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이제이 (1)
얼핏 보기에도 늑대의 세 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동시에 잿빛 늑대들이 도망쳤다.
깨갱!
파팍!
순간 흑천의 살수, 혈화가 재빨리 외쳤다.
“다들 복면과 겉옷을 벗어라!”
동시에 살수들이 돼지 피가 묻은 옷을 벗어 놓기 시작했다.
천산혈랑은 살수들에게 다가가고 절호곡의 늑대들은 빠지는 순간.
혈화는 지금이 이곳을 탈출할 적기라 생각했다.
“지금…….”
혈화는 말을 맺지 못했다.
자신의 목표인 한빈이 활짝 웃으며 자신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혈화가 외쳤다.
“넌 누구냐?”
“몰라서 물어?”
“네가 그 유명한 하북의 겁쟁이…….”
혈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끊었다.
“겁쟁이는 빼고, 차라리 망나니라고 해 줘.”
“대체 정체가 뭐냐?”
혈화가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심이 이는 것도 사실.
지금 혈화와 한빈 사이에는 늑대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고 그 핏물로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그 웅덩이에는 살수들의 살점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저렇게 웃는 것이 하북 최고의 겁쟁이라고?
살수들도 이 정도의 광경이면 토악질을 해 댈 텐데?
혈화는 검을 곧게 내밀며 한빈을 살폈다.
달빛 아래 허여멀건 얼굴은 분명 하북의 막내 공자가 맞았다.
어디부터 잘못됐을까?
그때였다.
쿵쿵!
산자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힐끔 옆을 보니 붉은 털의 늑대가 먹잇감을 발견한 듯 혈화 쪽으로 오고 있었다.
혈화가 말했다.
“일단 여길 벗어나자.”
혈화도 천산혈랑이 보통 늑대가 아닌 것을 알아챈 것이다.
혈화가 느끼는 천산혈랑의 경지는 흑천의 주인과 동급이었다.
백 마리의 잿빛 늑대보다 위험한 존재.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를 죽이는 것이 임무이지, 같이 늑대 밥이 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니 말이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 맘대로?”
“일단 여길 피해야…….”
“올 때는 너희 맘대로지만, 갈 때는 내 허락을 받아야지. 왜냐하면?”
“대체 왜?”
“여긴 내 구역이니까.”
한빈이 히죽거리듯 말하자 혈화는 앞으로 달려 나가며 외쳤다.
“다들 녀석의 목을 베고 여기를 벗어난다!”
휙휙!
모든 살수가 칼을 세우고 한빈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한빈은 행낭에서 가느다란 죽통 한 무더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들을 향해 암기처럼 쏘아 냈다.
픽!
가느다란 죽통 한 무더기가 다가오자 살수들은 재빨리 검을 그었다.
서걱!
날아오던 죽통이 허공에서 반 토막으로 갈라졌다.
문제는 갈라진 틈에서 뭔가가 튀었다는 것이다.
살수 중 하나가 외쳤다.
“독이다, 조심해라!”
소란도 잠시, 살수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아까와 똑같은 돼지 피인 것 같습니다.”
혈화가 미간을 좁혔다.
똑같은 수법에 당했다고 생각하자 부아가 치밀었다.
혈화가 한빈 쪽으로 튕기듯 날아갔다.
“죽어!”
“누구 마음대로?”
한빈이 장난치듯 답하며 ‘전광석화’의 기운을 일으켰다.
사삭!
순식간에 흐릿한 잔상만을 남긴 채 한빈의 모습이 사라졌다.
한빈이 나타난 것은 반대편이었다.
타다닥.
산자락에서 간헐적으로 발소리가 울렸다.
이것은 한빈이 의도적으로 내는 소리였다.
동서남북에서 울리는 한빈의 발소리에 혈화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쌓여 갔다.
“초절정?”
“그런 것 같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조장님.”
물론 이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돌린 후 한빈은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서 공터를 바라봤다.
“어디 갔지?”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봤던 천산혈랑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킁킁.
이상한 기척에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헉.’
한빈은 순간 숨을 멈췄다.
바로 옆에서 천산혈랑이 붉은 털을 휘날리며 한빈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는 불과 다섯 걸음.
