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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46화 (46/621)
  • 46화. 권한을 주시죠 (1)

    증표가 나왔어도 그들이 살귀곡의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고의로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다른 살수 집단으로 위장하는 것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별로 놀라지 않는군.”

    “살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놀랄 일은 아닙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들의 목표가 누구였고, 사주한 인물이 누구냐는 점이죠.”

    “미안하네. 그것까지는 밝히지 못했네. 그들의 시체는 관아에서 찾아갔다네.”

    “살수가 죽이는 것은 무인이 될 수도 있고 일반 백성이 될 수도 있으니 관에서 담당하는 것 맞겠지요. 그런데 무소위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흠, 그러니까…….”

    가주 무서휘는 자신의 아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 과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모든 것이 제 탓이라는 거네요.”

    “탓이 아니라 은혜일세. 비록 우리 아이와 파혼하는 악연을 지녔지만, 자네는 우리 가문에게 기연도 주었네.”

    “그럼, 서로 빚은 없는 걸로 하죠.”

    “아니, 소위가 자네에게 빚 하나 진 걸로 하지.”

    말을 마친 무서휘는 한빈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 * *

    이 주 후.

    한빈은 좀 긴 휴식을 취했다.

    이 주 전 사건의 여파가 컸기 때문이다.

    한빈은 내심 기다리고 있는 소식도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해결한 살수 사건과 무씨검가와의 백 대 일 비무였다.

    들어오는 명성을 마다할 한빈이 아니었다.

    지금 한빈의 앞에는 이무명이 있었다

    그는 그날 일이 있은 후 마음을 바꿔 한빈의 곁에 남기로 했다.

    아직은 육 개월이라는 한시적인 계약이지만 말이다.

    “주군,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 이 호위는 좀 어때?”

    “주군 덕분에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편안히 말해 봐.”

    “백검대가 들이닥쳤을 때 왜 저인 척하셨습니까?”

    “아, 그건…….”

    한빈이 말끝을 흐렸다. 육 개월 동안 이곳에 남기로 한 이무명에게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한빈이 적당히 둘러대려 할 때였다.

    덜컹.

    문이 열리고 철노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왜 그래 철노?”

    “공자님, 지금 하북이 들썩이고 있어요.”

    “또 사건이 일어난 거야?”

    “그게 아니라, 백 대 일 비무에 대한 소문으로 지금 하북이 난리예요.”

    “흠.”

    한빈이 헛기침하며 보이지 않게 웃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표정을 수습한 한빈이 물었다.

    “철노, 자세히 말해 봐.”

    “그러니까 여기 계신 이무명 호위가…….”

    “잠깐, 뭐라고?”

    “이무명 호위가 살수 집단을 박살 내고 백검대와 오해가 생겨서 일전을 치른 사건이 백 대 일 비무 사건이잖아요. 이제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데요.”

    “아.”

    한빈이 탄성을 흘렸다. 대충 어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그날 이무명이라 밝힌 것 때문에 생긴 오해 같았다.

    그때 이무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이 호위?”

    “제가 명성을 주시려고 제 이름을 대셨던 거군요. 감사합니다, 주군.”

    이무명의 포권에 영문을 모르는 철노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명성이 아니라면 신뢰라도 얻어야 하는 한빈은 이무명의 추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 * *

    하북팽가의 집법당.

    팽대위는 머릴 감싸 쥐며 눈앞에 쌓인 서류 더미를 바라봤다.

    설마설마했는데 이리 서류들이 밀려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

    팽대위가 수하를 보며 물었다.

    “형님은 폐관에서 언제 나오시는 거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쪽 얘기에 따르면 벽곡단을 좀 더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아, 무슨 폐관을 그렇게 오래하는 거야. 그리고 벽곡단이 떨어지면 수련을 그만해야 하는 게 가칙 아니야?”

    “죄송하지만, 팽가에 그런 가칙은 없습니다.”

    “아니야. 이제라도 만들어야 해.”

    “그럼, 지금 가주 대행이시니 직접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관련 서류 대령할까요?”

    “허, 너 나 놀리는 거야?”

    “아, 아닙니다.”

    그때 집법당 문이 열리고 수하 하나가 뛰어왔다.

    “집법당주님, 지금 하북성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내가 가서 맞아야지.”

    팽대위가 서류를 옆으로 밀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하북팽가의 접객당.

    팽대위는 정주섭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정 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팽 당주도 별일 없으셨는지요?”

    “네, 저야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가주님께서는…….”

    가주를 찾는 것으로 봐서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팽대위가 답했다.

    “폐관에 들어가셔서 제가 가주 대행을 맡고 있습니다.”

    그 후 마치 관례라도 되는 듯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답잖은 얘기들이 오갔다.

    찻잔의 바닥이 보이자 정주섭이 슬그머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팽 당주님께 부탁을 드려야겠군요.”

    “말씀해 보시죠.”

    “요즘 하북성 남쪽의 정문산 쪽에서 늑대가 출몰해서 백성들을 해치고 있다는 민원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정문산이라면? 절호곡이 근처에 있지 않습니까? 그곳 늑대는 사납기로 소문이 났지만, 민가로 내려오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는 그랬죠.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흠.”

    “왜 그러십니까?”

    “절호곡은 정의맹에서 금지로 선포한 곳인데 그곳에 늑대가 민가를 습격한다면…….”

