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림자 무사 (4)
신경 독이 담긴 물통을 여인에게 건넨 무사가 말했다.
“잔을 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손을 저은 여인이 통에 든 물을 들이켰다.
꿀꺽.
식도를 타고 신경 독이 여인의 몸으로 들어갔다.
사내아이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 그게 얼마짜리인데!”
아이의 말에 무사가 품속에서 동전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이건 물값이다.”
“아.”
사내아이가 구겨진 표정 그대로 주방을 바라보며 엄지를 아래로 내렸다.
신호를 받은 주방의 여인이 대롱을 들었다.
피슝!
대롱에서 독침이 나가 무사에게 박혔다.
푹.
순식간에 일어난 황당한 상황에 백색 무복 여인이 검을 빼 들었다.
스릉.
하지만, 검은 반쯤 나오다가 멈췄다.
털썩.
백색 무복의 여인도 신경 독에 중독되었다.
사내아이가 손을 털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퉤, 오늘따라 일이 복잡해지네.”
그때 주방에서 여인이 나왔다.
“뭐, 부수입이라 생각하죠.”
“그럼, 부수입부터 썰어 볼까?”
사내아이가 활짝 웃으며 주방에 던져 놨던 식칼을 들었다.
대들보 위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한빈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정작 일이 꼬인 것은 한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쓰러진 백색 무복의 여인은 다름 아닌 무씨검가의 무소율이었다.
그가 무사를 대동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볼 수도 없었다.
한빈이 위에서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사내아이는 무소율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때 여인이 말했다.
“저는 이 친구를 썰게요.”
살수 여인이 이무명을 가리켰다.
“알아서 하라고.”
씩 웃은 사내아이가 식칼을 높이 쳐들었다가 아래로 내려쳤다.
휙!
무소율의 목이 달아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내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식칼로 내려쳤는데 목표의 목이 멀쩡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뭔가 휑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내아이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앗!”
사내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는 식칼을 움켜쥔 사내아이의 손목이 뒹굴고 있었다.
한빈은 용린검법 중 ‘일촉즉발’의 초식을 사용했다.
전광석화와 중복된 일촉즉발의 수법은 살수가 자신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빨랐다.
한빈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내아이의 마혈을 제압했다.
털썩!
사내아이가 쓰러지자 한빈의 다음 목표는 살수 여인이었다.
표홀히 자리에서 사라진 한빈의 신형이 여인의 뒤에서 나타났다.
퍽!
한빈이 여인의 마혈을 제압했다.
털썩!
여인이 수수깡처럼 쓰러졌다.
“휴.”
한빈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이제 이무명을 데리고 이곳에서 사라지면 되었다. 나머지 일은 무씨검가에 알리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었다.
살수의 정체도 무씨검가에서 밝힐 테니 말이다.
“이무명, 정신 차려라.”
“…….”
이무명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빈은 할 수 없이 이무명을 부축했다.
막 주막을 나서려던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상상 못 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주막 앞은 백색 무복의 무사들로 가득했다.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이는 무사들이 똑같이 백색 무복을 입고 달빛 아래 정렬해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물론 한빈과 관계없을 때의 일이었다.
무사 중 하나가 나와 물었다.
“대체 주군은 어떻게 한 것이냐?”
무사가 턱짓하자 다른 무사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으로 뛰어 들어간 무사가 외쳤다.
“무소율 아가씨가 쓰러졌습니다!”
“뭐라고?”
무사가 흉흉한 안광을 쏘아 냈다.
범인이 한빈이라 의심하는 모양새다.
그때 무사 중 하나가 외쳤다.
“저자가 하북팽가의 셋째 공자 팽한빈입니다!”
그의 말에 앞장선 무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들 저자를 포위하라.”
한빈은 그들의 목표가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빈이 외쳤다.
“왜 주군을 찾는가? 나는 사 공자의 호위 이무명이다.”
그 말에 백검대의 무사들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빈이 부축하고 있는 이무명을 바라봤다.
누군가 외쳤다.
“저자의 말이 맞다. 정신을 잃은 자가 사 공자 팽한빈이다.”
그 말에 한빈이 안 보이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무명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동시에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어찌 보면 지금 상황이 이무명이 수행하는 그림자 무사로서의 첫 번째 임무였다.
물론 한빈만의 생각이었다.
점점 좁혀 오는 포위망.
한빈이 외쳤다.
“우선 안에 있는 살수부터 확보하시죠. 저나 주군, 그리고 안에 있는 무사분 모두 살수에게 당했습니다.”
“안은 우리 무사가 정리하고 있으니 사 공자를 넘겨라.”
한빈의 코앞까지 온 무사가 검을 겨눴다.
