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사냥의 시간 (1)
황당한 상황에 심미호가 재빨리 도를 앞으로 내밀며 막아섰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왜 저희 공자님을…….”
그때 한빈이 뒤쪽에서 심미호의 어깨를 잡았다.
“심 부대주, 뒤로 물러나 있게.”
“아니 됩니다.”
“이건 가문 간의 일. 부대주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한빈의 말에 심미호가 할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한빈이 악비광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얘기해 봐.”
“무슨 얘기가 필요할까? 내 창으로 답하겠다.”
악비광이 창을 한 바퀴 돌리더니 땅에 꽂았다.
팡!
흙먼지가 악비광의 주변으로 퍼지자 한빈이 검을 내밀며 말했다.
“왜, 안주는 다 망치고 난리야. 재수 없게.”
한빈이 침을 뱉었다.
그 모습에 악비광이 눈썹을 꿈틀댔다.
한빈은 반대로 해맑게 웃었다.
전투를 앞둔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표정.
한빈의 눈에는 반짝이는 황색 점만이 보일 뿐이었다.
상대의 경지는 절정.
지난번 팽가에서 검을 맞댔던 절정의 도객과 비슷한 수준 같았다.
비무의 승패는 관계없었다.
구결만 얻으면 됐으니까.
스르릉!
한빈이 검을 뽑았다.
붕.
동시에 악비광이 창을 돌렸다.
창끝이 바람을 가른다.
스산한 가을바람을 창날이 가르자 휘파람 소리와 같은 공명음을 냈다.
휘잉.
그 소리에 맞춰 무인 둘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파팍!
한빈의 검도 빠르게 움직였다.
‘전광석화.’
절정인 악비광에게 이 속도는 통할 것이었다.
한빈이 원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황색 점에 담고 있는 구결이었다.
획!
한빈의 검이 왼쪽 어깨를 향해 날아갔다.
붕.
창을 세워 검을 흘려보낸 악비광이 창대로 한빈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파박.
한빈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몇 번의 공방을 주고받던 한빈과 악비광이 멀리 떨어져 서로를 노려봤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때문인지 다른 문파와 관원들도 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왜 갑자기 싸우는 거야?”
“나도 몰라.”
관원 하나가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심미호에게 다가섰다.
“하북팽가 사람이죠? 왜 싸우는 겁니까?”
“몰라요.”
관원이 고개를 돌려 산동악가의 삼허원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일입니까?”
“저도 모릅니다.”
삼허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둘의 비무에 집중했다.
관원은 할 수 없다는 듯 그들의 결전을 바라봤다.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검로(劍路)와 창의 움직임에 관원은 탄성을 뱉었다.
“허허. 오늘 눈 호강하네.”
그때였다.
둘이 다시 격돌하며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막사 주변에 울렸다.
챙! 챙!
날카로운 소리의 끝에.
픽.
한빈의 검이 악비광의 오른팔에 적중했다.
깊지는 않았지만, 악비광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한빈은 씩 웃으며 어딘가를 바라봤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 응용편 구결 중 난(亂)을 획득하셨습니다.]
[용린검법 응용편 구결 중 쾌(快)을 획득하셨습니다.]
[쾌(快), 검(劍), 난(亂)]
허허롭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한빈의 모습에 악비광이 미친 듯 달려들었다.
“넌 죽었다. 하북의 수치가 아닌 중원의 수치로 만들어 주마.”
“좋습니다.”
한빈이 답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황색 점 하나를 얻고 나니 다른 점 하나가 더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팡!
획!
챙! 챙!
숨 돌릴 틈 없는 공방 끝에 서로의 무복에는 피가 배어 나왔다.
한빈도.
악비광도.
점점 처참한 몰골이 되어 갔다.
그들의 결투를 보던 관원이 심미호에게 물었다.
“팽가와 악가가 원수 사이요?”
그 질문에 팽가의 심미호와 악가의 삼허원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관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원수가 아니라면 저리 치열하게 싸울 수 없는 것이었다.
