐지?’
의문과 함께 옆구리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자신의 경지는 절정 최상급.
절정의 초특급 살수 중에도 최고였다.
그런데 자신의 기감에서 벗어난 자가 있었다니!
이것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혈화가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봤다.
옆구리에는 은침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 은침을 잡은 손을 따라가니 자신과 비슷한 복면을 한 자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복면의 아래쪽이 보기 좋게 뒤틀려 있다.
분명 복면 안으로 웃고 있을 것이다.
자신보다 은밀하고, 자신보다 음험했다.
상대는 분명 살수였다.
그것도 자신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살수.
혈화는 그제야 복면인과 자신이 다른 점을 발견했다.
천산혈랑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는데, 자신들은 돼지 피 때문에 복면을 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앞에 있는 살수만이 복면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 소속이냐?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런 짓을 하느냐?”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목소리로 봐서는 여인이었다.
살수 중 여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무위로 봤을 때는 놀라웠다.
한빈이 놀란 기색을 지우고 장난치듯 목소리를 바꿔 말했다.
“나? 살수!”
“사, 살수라고?”
“동업자끼리 미안하다. 너희 의뢰인이 우리에게도 의뢰했다.”
“대체 의뢰인이 왜?”
“의뢰인이 너희와 원한이 좀 있는 것 같다. 의뢰인에 대해서는 비밀이지만, 이승을 떠날 놈이니 말해 주마.”
“대체 그 의뢰인이 흑천과 무슨 원한이 있…….”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은침에 묻은 마비 독이 전신에 퍼졌기 때문이다.
털썩!
쓰러진 혈화를 그대로 놔둔 한빈은 천산혈랑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혈화가 있어야 할 합격진을 한빈이 메꾸자 천산혈랑과의 전투는 다시 팽팽해졌다.
한빈은 천산혈랑과 검을 맞대며 복면을 벗어 던졌다.
천산혈랑의 공격에 당하던 살수들은 적이라는 혈화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운 지 오래였다.
한빈은 살수들과 대화하며 목소리를 살짝 바꾸었다.
나중에 마주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하게 말이다.
살수의 우두머리가 살아날 확률은 구 할.
상처가 그만큼 얕았다.
한빈은 이 싸움에서 흑천의 초특급 살수를 살릴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늑대와 살수가 개싸움을 벌이도록 만들었듯이 하남정가와 흑천이 한판 붙을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다.
뭐, 하남정가를 뒤에 업은 정화 부인이라고 추측할 뿐 증거는 없었다.
이렇게 운을 떼 놓는다면 흑천은 알아서 날뛸 것이었다.
흑천에게 당한 가문을 찾아본다면?
그것이 자신을 죽이라 의뢰한 자의 정체일 것이었다.
뭐, 저대로 죽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만일 저 초특급 살수가 살아남는다면 분명 의뢰인의 가문은 풍비박산이 날 것이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동이 텄다.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이 산자락을 비추자 천산혈랑과 살수들의 처절한 광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의 흘린 피와 천산혈랑의 붉은 털 때문에 산자락에 노을이 박힌 것 같은 모습이 펼쳐졌다.
푹!
한빈의 검이 천산혈랑의 허벅지를 뚫었다.
이렇게 상처를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쾌검난마 덕분이었다.
이제는 본신의 내공도 다 끌어다 쓴 상태.
남은 살수는 둘.
반은 천산혈랑에게, 반은 한빈에게 당했다.
이제 천산혈랑에게 남은 점은 셋.
한빈은 이 싸움에서 철저히 이득을 취했다.
한 개의 인급 구결을 완성했으며 기본편의 구결도 다수 취했다.
한빈은 재빨리 상황을 살폈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무려 세 시진 동안의 전투였다.
천산혈랑도 피범벅이 되었지만, 한빈도 이제는 기력이 다 떨어졌다.
한빈은 조용히 뒤로 빠졌다.
그 모습을 본 살수 둘이 외쳤다.
“왜 혼자만…….”
“잘 놀았으니 이제 가야지.”
한빈의 말에 살수는 한빈의 복장이 자신과 다름을 알았다.
태양이 뜨자 한빈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었다.
“넌, 대체 누구냐?”
“알 것 없고 구천지옥에서 보자고. 난 백 년 뒤에 갈 테니.”
한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졌다.
한빈의 뒤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악!”
“살려······!”
남은 살수 둘이 천산혈랑에게 당한 것이다.
내단도 좋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목숨이었다.
일단 후퇴하고 다시 와서 내단을 취하면 될 터였다.
이곳에 천산혈랑이 있다는 것은 자신만이 아는 정보니 그리 급할 것도 아니었다.
한참을 뛰어가던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등 뒤에서 서늘한 마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한빈은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슝!
파공성이 귓전에 울리더니 옆쪽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한빈은 본능적으로 그게 천산혈랑의 발톱임을 알 수 있었다.
살수를 해치운 천산혈랑이 따라붙은 것이었다.
천산혈랑의 공격을 피하다 보니 한빈은 산자락의 구석까지 몰렸다.
묘하게도 뒤쪽은 낭떠러지였다.
한빈은 검을 움켜잡았다.
필요한 구결 하나만 더 얻는다면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빈이 검을 뻗었다.
‘쾌도난마!’
‘일촉즉발!’
