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사냥의 시간 (4)
안심하라는 한빈의 말에도 심미호가 소매로 입을 가리며 물었다.
“지금, 이 연기가 산공독 아닌가요? 후.”
말을 마친 심미호가 들이켠 숨을 몰아내려 했다.
한빈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위험하게 그걸 이런 데다 왜 풀어?”
“그럼요?”
“부대주가 직접 얘네들한테 산공독 먹여 놓고 왜 모른 척해?”
“제가요?”
“혹시 그러면…….”
“부대주가 생각한 게 맞아.”
심미호는 사냥꾼에게 나눠 준 음식을 떠올렸다. 하지만, 의문이 그 뒤를 이었다.
“멀쩡하다가 왜 지금에서야······?”
그 말에 답하듯 한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원래 폭약도 심지에 불을 붙여야지 터지잖아.”
“그럼 아까 그 연기가…….”
그때였다.
두 명의 살수가 동시에 울컥하고 피를 쏟았다.
“컥, 이런 비겁한!”
“쿨럭, 저런 썩을…….”
그들의 아우성에 맞춰 한빈이 지시했다.
“제압해. 참, 아혈은 놔둬. 심문해야 하니까.”
동시에 심미호가 달려가 둘의 마혈을 제압했다.
툭.
툭.
두 번의 소리에 맞춰 살수 둘이 수수깡 꺾이듯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한빈이 모닥불 옆에 쓰러진 두 명의 살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주변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한빈이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빈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살수의 머리맡에 섰다.
어차피 정체는 이미 알고 있었고 지금 중요한 것은 놈들에게 일렁이는 점이었다.
한빈이 심미호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한 놈은 심 부대주가 알아서 처리해.”
한빈이 살수 중 하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물론 그 살수를 심미호에게 맡긴 것은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없기 때문이다.
한빈은 하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인생의 중요한 기점마다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나오는 느낌이다.
한빈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심미호가 포권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다른 살수를 옆으로 끌고 갔다.
심미호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한빈은 우두머리 살수를 보며 웃었다.
“왕거니네. 쩝.”
이건 진심이었다.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알 수 없는 말에 정신을 차린 우두머리 살수가 눈매를 좁혔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넌 알 거 없고, 일단 시작하지.”
“잠시만, 기다려 봐라.”
우두머리 살수는 마혈을 제압당했음에도 움찔거렸다.
하지만, 한빈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주먹으로 우두머리 살수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그러나 한참 지난 후 문제가 생겼다.
용린검법이 머릿속에 꽂히고 처음 보는 글귀가 떴기 때문이다.
[구결 획득에 실패하셨습니다.]
실패라?
의문도 잠시, 한빈은 멈추지 않았다.
열 번 패서 안 넘어가는 나무, 아니 살수 없다는 것이 한빈의 생각이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한빈은 주먹을 멈추고 우두머리 살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쩝.”
아무리 노력해도 구결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간을 좁힌 한빈의 모습에 우두머리 살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러니까……. 일단 대화부터 하자!”
한빈의 행동은 살수인 그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표정을 보면 궁금한 것이 없었다.
보통은 누가 시켰냐, 어디 소속이냐 등부터 물어봐야 정상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정보를 다 알아낸 후 죽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한빈은 그저 고문을 위한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대체 왜?
대체 무엇 때문에?
우두머리 살수의 머릿속에는 같은 질문만 맴돌았다.
그때 한빈이 활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한빈은 옆에서 적당한 나무토막을 잡아 우두머리 살수의 입에 욱여넣었다.
우두머리 살수는 더욱 당황했다. 마치 입안에 넣은 독단을 깨물지 못하게 방지하려는 것 같았다.
그 상태에서 한빈은 우두머리를 바라보며 뭔가 까먹은 게 있다는 듯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순간 우두머리 살수의 눈이 다시 떨렸다.
살수 인생에서 최대의 위기를 맞은 그의 귓가에 한빈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
그 소리에 우두머리 살수는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한빈은 그의 아혈마저 제압했다.
픽!
우두머리 살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뭔가 느낌이 싸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빈이 다리에 찬 단검을 뽑았다.
스륵.
단검과 우두머리 살수의 몸에 나타난 점을 번갈아 본 한빈이 손을 뻗었다.
푹!
단검이 박히자 글귀가 떴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중, 기(起)를 획득하셨습니다.]
한빈은 그제야 정확한 구결의 획득 방법을 알아챘다.
상위 구결일 경우는 조금 더 깊이 파내야 하는 것이었다.
방법은 알아냈고, 이제는 최대한 살수가 죽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살수가 죽으면 구결도 사라질지 모르는 일.
한빈의 눈과 손이 바빠졌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응용편 구결 중 백(百)를 획득하셨습니다.]
······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복(復)을 획득하셨습니다.]
한빈의 예상대로 왕거니가 맞았다.
한빈은 금을 캐는 광부의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우두머리 살수의 몸을 단검으로 후벼 팠다.
푹! 푹!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심미호가 미간을 좁혔다.
‘저게 막내 공자의 본모습이었던 말인가?’
피만 보면 기절하던 막내 공자가 어느 날 가주에게 칼까지 받았다.
그러고 나서는 살수를 알아보고 도리어 뒤통수를 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의 모습은 마치 고문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 아니던가.
순간 소름이 심미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삼 공자의 처소에 함정을 파 놓은 게 주군의 심복이 아니라 주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대체 주군의 정체는…….’
심미호가 눈가를 파르르 떨고 있을 때 그녀가 맡은 살수가 소리쳤다.
“다 말하겠습니다. 다 말하겠습니다!”
심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문은 시작도 안 했는데 다 말하겠다니?
하지만, 살수의 시선을 보고 심미호는 그 전말(顚末)을 알았다.
