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사냥의 시간 (3)
한빈이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천리 표국에서 주는 선물이었다.
대가 없이는 절대로 정보를 주지 않는 암상이 한빈에게 호의를 베푼다?
이것은 부탁하지도 않은 선물이었다. 이런 고급 정보를 줬다는 것은 낭인왕이 한빈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일까?
전생에도 첫 만남부터 낭인왕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었다.
뭐, 한빈에게 잘해 준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었다.
어깨를 으쓱한 한빈은 모닥불에 쪽지를 던져 넣었다.
* * *
늑대 토벌 임무에 사냥꾼이 배치되자 관군과 정의맹 무사를 중심으로 한 인원은 정문산으로 올랐다.
그들의 임무는 절호곡에서 정문산까지 활동하는 늑대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절호곡의 늑대들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몸 전체에 잿빛 줄무늬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몸집은 보통 늑대의 두 배나 되었다.
잿빛 늑대 한 마리와 일류 무사 하나가 비슷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무인이라면 늑대의 강함에 침을 흘릴 테고.
사냥꾼이라면 늑대 목에 걸린 현상금을 탐낼 것이겠지만, 한빈은 잿빛 늑대 사냥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한빈이 사냥해야 할 것은 늑대가 아니었으니까.
임무의 특성상 스무 개로 나눠진 무리가 정문산에 포위망을 구축했다.
정의맹 무사들과 관군을 보조하면서 늑대들을 모는 것이 사냥꾼들의 임무였다.
삐익!
뿔피리 소리가 울리자 임무에 투입된 무사들이 포위망을 좁혀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잿빛 늑대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몸통은
사냥꾼들이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픽!
픽!
하지만, 화살은 빗나가기 십상이었다.
잿빛 늑대의 움직임을 보니 일류 무사와 경지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묘하게도 그중에는 사람을 겁내지 않는 늑대가 있었다.
무리 생활을 하는 늑대가 홀로 움직인다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펄쩍!
사냥꾼을 향해 달려드는 늑대를 심미호가 횡으로 그었다.
하북팽가의 왕자사도(王字四刀) 초식이다.
왕이 들어가는 이름 그대로 횡적 움직임을 중시한 도법이며 주로 수비에 쓰인다.
왕자를 쓰기 위해서는 사 획이 필요하다.
횡으로 긋는 삼 획과 종으로 긋는 한 획의 조화.
심미호는 왕자사도의 초식으로 다가오는 늑대의 앞발을 베었다.
끼깅!
마치 몽둥이를 맞은 개처럼 늑대가 꼬꾸라졌다.
동시에 심미호의 도가 아래로 향했다.
빡!
두개골 으깨지는 소리에 한빈이 사냥꾼들에게 외쳤다.
“늑대의 사체를 정리하시죠.”
사냥꾼이 사냥용 박도를 꺼내 잿빛 늑대의 머리를 취했다.
한빈은 유심히 그들의 칼 놀림을 봤다.
서걱!
목을 긋는 그들의 동작은 분명 살수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났다.
기척은 숨겼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묻어 나오는 직업의 향기.
한빈이 속으로 웃었다.
‘날 물로 보네.’
하긴, 그들이 보기에 한빈은 무림 초출.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수풀 사이를 비추던 태양이 서쪽 너머로 사라지려 할 때 옆에서 신호가 울렸다.
땡!
땡!
포위망을 구축한 채 현재 위치에서 머무르라는 신호였다.
한빈이 눈짓하자 심미호도 관군에게 받은 종을 울렸다.
땡!
종소리가 산자락을 뒤덮자 늑대 사냥에 열을 올리던 무사들도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한빈의 사냥은 지금부터였다.
모닥불을 미리 피워 놓고 야영 준비에 들어간 팽가 식구들의 옆에 한빈이 털썩 앉았다.
한빈이 심미호에게 말했다.
“심 부대주, 부탁이 있는데.”
“말씀하세요. 주군.”