검 끝에 푸른색 검기가 일렁였다.
한빈의 몸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하지만, 천산혈랑의 움직임은 기묘했다.
옆으로 몸을 틀더니 발톱을 편 앞발로 한빈을 그었다.
한빈이 다급하게 몸을 틀었다.
서걱!
몸을 틀었지만, 천산혈랑의 발톱이 한빈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한빈이 이를 악물었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
용린검법의 기본 구결 중 회복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바로 쓰러졌을 상처였다.
뒤쪽은 절벽.
아래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저곳에서 살아남을 확률과 천산혈랑과 붙어서 이길 확률을 가늠해 보았다.
천산혈랑이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한빈이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몸을 틀었다.
휙.
천산혈랑이 한빈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한빈의 눈에 들어온 천산혈랑의 아래턱에 반짝이는 점.
새로 나타난 점이었다.
고민은 없었다.
밑져야 본전!
한빈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찔렀다.
하지만, 예상 못 한 일이 일어났다.
텅!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검이 반 토막 난 것이다.
휙!
다시 놈의 발톱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한빈은 재빨리 물러서며 기수식을 취하며 부러진 검을 바라봤다.
월아를 놔두고 온 것이 다시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때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품 안에 있는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든 가주 패가 기억 난 것이다.
한빈은 마지막 남은 공력을 가주 패에 담았다.
‘일촉즉발’
순간 가주 패가 희미한 기운을 머금었다.
가주 패를 감싼 용린의 기운과 한빈의 손에 맺힌 기운이 하나가 되자 한빈이 화살처럼 가주 패를 쏘아 냈다.
파팍!
놈의 턱이 한빈과 가까워졌다.
두 걸음.
한 걸음.
드디어 놈의 턱과 가주 패가 충돌했다.
푹!
한빈의 눈이 커졌다.
만년한철의 효용 때문일까? 아니면 한빈의 마음을 용린검법의 비급이 알아줬기 때문일까?
한빈의 마지막 공격은 마치 두부에 검을 박듯 그렇게 천산혈랑의 턱을 통과했다.
턱을 통해 목 속 깊이 가주 패가 박히자 천산혈랑은 거친 숨을 뱉어 냈다.
한빈은 더욱 깊은 상처를 내기 위해 가주 패를 틀었다. 상대는 마물.
방심하다가는 당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 숨이 멈출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때였다.
휙!
천산혈랑의 발톱이 한빈의 옆구리로 날아왔다.
놈도 마지막 힘을 짜낸 것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 힘을 짜내 놈의 숨통을 끊는 도중, 한빈은 그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한빈의 옆구리에 놈의 발톱이 박혔다.
푹!
동시에 천산혈랑의 숨통이 끊어졌다.
한빈은 그제야 자신의 상처를 확인했다. 그리 얕지 않은 상처였다.
털썩!
한빈이 천산혈랑의 거대한 몸체 위에 쓰러졌다.
“후.”
숨을 길게 몰아쉬던 한빈은 손에 잡은 가주 패를 더 깊이 박아 넣었다.
한빈은 만년한철로 만든 가주 패를 이용해 놈의 몸을 손이 가는 곳까지 헤집어 놓았다.
한참을 헤집던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뺐다.
한빈의 손에는 가주 패 대신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내단이 들려 있었다.
망설임 없이 내단을 입에 털어 넣은 한빈은 가부좌를 틀었다.
자신의 옆구리가 휑하게 뚫려 있는 상태.
이 상태라면 화타가 온다 해도 살아날 수 없었다.
게다가 회복을 나타내는 복(復)의 구결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피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기댈 수 있는 것은 기사회생의 효용밖에 없었다.
내단이 본신의 내공 혹은 용린검법의 공력에 영향을 줘야 했다.
한빈은 최대한 내단에 집중했다.
한빈은 내단이 천천히 몸에서 녹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단에 담긴 공력을 갈무리하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자신이 세상과 하직하는 것이 먼저일지는 천운에 맡기기로 했다.
* * *
막사에 도착한 심미호는 먼저 조호와 맹호사대의 무사들을 보냈다.
물론 이것은 한빈이 지시였다.
맹호사대의 무사를 먼저 보내고 이후에 다른 이들을 데리고 산자락을 수색하라는 것이 한빈의 지시였다.
타다닥.
타다닥.
심미호를 통해 지시를 받은 조호는 다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아저씨들 빨리요.”
“이놈아, 알았다.”
맹호사대의 무사들은 이제 중급에 이르렀다. 그런 이유로 산자락을 따라가면서도 이렇게 편안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빨리요. 잘못하면 주군이 위험해요.”
“허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이냐? 그 양반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분이더냐?”
“그래도 그분은 무공이 약하지 않습니까?”
“이무명 대협을 이긴 사람이 약하다고?”
“그건 운이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하긴 그렇지.”
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 최고의 겁쟁이로 각인이 된 한빈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무를 승리했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운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무사가 조호에게 말했다.
“조호가 내공이 많이 늘었구나!”
“아저씨들도 똑같잖아요. 다 주군 덕분이죠.”
조호가 씩 웃었다.
조호는 요즘 살아갈 맛이 났다.
아무런 미래도 없던 하류 인생이 한빈과의 만남으로 일류 인생이 되었다.
무공도 일류, 사랑도 일류, 모든 게 일류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불안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