공통적으로 처참해진 몰골에 비해 둘의 표정을 갈렸다.
악비광은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든 채 창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한빈은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용린검법의 구결 중 마(魔)를 획득하셨습니다.]
[쾌(快), 검(劍), 난(亂)], 마(魔)]
한빈의 눈이 커졌다.
삼베 마(麻)가 아니라 마귀 마(魔)였다.
하지만, 한빈은 다음 글귀로 그 뜻을 알았다.
[흩어진 용린검법의 구결 중 하나의 초식을 완성했습니다. 초식이 활성화됩니다.]
[쾌검난마(快劍亂魔) - 마(魔)를 상대할 때 공격력이 십 할 증가합니다. 필요 공력 오 년. 일각 동안 지속됩니다.]
‘마(魔)를 상대할 때 특화된 초식이라?’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그때였다.
악비광의 창이 섬광을 내며 다가왔다.
구결을 확인하다 일어난 실수에 한빈이 비명을 질렀다.
‘이런, 제길!’
이를 악물며 몸을 뒤틀 때 왼쪽 어깨에 통증을 밀려들어 왔다.
피슉!
왼쪽 어깨를 관통당한 것이다.
악비광의 창끝은 한빈의 어깨에 박힌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이는 긴 승부의 결말을 의미했다.
한빈도 이 승부에 목숨을 걸 생각은 없었다.
그때였다.
번쩍번쩍.
악비광의 허리에서 붉은 점이 나타났다.
이 붉은 점은 팽대위에게 확인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고민은 필요 없었다.
“가자!”
일말의 기합을 토해 낸 한빈이 앞으로 달려갔다.
푹!
한빈의 살점을 파고들었던 창날이 뒤쪽으로 삐져나왔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비명을 토해 냈다.
“헉!”
“이런 미친!”
창대가 왼쪽 어깨 뒤로 삐져나오는데도 악비광을 향해 파고드는 한빈의 모습은 마치 악귀 같았다.
놀란 것은 악비광도 마찬가지다.
목숨을 취하려고 한 승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악비광은 창을 놓지 않았다.
대신 파고드는 한빈을 향해 왼 주먹을 날렸다.
푹.
순간 한빈의 신형이 아래로 꺼졌다.
상체를 눕혀 주먹을 피한 것이다.
동시에 한빈의 검이 악비광의 허리를 갈랐다.
‘일촉즉발.’
창에 꽂힌 채로 일촉즉발의 수법을 사용해 악비광의 몸에 닿은 것이다.
“악!”
주변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한빈의 검 끝에는 푸르스름한 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한빈의 검이 악비광의 허리를 두 동강 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모두 입을 벌리고 있을 때 한빈의 검이 기적처럼 멈췄다.
탁!
하루 일을 마친 소가 동작을 멈추듯 한빈의 검도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그 자리에서 멈췄다.
툭!
악비광이 창을 떨어뜨렸다.
승복한 것이다.
하지만, 창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한빈의 왼쪽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악전고투를 끝낸 두 무사에게 모였다.
누군가가 말했다.
“영웅의 기상이네,”
그 말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박수가 튀어나왔다.
짝짝.
누군가는 손뼉을 치고.
누군가는 병장기로 땅을 찍었다.
탕!
탕!
그 울림이 정문산을 흔들 정도였다.
그때 심미호는 한빈의 표정을 봤다.
‘대체 뭐지?’
한빈의 표정은 도를 깨친 선인과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의 눈앞에는 처음 보는 글귀가 떠 있었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 응용편 구결 중 회(回)을 획득하셨습니다.]
[최초로 인급(人級) 구결을 획득하셨습니다.]
[인급(人級) : 회(回)]
한빈은 이 글귀에서 인급 구결이 더 상위의 초식을 알려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인급(人級) 구결 최초 획득 특전으로 회복력이 향상됩니다. 용혈지체에 한발 가까워졌습니다.]