“아무래도 하북팽가의 면이 안 서는 것 같아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다른 가문과 문파에서 잡은 늑대에 비하면 너무 적잖아.”
“사냥이 끝나려면 아직…….”
“그래도 그게 아니잖아. 내가 늑대 좀 몰아올게.”
한빈의 말에 다른 무사들과 사냥꾼들이 웅성댔다.
“지금 산을 오르신다고요?”
수호사대에서 나온 무사가 황급히 말리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말을 마친 한빈이 심미호에게 턱짓했다.
“심미호 부대주와 동행하겠다.”
“준비하겠습니다.”
심미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한빈이 말해 준 계획에 있었기 때문이다.
* * *
준비를 마친 둘은 어둠이 내린 산자락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본 심미호가 물었다.
“주군, 살수라니 대체 무슨 말씀이에요?”
“우리에게 온 사냥꾼 셋 다 살수처럼 보인다.”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냥꾼으로 보이는데요.”
“심 조장은 그들의 손을 봤나?”
“손이라고요?”
“그들의 손은 일반 무인과 전혀 다르더군, 나중에 심 부대주의 손과 사냥꾼들의 손을 살펴보면 알게 될 거야.”
“…….”
심미호는 고개만 갸웃했다.
난데없이 손을 비교해 보라니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
그리고 한빈은 뭔가 생각난 듯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강북 지역 사냥꾼의 근육은 한쪽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있지.”
“근육이요?”
“활을 당기고 상상을 초월하는 장력의 덫을 놓으려면 한쪽 어깨의 근육을 한계까지 써야 하니까. 무공을 익힌 무인과는 외형부터 다르니 구별하기가 힘들지는 않지.”
“아.”
이번에는 심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도 모르는 이런 구별법을 주군인 막내 공자가 어떻게 아느냐는 점이다.
그때였다. 한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등에 멘 행낭을 풀었다.
한빈은 주변에 떨어진 돌과 나뭇가지를 주워서 모닥불을 피울 장소를 만들고 화섭자로 불을 붙였다.
“주군, 차라리 돌아가서…….”
“잠시만.”
한빈은 행낭에서 의복을 꺼냈다.
심미호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옷 갈아입으시게요?”
“아니.”
고개를 흔든 한빈은 근처에 있는 굵은 나뭇가지 몇 개를 주웠다.
한빈은 나뭇가지에 옷을 입히더니 이내 앉아 있는 사람 모양으로 만들었다.
한빈의 행동에 심미호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사냥?”
“늑대를 이렇게 잡아요?”
“늑대 말고 살수!”
“주군이 아까 말한 사냥꾼이요? 그들이 왜 여기로 와요?”
“기다려 보면 알아. 환영 인사를 하려면 양념도 좀 쳐야지.”
모든 행동을 마친 한빈이 위를 가리켰다.
나무 위로 올라가자는 것이었다.
심미호는 바로 머리 위에 있는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한빈도 반대편 나무에 뛰어올랐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한빈이 반대편 나무 위에 앉은 심미호를 바라봤다.
이제 사냥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사사삭.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미호가 눈매를 좁혔다.
갑작스러운 변화.
이것은 동물의 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사람의 발소리.
불길한 예감이 심미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심미호가 다급히 한빈을 바라봤다.
동시에 심미호가 입을 딱 벌렸다.
주군 한빈이 허허롭게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빈이 보고 있는 것은 용린검법의 초식이었다.
[기본편]
······
[응용편]
[전광석화(電光石火)]
[일촉즉발(一觸卽發)]
[쾌검난마(快劍亂魔)]
[인급(人級)구결 – 회(回)]
지금 쓸 수 있는 초식은 세 개.
동시에 쓸 수 있는 초식은 아직 두 개가 한계였다.
‘전광석화.’
‘일촉즉발’
지금 사용할 초식을 확인한 한빈은 입술에 검지를 댔다.
심미호에게 다시 주의를 준 것이다.
풀 밟는 소리가 들린 뒤 한참 후 검은 그림자 셋이 모닥불 주변에 나타났다.
