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권한을 주시죠 (2)
“흠.”
원로 중 하나가 헛기침하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게 가문 내의 저의 위치입니다. 그런데 다른 문파들도 함께하는 이번 임무에서 제 말이 먹히겠습니까?”
한빈의 말에 침묵만이 맴돌았다.
“…….”
모두를 둘러본 한빈이 말했다.
“가주 패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타 문파에서 저를 무시하지 않을 만한 위치를 만들어 주십시오.”
말을 마친 한빈은 모두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도중에도 한빈은 모두의 표정을 살폈다.
대부분은 적.
상관없는 척 딴짓을 하는 이.
소수의 아군.
한빈은 이 판을 보며 적과 아군의 얼굴을 머리에 새겼다.
그때였다.
팽대위가 탁자 위에 패 하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다.
주르륵.
미끄러져 오던 패는 한빈의 앞까지 와서 멈췄다.
한빈이 반사적으로 패를 잡자 팽대위가 외쳤다.
“이걸로 된 건가?”
한빈은 손에 든 패를 확인했다.
앞면에는 하북, 뒷면에는 팽.
게다가 살을 에는 듯 차가운 감촉.
분명히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든 가주 패였다.
한빈이 씩 웃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가주 패를 저리 쉽게…….”
“가주 대행, 이게 무슨…….”
그 모든 목소리를 팽대위의 다음 말이 잠재웠다.
“이제 서류는 저쪽에 맡기겠습니다.”
팽대위가 가리킨 곳은 한빈이었다.
모두가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할 때 팽대위가 일어났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팽대위는 짧게 포권한 뒤 가주전을 나갔다.
한빈도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뒤쪽에서는 불만이 가득한 원로와 각주 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빈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불을 붙이는 것이 한빈이 의도한 바였다.
그 결과에 따라 목을 비틀 순서를 결정할 수 있었으니까.
* * *
“참, 우리 팽호사대에 임무 하나가 떨어졌어.”
“어떤 임무입니까?”
소대섭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늑대 사냥.”
소대섭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늑대 사냥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요즘 절호곡에서 늑대가 민가로 내려오나 봐. 관과의 합동 임무이니…….”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소대섭과 심미호를 번갈아 봤다.
둘을 침을 꿀꺽 삼키며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들의 표정을 본 한빈이 웃었다.
“이번에는 심미호 부대주가 동행해 줘야겠어. 그리고 조호와 장심도 준비시켜.”
“존명.”
심미호가 활짝 웃으며 포권하자 옆에 있던 소대섭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소대섭 대주는 남은 대원을 좀 빡세게 굴려.”
한빈이 서찰을 건네자 소대섭은 재빨리 확인했다.
서찰을 읽어 나가는 소대섭의 눈이 점점 커지자 심미호도 고개를 들이밀고 같이 읽었다.
“헉!”
심미호가 비명을 질렀다.
뒤를 이어 소대섭이 입을 열었다.
“여기 나온 대로 하면 저희는 죽습니다.”
소대섭이 서찰의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빈이 준비한 훈련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지난번보다 높은 강도에 소대섭은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천수장에 입소하느니 절호곡의 임무에 따라가는 것이 백번 남는 장사였다.
“다녀오는 동안 성실히 이행하면 은자 열 냥을 보장하지.”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대섭의 변화에 한빈이 웃었다.
아무래도 딸아이의 치료비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사냥에서 돌아오면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실로 탄성이 나오는 태세 전환에 심미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대주님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돈생돈사 아닌가? 부대주.”
“그건 그렇지요.”
그때 한빈이 소대섭을 다시 불렀다.
“소 대주.”
“네, 주군.”
“별도로 부탁 하나 할게.”
“말씀하십시오. 주군.”
“철노가 수련에 참가하고 싶다고 하면 같이 넣어 줘.”
“철노를요?”
소대섭이 철노를 힐끔 바라봤다.
철노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이제 철노도 무공을 찾아야지.”
“무슨 무공요? 공자님.”
“잃어버린 무공을 찾아서 나를 보호해 준다면서.”
“아.”
철노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소대섭이 포권하며 말했다.
“주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동시에 철노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그날 밤.
가주의 둘째 부인인 정화 부인의 처소.
정화 부인이 찻잔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 한숨 소리에 맞춰 앞에 있는 사내가 고개는 고개를 떨궜다.
정화 부인이 서늘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봤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개를 곧게 들어야 한다. 강아지한테 물렸다고 다리를 저는 호랑이가 있더냐?”
이것은 정화 부인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머님.”
지금 대답한 이는 삼 공자 팽무빈이였다.
정화 부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팽무빈이 표정을 굳힐 때 그녀는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탁!
순간 찻잔에 일렁이던 찻물이 밖으로 나와 사방으로 비산했다.
찻물이 팽무빈에게 튀었지만, 그는 굳은 표정으로 정화 부인의 뒷이야기만 기다렸다.
살짝 튄 찻물이 말라 갈 때쯤 정화 부인이 말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너는 비급 반출 누명을 고스란히 쓸 뻔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해결하니 또 사고를 쳤지. 내가 사 공자 놈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넌 뇌옥에서 육 개월은 썩었겠지.”
“…….”
팽무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억울한 면도 있었지만, 대체로 어머니 정화 부인의 말이 맞았다.
정화 부인이 한기가 풀풀 날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너를 이 집에 둘 수 없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팽무빈이 고개를 조아렸다.