    “네, 염려하시는 그대로입니다. 하북성에서도 관군을 투입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와도 똑같더군요. 그래서 정의맹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럼, 하북팽가가 정의맹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팽대위의 표정이 바뀌었다.

    팽대위의 이마에는 마치 ‘조건은?’이라고 써 있는 것 같았다.

    관계는 관계고 사업은 사업이었다.

    의미 없는 일에 팽가의 식구를 내보낼 만큼 팽대위는 속이 없지 않았다.

    팽대위의 표정을 본 정주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팽 당주. 하지만, 무보수는 아닙니다. 관에서는 늑대 머리 하나에 은자 한 냥을 걸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낭인들이 몰려들 텐데요.”

    팽대위가 관심을 나타내자 정주섭이 상체를 기울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만약의 불상사를 대비해서 통제할 힘이 필요합니다. 사례는 따로 하겠습니다.”

    팽대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저희도 적당한 선에서 인원을 뽑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이번에 도와주신 일은 관에서 잊지 않을 겁니다.”

    * * *

    하북성의 정주섭이 떠난 다음 날.

    하북팽가 가주전에는 원로와 각주 들이 모였다.

    안건은 절호곡에 파견할 인원을 뽑는 것이었다.

    원로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공자 중에 한 분이 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누가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이번에 소가주 후보 자격을 얻은 막내 공자가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보인 무력도 그렇고 기회를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대화에 말에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관과 타문파 그리고 팽가가 함께하는 합동 임무였다.

    그것을 조절할 수 있으려면 강호 짬밥을 웬만큼 먹은 무력대를 통째로 보내거나 원로 중에 나서는 것이 맞았다.

    그때 정보를 총괄하는 현무각의 각주가 손을 들었다.

    “저도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시오.”

    팽대위가 그의 발언을 허락했다.

    “저도 막내 공자가 이번 임무를 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막내 공자가 실력을 보이긴 했지만, 내부에서는 아직도 소가주 후보가 된 것에 대해서 말이 조금 많습니다. 그 의혹을 깨끗이 지우기 위해서라도 막내 공자가 이번 임무를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팽대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 발언한 이들은 모두 일 공자와 이 공자를 추종하는 무리였다.

    그들은 막내 공자 한빈을 어떻게든 물어뜯으려는 것이었다.

    뭐, 물어뜯는 건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빈이 관군과 합동 임무에서 작은 실수라도 한다면 그 결과는?

    모조리 가문의 부담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지금 한빈을 추천한 이들은 가문의 입장은 일 할도 생각하지 않고 한빈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이들이었다.

    ‘아, 쓰벌.’

    팽대위는 자신에게 짐을 넘기고 폐관 수련을 들어간 팽강위를 원망했다.

    그때 하얀 수염에 깡마른 체구가 인상적인 대장로가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막내 공자를 이곳으로 불러 의향을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팽대위에게 대장로의 발언은 한 줄기 빛이었다.

    그는 재빨리 손뼉을 쳤다.

    짝!

    “그럼, 대장로님의 의견대로 막내 공자를 이곳으로 부르지요.”

    팽대위가 턱짓하자 무사 하나가 가주전을 빠져나갔다.

    연락을 받은 한빈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어떻게 해서든 관과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가주전에 도착한 한빈은 원로와 각주 들의 날카로운 눈빛에 자신이 표적이 되었음을 느꼈다.

    요즘 들어 지루했는데 칼날 위를 걷는 듯한 느낌에 한빈은 작게 웃었다.

    이런 느낌이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주위를 둘러본 한빈의 시선이 팽대위에게 멈췄다.

    “부르셨습니까?”

    “막내 공자, 거기 앉게.”

    팽대위는 끝자리를 가리켰다.

    한빈이 앉자 팽대위가 말을 이었다.

    “요즘 하북에서…….”

    설명을 듣던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팽대위의 설명은 전생에 일명 절호곡 토벌 작전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토벌 작전이 끝난 후에는 절호곡 혈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토벌 작전에 투입된 정의맹 무사와 낭인 들 중 무려 스무 명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마교의 소행으로 짐작했지만, 그 뒤 발견된 스무 구의 시체로 마교는 용의선상(容疑線上)에서 지워졌다.

    뜯겨 나간 부위로 추측할 때 마교의 무공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 후 절호곡의 비극은 완벽하게 미궁에 빠졌다.

    이번 생은 다를 것이었다. 위기는 피하고 기회는 잡으면 되었다.

    관의 부탁을 해결해 주고 나면 부탁할 명분도 생기기 마련.

    하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팽대위가 물었다.

    “왜 말이 없지? 겁나나?”

    “아닙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렇지?”

    “제가 나가는 건 괜찮지만, 제가 관과의 합동 작전을 잘 수행할지 의문입니다.”

    “그건 자신이 없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제 지위입니다.”

    팽대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위라?”

    “네, 제가 소가주 후보가 된 사실에 대해서 흉흉한 소문이 도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문에서 저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한빈은 원로들과 각주들을 힐끔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그 모습에 팽대위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번 임무를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이번 임무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에…….”

    “대신에? 뭘 바라는 거지?”

    “가주 패를 주십시오.”

    순간 여기저기서 혀 차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허허.”

    “그걸 말이라고…….”

    그들의 표정을 본 한빈이 손바닥을 보이며 소란을 눌렀다.

    “원로님과 각주님. 만약에 제가 이번 임무에 같이 가자 부탁하면 같이 가 주실 분 계십니까?”

    한빈이 주위를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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