셋이 동시에 대롱을 들었다.
픽!
독침으로 보이는 가느다란 바늘이 모닥불 옆에 있는 허수아비에 박혔다.
셋이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그들의 소리는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일급 살수.’
한빈이 측정한 그들의 경지였다.
검날이 달빛을 받아 시퍼런 예기를 뿜어냈다.
소리 없이 허수아비 뒤로 돌아간 살수 둘은 검을 찔렀다.
그리고 하나 남은 살수는 허수아비의 목을 베었다.
독침을 쓰고 검을 찔러 넣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뎅강!
힘없이 바닥을 구르는 나무토막!
살수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야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우두머리 살수가 외쳤다.
“기습에 대비하라!”
하지만, 한빈이 빨랐다.
나무 위에서 화살처럼 날아온 한빈이 손을 뻗었다.
일촉즉발에 전광석화!
지나가는 풍경이 느릿해 보일 정도였다.
푹!
푸른 검기가 일렁거리는 검이 살수의 목덜미를 뚫었다.
순간 남은 두 명의 살수가 한빈을 향해 검을 그었다.
한빈이 살수 목에 박힌 검을 빼내며 몸을 숙였다.
휙!
살수의 검이 한빈이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뎅강!
그 자리에 있던 한빈에게 꿰뚫렸던 살수의 목이 달아났다.
난데없는 상황에 동료를 잃은 살수 둘이 천천히 한빈에게 다가오며 복면을 벗어 던졌다.
우두머리 살수가 옆을 보며 나지막이 외쳤다.
“정체를 숨길 필요 없다. 포위하라!”
동시에 우두머리 살수의 검에서 붉은색 검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한빈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절정?”
“그래, 이제 넌 죽은 목숨이다.”
“혹시 내 목이 얼만지 물어봐도 될까?”
“그건 염라대왕한테 물어봐라.”
“내가 바빠서 그건 힘들고, 너희가 먼저 가서 안부나 전해 줘.”
“소문대로 단단히 미쳤구나.”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심미호는 몸을 움찔댔다.
이건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절정의 살수와 주군인 한빈이 붙는다면, 그건 안 봐도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내려가서 한빈을 도울 수 없었다.
내려오지 말고 숨죽이고 지켜보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빈이 모닥불 쪽으로 몰리고 있을 때였다.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놀란 살수 둘이 동시에 한빈을 덮쳤다.
그때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품속에서 꺼낸 물건을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펑!
동시에 주변이 연기가 퍼졌다.
연기 때문에 모닥불 주위에서 모두의 모습이 사라졌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한빈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희들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내 취향대로 준비했어.”
연기 속에서 푸른 검기가 화가 난 듯 일렁였다.
검기의 주인이 외쳤다.
“비겁한 놈.”
“살수한테 비겁하다는 얘길 들으니 기분 좋네. 칭찬 맞지?”
슁!
붉은색 검기가 연기를 갈랐다.
하지만, 한빈의 비명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웃음소리만 연기 속에서 울릴 뿐이었다.
“하하.”
슁!
웃음과 바람 소리가 교차할 때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심미호가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것이 한빈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 연기 속에서 검기를 피할 수 있을까?
피한다고 해도 그것은 운이었다.
그때 심미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일렁이던 붉은색 검기가 점점 약해졌다.
‘뭐지?’
심미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때 붉은색 검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연기도 서서히 걷혔다.
두 걸음의 간격을 두고 마주 보고 있는 한빈과 두 명의 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빈이 심미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내려와도 괜찮아.”
“네?”
“괜찮으니 내려와.”
한빈의 말에 심미호가 나무에서 내려 검을 뽑았다.
그런데 절정의 무위를 자랑하던 우두머리 살수의 표정이 이상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심미호가 한빈에게 물었다.
“주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산공독에 다른 독도 좀 섞었지.”
“네?”
깜짝 놀란 심미호가 손을 내젓자 한빈이 말했다.
“우리는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