수북한 난 속에 보이는 숫자.
정화 부인은 붓을 들어 숫자 하나를 아예 지웠다.
그냥 지운 것이 아니라 아예 붓을 몇 번이고 칠해 숫자 자체를 없애 버렸다.
그러고는 서찰 하나를 쓰기 시작했다.
휙. 휙.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서찰을 봉투에 넣은 그녀는 수하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이걸, 외가에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흑색 무복의 무사가 포권한 뒤 재빨리 사라졌다.
사라진 수하를 보던 정화 부인이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한빈의 처소가 있는 곳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곳을 바라보는 정화 부인의 눈빛은 팽무빈을 바라볼 때보다 더 한기를 날렸다.
정화 부인의 한숨이 짙어질 때 그녀의 창문 틈 어딘가에서 그림자 하나가 사라졌다.
그림자는 대나무 숲에서 다시 나타났다.
스르륵.
그림자의 정체는 한빈이었다.
한빈은 수련만큼이나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거참, 언제 봐도 살벌하단 말이야.”
* * *
다음 날, 한빈은 심미호를 불렀다.
“심 부대주.”
“네, 주군.”
“이 서찰 좀 천리 표국에 갖다줘.”
“천리 표국은 왜요?”
“이건 주문서니, 꼭 전달해야 해.”
“주문서요?”
“심 부대주도 대충 알고 있겠지? 천리 표국은 보통 표국이 아니라는 걸…….”
“네?”
“몰랐어?”
“금시초문인데요.”
“그럼, 이번 기회에 알아 둬. 천리 표국에서 못 구하는 물건은 없어.”
“아.”
심미호는 못 믿겠다는 듯 한빈과 서찰을 번갈아 봤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서찰을 갈무리했다.
이제까지 한빈이 하는 일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줘.”
“네, 주군.”
심미호가 바람처럼 사라지자 한빈은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정화 부인은 마지막 수를 꺼내 들 것이었다.
그에 대해 준비하려면 천리 표국에 있는 낭인왕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 * *
일주일 후.
정문산 주변에는 이십 개의 막사가 세워졌다.
그곳에는 정의맹의 문파와 낭인 그리고 관군이 어우러져 있었다.
하북팽가의 막사가 자리 잡은 곳은 가장 끝 쪽이었다.
한빈은 막사 밖으로 나와서 두리번거렸다.
용린검법의 구결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상대가 없다니! 휴.”
물론 한빈이 말한 것은 구결을 소유자를 말함이었다.
한빈의 한숨에 심미호가 물었다.
“상대라니요?”
“아니다. 아무래도 근방에 수맥이 흐르는지 몸이 뻐근해서.”
“그럼, 수련이라도…….”
“아니, 괜히 힘 뺄 필요는 없지.”
그때 옆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한동안 이웃사촌이 될 텐데 인사드리겠습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가 웃고 있었다.
한빈은 그를 확인한 후 재빨리 그가 나온 막사의 깃발을 바라봤다.
[악(岳)]
분명 산동악가의 깃발이었다.
굳이 척질 필요는 없는 상황.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그의 면모를 살폈다.
하북팽가 사람들과 버금갈 정도의 큰 키에 장창을 오른손에 들고 있는 청년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포권했다.
“산동악가에서도 이번 임무에 참여하셨군요.”
“그렇소만. 댁은 대체 누구시기에 상대를 운운하는 겁니까?”
“저는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제가 말한 것은 술 상대를 말함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했군요. 그런데 막내 공자라면…….”
상대 무사가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제 소문이 산동까지 퍼졌나 보군요. 좋은 소문은 아닐 것 같습니다.”
“아, 아닙니다. 공자. 지금 보니 소문이라는 게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습니다. 풍기는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데 어찌 하북의 막내 공자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산동악가의 악비광 공자를 모시고 있는 삼허원이라 합니다.”
상대의 기분을 맞출 줄 아는 이였다.
입에 꿀이라도 바른 듯 대화를 술술 풀어 나갔다.
한빈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삼 대협이셨군요.”
“대협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저와 한잔하시겠습니까?”
산동악가의 무인이 호쾌하게 웃으며 장창을 땅에 꽂아 놓고 포권했다.
한빈도 마주 포권하면 답했다.
“좋습니다. 술은 이쪽에서 준비하지요.”
“하하, 안주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졸지에 이루어진 두 가문의 술자리에 양쪽 무사들이 함께했다.
화주가 한 순배 돈 뒤 한빈이 물었다.
“그런데 악비광 공자께서는 같이 안 오셨습니까?”
“아, 볼일이 있어 조금 늦는다고 해서 일단 막사를 꾸리고 있었습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팽가의 막내 공자 되십니까?”
뒤를 돌아보니 장창을 들고 있는 상대가 한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허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구에 창을 잡은 손에는 상처가 겹겹이 쌓여 마치 가죽 장갑을 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사내였다.
한빈이 조용히 일어났다.
“제가 팽가의 막내 공자 팽한빈입니다.”
“그렇군. 난 산동악가의 악비광이다.”
목소리에서 적의가 묻어 나왔다.
난데없는 상황에 팽가의 무사뿐 아니라 악가의 무사들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허원이 재빨리 일어나 악비광의 앞에 섰다.
“공자님, 팽가의 무사들과 얼굴을 익히는 중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너는 앉아 있거라. 나는 팽가의 막내 공자와 담판을 지을 것이다.”
말을 마친 악비광은 장창을 들어 한빈을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