[용린검법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등록되었습니다. 경지에 따라…….]
마지막 글귀를 본 한빈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용린검법의 새로운 경지에 든 것이다.
한빈의 모습에 좌중은 다시 한번 경악해야 했다.
창에 왼쪽 어깨를 꿰뚫린 채 웃고 있는 모습은 마치 아수라 같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대체 두 가문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기에 ”
그의 말을 시작으로 모두는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였지만,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들어 그었다.
서걱!
어깨를 관통한 악비광의 창이 두 동강 났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며 심미호를 불렀다.
“심미호 부대주.”
“네, 주군.”
심미호는 달려와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창대를 가리켰다.
“심미호 부대주, 뭐 해? 빨리 빼지 않고?”
“네?”
심미호가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동강 난 창대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빈이 재촉했다.
“이대로 둘 거야? 이러다 덧나면 어떻게 하려고. 빨리 빼!”
심미호도 마지못해 창대를 뺐다.
픽!
창이 꿰뚫은 창대 사이로 피가 울컥 쏟아졌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막사까지 걸어갔다.
그 모습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악비광은 입을 벌린 채 멀어지는 한빈을 말없이 바라봤다.
막사로 들어간 한빈은 바로 쓰러졌다.
* * *
한빈이 눈을 뜬 것은 정확히 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였다.
눈을 떠 보니 자신의 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무사가 옆에 누워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악비광이었다.
그때 악비광이 눈을 떴다.
순간 서로 마주친 한빈과 악비광.
피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말을 걸기로 이상한 상황.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악비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포기하리다.”
뜻밖의 말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악비광의 포기한다는 말은 어떻게 해도 해석이 안 되었다.
한빈이 물었다.
“뭘?”
“무 소저 말이오.”
“무 소저라니?”
“그녀는 내가 사랑한 여인이오. 하지만, 당신에게 양보하리다.”
악비광의 말은 찢어진 서찰처럼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한빈은 찢어진 문서를 맞추듯 조각을 맞춰 봤다.
“이런 제길!‘
한빈은 하마터면 욕지거리를 한 주먹 토해 낼 뻔했다.
한빈이 물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한빈은 비무 때와 마찬가지로 하대했다.
하지만, 악비광은 그게 불편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 보시오.”
“무 소저라는 게 혹시 무소율을 말하는 거냐?”
“그럼 무소율 소저 말고 또 누가 존재한다는 말이오?”
“잠시만, 정리 좀 해 보자.”
“말씀해 보시오.”
“너 나하고 무소율이 무슨 사이인 줄 아냐?”
“혼약한 사이가 아니오?”
“그건 옛날이야기고.”
“옛날이야기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리 파혼했어.”
“거짓말하지 마시오.”
“파혼한 지가 언제적 일인지도 기억도 안 나.”
“내가 이틀 전에 물어봤소.”
“흠.”
한빈이 침음성을 흘렸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무소위에게 기연을 던져 준 자신인데 아직도 한을 품고 있다니!
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악비광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대협, 그게 정말이오?”
이젠 호칭까지 바뀌었다.
’아, 쓰벌!‘
한빈은 속으로 욕을 토해 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 정말이다. 파혼한 지가 언젠데.”
“대협, 왜 그걸 제게…….”
“언제 물어봤어? 너 설마 내가 무소율의 약혼자인 줄 알고 기를 쓰고 덤빈 거냐?”
“그 이유 말고 또 뭐가 있겠소?”
“아!”
한빈이 어이없다는 듯 악비광을 바라보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왜 차였소?”
“왜 내가 차였다고 생각해?”
“음”
악비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빈을 훑어봤다.
한빈은 이제 악비광에 관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봐.”
“왜 그러십니까? 대협.”
“즐거웠고 이제 우리 웬만하면 마주치지 말자.”
진심이었다.
여자 때문에 정신 나간 소처럼 달려드는 놈과 더는 할 말은 없었다.
악비광은 끔뻑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