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사냥의 시간 (5)
아홉 개의 검은 그림자 중 하나가 외쳤다.
“저기다!”
그와 동시에 아홉 개의 검은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한참 뒤에도 심미호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우-울!
심미호는 그때야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놀랄 일들의 연속이었다. 심미호는 이것이 강호라는 세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하북팽가라는 테두리가 우물로 보였다.
자신은 개구리고 말이다.
‘그렇다면 주군은?’
심미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심미호는 막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주군과 아홉 명의 살수가 붙는다면?
결과는 뻔했다.
막사로 돌아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 맞았다.
그때 한빈이 전한 쪽지가 떠올랐다.
품속에서 쪽지를 꺼내 펼친 심미호의 눈이 커졌다.
쪽지 속에는 이미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 * *
한빈은 적당한 흔적을 남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다시 나타난 한빈은 희미한 그림자를 만든 채 달렸다.
이제는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라 기운 달빛이 만든 한빈의 그림자는 산자락 끝까지 늘어져 있었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한빈은 자신이 공터 앞으로 걸어갔다.
두리번거리던 한빈은 바위를 확인하고는 그 위에 준비한 물건을 올려놨다.
천으로 두르니 그것은 마치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모든 작업을 마친 한빈은 기척을 감추고 살수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홉 개의 검은 그림자가 한빈의 시야에 나타났다.
한빈은 천천히 그들을 살폈다.
절정이 둘에 나머지는 일류였다.
문제는 절정 둘 중 하나가 초절정을 앞둔 살수라는 점이다.
살수가 절정 중 상급이라면?
일반 무인으로 따지만 초절정급이라는 말이었다.
뭐, 무위는 상관이 없었다.
살수를 해치우는 일을 맡을 녀석은 따로 있었으니까.
한빈은 살수들이 바위 쪽으로 다가가기를 기다렸다.
사삭.
사삭.
살수들의 풀 밟는 소리가 공터 주변으로 울려 퍼질 때 누군가 외쳤다.
“저기다!”
동시에 살수들이 검을 뽑았다.
스릉! 스릉!
풀잎이 조각날 것 같은 날카로움이 소리에서 묻어 나왔다.
살수들이 점점 바위 쪽으로 다가가자 한빈이 다리에 찬 단검을 들었다.
‘하나, 둘…….’
그들과 바위의 간격을 가늠하던 한빈이 용린검법의 새로운 초식을 운용했다.
‘백발백중’
단전이 아닌 온몸에서 용린의 기운이 휘몰아치며 손끝에 전해지자 한빈은 단검을 던졌다.
휙!
단검이 바람을 가르며 바위 쪽으로 날아갔다.
그중 초특급 살수로 보이는 자가 외쳤다.
“습격이다!”
순간 모두가 단검이 날아오는 쪽으로 검을 겨눴다.
달빛을 받은 단검이 마치 은색 뱀처럼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정도라면 충분히 쳐 내고도 남을 위력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초특급 살수가 단검을 쳐 냈다.
챙!
살수의 검에 막혀 떨어질 줄 알았던 한빈의 단검이 묘한 궤적을 그리며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마치 목표물과 내공으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보니 내공 일 년의 값어치가 있는 초식이 맞았다.
목표는 한빈보다 경지가 높은 초특급 살수가 아닌 바위에 올려놓은 물체였다.
즉, 목표물의 경지가 낮을 경우, 백발백중이란 말이었다.
한빈이 던진 단검은 끝내 바위에 올려 둔 물체에 박혔다.
펑!
“다들 피해라!”
초특급 살수들의 외침에 나머지 살수들이 재빨리 엎드렸다.
초특급 살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단검을 던진 궤적으로 봐서 함정에 빠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초특급 살수의 이름은 흑천 내에서 혈화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현재 나이는 열여덟.
흑천 내에서 그녀의 나이와 진짜 얼굴을 아는 이는 흑천의 주인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번에 맡은 임무는 간단했다.
하북 최고의 겁쟁이로 불리는 하북팽가의 막내를 해치우는 일이었다.
그 겁쟁이의 목을 따는 것은 닭의 목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임무.
사실 그녀가 이 임무를 맡은 것은 하북성으로 마실 나온다는 의미가 강했다.
빨리 임무를 마친 후, 필요한 의복을 맞추고 유명한 객잔에서 음식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임무가 꼬여 버렸다.
겁쟁이의 목을 따라고 보낸 살수 둘은 자취를 감추었고 일급 경보를 보내왔다.
그 흔적을 쫓다 보니 갑자기 습격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단검이 박힌 곳에서 무지막지한 암기가 쏟아질 것이 뻔했다.
혈화가 생각하는 부상자는 삼분지 일.
엎드려 있던 혈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하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코를 실룩였다.
“뭐지?”
고개를 갸웃한 혈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바라봤다.
폭발이나 암기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때 수하가 달려왔다.
“조장, 이상합니다.”
“말해 봐라.”
“등 뒤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돼지 피 같군.”
“네, 맞습니다. 왜 돼지 피가 사방에 튀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주변을 경계하라!”
혈화가 검을 세우며 외치자 살수들이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대형을 갖추었다.
혈화는 수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곳을 재빨리 벗어난다.”
그때 불쾌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아우-울!
분명 늑대의 울음이었다.
그제야 이곳이 절호곡의 잿빛 늑대가 설치는 현장이라는 것을 깨달은 혈화가 이를 악물었다.
그것도 잠시 표정을 수습한 혈화가 수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늑대와 맞서지 않고 천천히 빠져나간다.”
“…….”
수하들이 대답 대신 조용히 포권했다.