제 꾀에 넘어갔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한빈은 살수를 속였지만, 천산혈랑에게 속은 것이다.
한빈은 검을 쥐며 잠시 천산혈랑을 관찰했다.
자신은 딱 한 입 거리도 안 되었다.
검을 만지며 한빈은 초식을 떠올렸다.
‘쾌검난마.’
‘일촉즉발.’
천산혈랑의 가죽은 웬만한 검기로도 뚫리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입을 벌릴 때가 기회였다.
천산혈랑이 대문만 한 주둥이로 킁킁 냄새를 맡았다.
살짝 입을 벌리자 아가리에서 침이 뚝 하고 떨어졌다.
그 침방울이 주먹만 했다.
전생에도 수많은 아수라장을 헤쳐 왔지만, 마수와 이렇게 가까이 마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서로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느낌에 한빈이 입꼬리를 올렸다.
바로 이런 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한빈이 작게 웃으며 천산혈랑과 마주 보고 용린검법의 초식을 전개하려 하고 있을 때였다.
사사삭.
뒤쪽에서 살수들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마침 바람에서 혈향이 살짝 묻어 왔다.
살수들에게 뒤집어씌운 돼지 피의 냄새였다.
천산혈랑이 바로 반응했다.
한빈은 관심도 없다는 듯 머리를 휙 돌리더니 수풀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휴, 졸지에 늑대 밥이 될 뻔했네.”
한숨을 몰아쉰 한빈은 조심스럽게 천산혈랑을 따라갔다. 사실 천산혈랑에게 용린검법의 초식을 펼친다고 해도 팔이 멀쩡할지 확신은 없었다.
잠시 후 한빈이 목격한 것은 아홉의 살수를 발견한 천산혈랑이었다.
놈은 영물인 듯 바로 살수들에게 달려들지 않고 그들의 경지를 추측하며 그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살수들은 달랐다.
아홉이라는 숫자는 그들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이 되었다.
그 약점은 바로 자만(自慢)이라는 두 글자였다.
물론 혈화만은 달랐다.
“다들 물러…….”
혈화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나머지 살수는 일제히 검을 뽑았다.
스릉. 스릉.
서로 눈빛을 교환한 여덟 명의 살수는 천산혈랑을 향해 달려들었다.
혈화도 할 수 없다는 듯 검을 뽑았다.
스릉.
가까이 마주하고 보니 흑천의 주인보다는 경지가 낮다고 추측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볼 만했다.
정체 모를 마수를 해치우고 내단을 취한다!
이것이 혈화의 목표였다.
마수와 아홉 살수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 경극을 보듯 전투를 관전하던 한빈이 하품을 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천산혈랑과 살수의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천산혈랑의 우세.
붉은 검기를 두른 그들의 칼도 천산혈랑의 가죽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 살수도 빠른 동작으로 천산혈랑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살수들의 호흡이 거칠어졌기 때문이다.
한빈은 재빨리 행낭에서 야행복을 꺼냈다.
이것은 맨처음 마주한 살수에게서 빼앗은 옷이었다.
옷을 입고 보니 흑천의 살수와 똑같았다.
달빛만을 의지해서 본다면 자신과 살수를 구별할 방법은 없었다.
거기에 더해 천산혈랑이 거대하고 빠른 만큼 살수들은 지금 자신의 동료가 어디 있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오직 검을 휘두르며 합격진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이 아니라 감각으로 천산혈랑에 맞서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혈화가 외쳤다.
“후퇴를 준비하라!”
순간 그들은 검을 휘두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때 무리 중 하나가 외쳤다.
“조장, 저건 천산혈랑입니다. 저것만 잡으면 평생 먹고삽니다. 저 마수에 흑천의 명예가 걸려 있습니다.”
전투 중이라 누가 말했는지도 모르는 상황.
살수들의 눈빛이 탐욕에 빛났다.
후퇴하자고 말했던 혈화마저도 눈을 빛내며 다시 외쳤다.
“정정한다. 천산혈랑을 잡는다!”
물론 앞서 천산혈랑을 잡자고 외친 이는 한빈이었다.