심미호가 맡은 살수는 덜덜 떨며 한빈이 가하는 고문을 보고 있었다.
이해는 갔다.
뭐, 심미호가 봐도 지금 한빈의 모습은 두려웠으니까.
누가 봐도 고문을 위한 칼질이 아닌 칼질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모두가 한빈을 보며 당황할 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앞을 바라봤다.
[복(復). 복(復), 복(復), 복(復), 복(復)]
회복을 나타내는 구결이 다섯 개로 늘었고.
[인급(人級) - 회(回), 기(起)]
인급 구결이 두 개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응용편 초식 한 개를 완성했다.
[흩어진 용혈신공의 구결 중 하나의 초식을 완성했습니다. 초식이 활성화됩니다.]
[백발백중(百發百中) - 원하는 곳에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자신보다 경지가 높을 경우 효과가 없습니다. 필요 내공 일 년.]
자신보다 경지가 높을 경우라?
거기에 필요 내공이 일 년이라는 조건을 생각하면 쓸모없는 초식에 가까웠다.
하지만, 인급 구결이 두 개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한빈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쿵쿵.
조금만 더 노력하면 용린검법의 새로운 경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한빈이 심문하던 우두머리 살수의 고개가 돌아갔다.
털썩.
정신을 잃은 것이다.
한빈이 심미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놈이 정신을 잃었네. 심 부대주가 힘내 줘야겠어.”
“주군, 심문은 끝났어요.”
“시간도 별로 안 지났는데 벌써 끝났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시작도 하기 전에…….”
한빈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도리어 심미호가 당황했다.
“주군, 아까 벌써 다 실토했어요. 얘네들 흑천이랍니다. ······의뢰자는 모른답니다.”
내용을 술술 읊어 나가던 심미호가 자신의 발밑에 있는 살수를 가리켰다.
흑천은 중원의 사대살수 조직 중 하나였다.
천리 표국의 낭인왕이 준 정보 그대로였다.
한빈은 남은 살수를 살폈다.
혼자 살아남은 살수는 마혈을 제압당했는데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한빈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심 부대주야. 같이 오길 잘했어. 든든하네.”
“그게, 저는 한 게 없고…….”
“겸손하기는. 누구도 심 부대주처럼은 못 해. 손도 안 대고 다 불게 만들다니, 무공의 경지로 말하면 초절정 수준을 뛰어넘는 고문 기술이야.”
“아, 그게…….”
심미호는 말끝을 흐리며 입을 딱 벌렸다.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한빈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심미호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을 때 한빈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시작해야겠네.”
“뭘 시작해요?”
“사냥.”
“무슨 사냥이요? 살수가 또 있나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한빈은 씩 웃으며 중천에 뜬 달을 바라봤다.
그가 생각한 진정한 사냥은 지금부터였다.
한빈은 심미호가 심문하던 살수의 옷을 벗겼다.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전리품은 챙겨야지.”
“차라리 목을 베어 가시죠.”
“얘네들 수급을 가져가서 뭐 해? 괜히 짐만 되지. 심 부대주도 나 피 싫어하는 거 알잖아.”
“아, 그건 그렇죠.”
심미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먼 산을 바라봤다.
피를 싫어하는 것은 예전 주군의 모습이었다.
한빈은 옷을 자신에 행낭에 넣고는 심미호에게 말했다.
“한 곳에 놓고 살짝 나뭇잎으로 덮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정리할까요?”
“괜찮아.”
말을 마친 한빈은 흙을 발로 차서 모닥불을 껐다.
모닥불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에서 한빈이 위쪽을 가리켰다.
위쪽 나뭇가지로 가자는 신호였다.
한빈의 말대로 나뭇가지로 오른 심미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군, 뭐 하시는 거예요?”
“미끼를 만들어야지.”
“미끼요?”
“뭐, 자기네들 죽을 때 되면 알아서 도움을 청하겠지?”
“다른 살수들이 없다면요?”
“늑대 밥이 되는 거고.”
“아.”
한빈의 계획이 너무 간단했기에 심미호는 탄성을 흘렸다.
그녀는 이번 임무를 통해 주군 한빈의 평가를 다시 내려야 했다.
심미호가 눈매를 좁히고 있을 때였다.
정신을 잃었던 우두머리 살수가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비녀 굵기의 피리였다.
절정의 살수가 피리를 불었다.
피-익!
마치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같았다.
한빈이 조용히 속삭였다.
“심 부대주는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기다려. 그리고 이건 한 시진 후에 펴 보고.”
“존명!”
심미호가 작게 답하자 한빈은 쪽지를 건넨 후 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바로 우두머리 살수의 혈도를 다시 제압했다.
이어서 한 행동은 그들을 땅에 반쯤 묻고 나뭇잎으로 다시 덮은 것이다.
모든 일을 마친 한빈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모든 모습을 나무 위에서 살피던 심미호의 눈은 한계까지 커졌다.
놀람도 잠시 얼마 안 지나서 검은 그림자 아홉 개가 나타났다.
스르륵.
마치 환영처럼 나타난 아홉 개의 검은 그림자가 꺼진 모닥불 주위에 잠시 머물렀다.
자세히 보니 지금 제압한 살수들과 복장이 같았다.
그들도 흑천의 살수라는 말이었다.
그들은 주변의 흔적을 살폈다.
묻어 놓은 살수는 심미호를 확인하지 못한 채 한빈이 만들어 놓은 흔적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정말 묘한 일이었다.
다른 살수들의 등장에 모골이 송연해진 심미호가 숨을 죽였다.
지금 나타난 검은 그림자는 모두 절정으로 보였다.
기척을 들키면 바로 죽음이었다.
심미호가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