하지만, 혈화와 살수들은 몇 걸음 가지 못해 멈춰야 했다.
늑대들이 빽빽하게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쪽에 있는 늑대뿐이 아니었다.
뒤쪽에는 수십 쌍의 눈동자가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늑대 한 마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혈화를 향해 뛰어들었다.
아우-울!
동시에 혈화는 검을 그었다.
쉭!
늑대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툭.
그것은 사람과 늑대의 전쟁, 아니 개싸움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였다.
* * *
멀찌감치 떨어져 개싸움을 구경하던 한빈은 행낭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말린 무였다.
이것은 천수장에 심어 놓은 극양지기를 품은 무말랭이.
내공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영약이었다.
다만, 한빈에게는 묘하게 이 영약이 쓸모가 없었다.
아마도 용린검법의 공력에 실제 몸의 내공이 제한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한빈은 시간 날 때마다 버릇처럼 이것을 씹고 있었다.
무말랭이를 오물오물 씹으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싸움을 바라보던 한빈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뱉었다.
“정면으로 붙었으면 뭐 될 뻔했군.”
한빈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지금 보니 한빈이 절정 상급이라 예상한 살수의 경지는 그냥 상급이 아니라 최상급에 가까웠다.
얄팍한 벽 하나만 넘으면 초절정의 단계에 들어선다는 말이었다.
저들과 한빈이 맞붙는다면?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안 되어 육포 조각이 될 것이 불 보듯 훤했다.
한참을 보던 한빈은 자신의 소매를 다시 확인했다.
쿵쿵.
냄새를 확인한 한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흑천에게 쓴 핏물은 돼지 피와 꿀을 적절히 혼합한 액체였다.
돼지 피로 절호곡의 늑대를 유인할 수 있다면 이 많은 인원이 동원되지 않았을 터였다.
한빈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절호곡의 늑대에게 딱 맞는 액체를 흑천의 무리에게 뒤집어씌웠다.
아마 지금은 사냥꾼들도 모를 비법이었다.
만약, 이 비법을 안다면 늑대를 토벌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인원을 동원하지 않았을 터였다.
살수들은 이제 부처님, 아니 한빈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한빈의 웃음이 짙어질 때였다.
갑자기 늑대들이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뭐지?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살수 앞에는 늑대의 사체가 담장 높이로 쌓여 있었다.
같은 무리가 죽었다고 도망친다?
그렇다면 절호곡의 늑대가 아니었다.
절호곡의 늑대가 도망칠 때는 놈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과 마주했을 때였다.
거대한 힘이라?
한빈이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깨갱! 깽!
늑대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뒷걸음쳤다.
이것은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광경이었다.
이상한 것은 늑대들이 살수가 아닌 다른 쪽을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빈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을 향했다.
혹시 흑천의 주인이 직접?
현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추리였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어깨를 살짝 떨었다.
이상한 기척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살수들의 기척이 아닌 마기(魔氣)였다.
한빈은 달빛에 의지해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마기를 느낄 만한 곳은 없었다.
그때였다.
한빈의 눈이 커졌다.
달빛을 받은 바위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바위도 아니고 붉은 바위였다.
한빈이 괴상한 붉은 바위를 보고 있을 때였다.
바위가 흔들거리더니 네 발로 섰다.
한빈은 재빨리 숨을 죽였다.
바위의 정체는 핏빛 짐승이었다.
한빈은 옆 소나무에서 송진을 긁었다.
냄새를 없애기에 이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몸에 송진을 바른 한빈은 짐승을 관찰했다.
집채만 한 짐승의 정체는 핏빛 늑대였다.
그때 핏빛 늑대가 울음을 토했다.
아우-울!
마치 사자후를 토하는 듯한 내공마저 느껴졌다.
한마디로 마수.
한빈은 이전 생과 현재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의문 몇 개를 다시 떠올렸다.
전생에 절호곡 늑대 사냥에서 무인 스무 명 이상이 죽었던 일.
현생에서 절호곡의 늑대가 민가까지 내려온 일.
모두가 저 핏빛 늑대 때문인 것 같았다.
한빈은 자신의 기억에서 늑대의 정체를 꺼냈다.
집채만 한 크기와 피처럼 붉은 털.
그리고 저 괴기스러운 눈빛.
어디선가 들었다.
생각도 잠시, 한빈은 그 이름을 떠올렸다.
“천산혈랑(天山血狼)!”
그것은 신장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하는 그곳, 천산에 산다고 전해지는 마수의 이름이었다.
‘천산혈랑이 왜 여기에?’
놀람도 잠시,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천산혈랑의 핏빛 몸 곳곳에 나 있는 일렁이는 점을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산혈랑이라면?
내단!
지금 한빈에게는 용린검법의 내공과 실제 내공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용린검법의 공력은 현재 열 개.
더 이상 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실제 단전의 내공도 십 년 정도이다.
그렇다면?
용린검법의 공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내단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천산혈랑을 잡을 수 있을까?
한빈은 재빨리 모든 의문을 털어 냈다.
‘저건 무조건 잡아야 해!’
게다가 한빈은 용혈신공의 구결 중 쾌검난마의 초식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안배 같았다.
주먹을 꽉 쥔 한빈은 바로 뒤돌아섰다.
역시 혼자서 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였다.
대충 계산을 하면, 초절정 무인 하나에 절정 다섯은 와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산혈랑을 바라보던 한빈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저 마수를 상대할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뭐, 묘책이랄 것도 없었다.
살수들의 상대가 절호곡의 늑대에서 천산혈랑으로 바뀔 뿐이었으니까.
그때 저 멀리서 바위가 쓱 하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