한빈은 그들의 틈에 섞여 교묘하게 천산혈랑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획! 획!
챙! 챙!
천산혈랑의 발톱은 마치 보검처럼 그들의 검을 막아 냈다.
하지만, 살수들의 수적 우세가 천산혈랑에게 가끔 빈틈을 보이게 했다.
그때마다 살수들과 한빈의 검이 천산혈랑의 가죽을 그었다.
피슉!
하지만, 털만 뭉텅 썰릴 뿐이지 효과는 없었다.
한빈은 천산혈랑의 무력을 한 단계 더 위로 올려 평가해야 했다.
살수들 틈에 섞인 한빈이 재빨리 초식을 떠올렸다.
‘쾌검난마.’
‘전광석화.’
한빈의 검이 다시 빨라졌다.
현란한 한빈의 검에 살수들도 자극받았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천산혈랑의 다리를 묶어라!”
서로 의견을 교환한 살수들이 이를 악물고 천산혈랑에 달려들었다.
한빈은 그들의 신호와는 관계없이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소임이란 당연히 눈앞에 일렁이는 점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꽤 많은 수의 일렁이는 점.
진하게 보이는 점과 흐릿하게 보이는 점이 공존했다.
하지만, 진하게 보이는 점을 공격했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상급 구결을 얻으려면 깊은 공격을 해야 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대상마다 구결을 얻는 방법은 다른 것 같았다.
한빈은 작전을 바꾸어 흐릿한 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푹!
드디어 흐릿한 점 하나를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가죽을 뚫고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한빈은 글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푹!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인급 구결 사(死)를 획득하셨습니다.]
[인급(人級) - 회(回), 기(起), 사(死)]
이제 인급 구결의 완성까지 하나만 남은 것 같았다.
흐릿한 점이 인급 구결이라면?
진한 점은 상급 구결일 것이었다.
한빈이 외쳤다.
“천산혈랑의 속도가 느려졌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다 같이 힘내자. 흑천의 명예를 위해!”
그 외침에 살수들이 기세가 살아났다.
“가자!”
“내단을 취하자!”
한빈은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월아를 막사에 놔두고 온 게 아쉬웠다.
월아는 너무 눈에 띄는 검이기에 평범한 검 한 자루와 단검 몇 개만 들고 왔다.
아직까지 쾌검난마의 효용이 몸에 흐른다.
마(魔)를 상대할 때 공격력이 십 할 증가한다는 효과답게 지금 유효한 공격을 가하는 것은 한빈밖에 없었다.
한빈은 쾌검난마의 기운을 이용해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슉.
슉.
한빈의 공격에 맞춰 살수들도 움직였다.
뒤섞여 공격하는 살수와 한빈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춘 것처럼 자연스러운 합격진을 구사했다.
이것은 왜일까?
전생의 귀검대는 살수 조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귀검대에게 흑천이나 살막의 합격진을 훈련시킨 것이 한빈이었으니 이런 움직임은 당연했다.
상기된 혈화가 외쳤다.
“얼마 남지 않았다. 천산혈랑의 내단을 취하자!”
“와!”
혈화와 살수들은 자신의 임무도 잊은 채 천산혈랑을 공략해 나갔다.
이제 전세는 살수 쪽으로 기울었다.
다시 천산혈랑을 바라본 한빈이 다시 검을 뻗었다.
푹!
다시 일렁이는 점에 검이 박혔다.
[……]
[인급(人級) - 회(回), 기(起), 사(死), 생(生)]
새로운 인급 구결, 생(生)이 들어오며 글귀가 나타났다.
[흩어진 용혈신공의 구결 중 하나의 초식을 완성했습니다. 초식이 활성화됩니다.]
[인급(人級) 초식 기사회생을 획득하셨습니다.]
[최초로 인급(人級) 초식을 획득으로 용혈지체에 한 걸음 더 다가섰습니다.]
용혈지체라?
이것은 처음 보는 글귀였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재빨리 기사회생을 확인했다.
[기사회생(起死回生) - 시전자의 상처 및 체력을 구 할 회복시킵니다. 열두 시진 간격으로 시전할 수 있습니다. 필요 공력 십오 년.]
구사일생의 효용을 담은 구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