“휴.”
한숨을 내쉰 한빈이 그들이 자신이라 오해하고 있는 이무명을 건넸다.
이무명을 넘겨받은 무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자네의 이름이 뭐라 했나?”
“강호에서는 절정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음.”
무사가 침음을 삼키다가 다시 검을 겨눴다.
“절정검이라면 사 공자를 그리 쉽게 넘길 성격이 아니다. 저자도 잡아라!”
앞선 무사의 말에 나머지 무사들이 한빈을 에워쌌다.
스릉!
한빈도 월아를 뽑아 들었다.
그것은 훗말 강북 무림을 들썩이게 한 백 대 일 비무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챙!
챙!
한빈이 검, 월아가 백검대의 검을 막아 냈다.
계속 피하기만 하면 승산은 없었다.
스윽.
한빈의 검이 백검대의 검진 중 약한 곳을 파고들었다.
파팍!
순간 달빛을 받은 마당에 피가 튀었다.
한빈의 공격은 싸움의 정석을 보여 줬다.
일 대 다수의 싸움에서 적을 제압하는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방법은 우두머리를 제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두머리가 지금처럼 정신을 잃었을 때는?
지금처럼 약자를 공격해서 그들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다.
“막내를 뒤로 빼고 검진을 보강하라!”
부상자를 막기 보호하기 위해 다른 무사가 빠졌다.
스윽!
한빈의 칼질 한 번에 줄어드는 무사의 수는 둘이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한빈의 모습에 백검대 무사들은 혀를 찼다.
이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약은 것이었다.
얄미울 정도로 약점을 파고드는 한빈의 공격은 두렵다기보다 짜증이 났다.
한빈도 점점 초조해졌다. 용린검법의 공력이 다섯 개밖에 남지 않아서였다.
그때 한빈의 눈이 커졌다.
백검대 무사 중 몇몇에게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보인 것이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지만, 구결을 획득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빈의 검이 백검대 무사, 아니 구결을 향해서 뻗어 나갔다.
슝!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복(復)을 획득하셨습니다.]
[기본편]
[속(速), 속(速), 속(速), 속(速), 속(速) ……]
[체(體), 체(體), 체(體), 체(體), 체(體), 체(體)]
[력(力), 력(力), 력(力), 력(力), 력(力), 력(力)]
[공(功), 공(功), 공(功), 공(功), 공(功) ……]
[복(復). 복(復), 복(復)]
……
이제 복이 세 개가 되었다.
지금의 결전으로 벌어졌던 상처에서 피가 멎는 느낌이었다.
방어적이었던 한빈이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하자 백검대 무사들도 당황했다.
그때 무사들의 수장이 외쳤다.
“천변백검을 펼쳐라.”
동시에 무사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사사삭!
이것은 백검대의 최상위 검진.
하나의 검에 열 번의 변화를 담는다. 즉, 백 개의 검은 천 번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의 검이 꽃처럼 화려하게 변했다가 다시 늑대처럼 맹렬하게도 변했다.
이는 동작의 변화뿐 아니라 속도의 변화도 내포하고 있었다.
한빈도 이 싸움에서 이길 생각은 없었다.
백 명과 싸워 이긴다?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 될 터였다.
그들의 검이 한빈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백검대는 동작을 멈춰라!”
그 외침에 한빈을 향해 좁혀 오던 백검대의 검이 멈췄다.
이어서 백검대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백색 무복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무복의 모양으로 봐서 무씨검가의 일원이 분명했다.
사내가 다가오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가 얼굴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
한빈은 탄성을 흘렸다. 그 사내의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한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지금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내는 다름 아닌 무소위였기 때문이다.
한빈은 그의 발걸음에 주목했다.
무소위의 발걸음은 정제되어 있었다. 무위가 한 단계 올라선 것이 분명했다.
터벅터벅.
한빈의 앞에 온 무소위가 갑자기 깊숙이 포권했다.
난데없는 행동에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소위는 한빈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은공.”
“…….”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말에 한빈은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지금은 정답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한빈이 결심한 듯 말했다.
“얘기는 차차 듣고, 안에 있는 살수부터 정리해야 한다.”
한빈과 무소위가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아이 하나가 마혈을 제압당한 채 손목이 잘려 있었다.
무소율 일행은 먼저 들어간 무사들이 의자에 앉혀 놓은 상태다.
한빈이 사내아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발목에 찬 단검을 꺼내 사내아이의 얼굴에 갖다 댔다.
놀란 무소위가 물었다.
“은공, 대체 무슨 짓을…….”
무소위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빈이 사내아이의 얼굴을 단검으로 벗겨 내자 그곳에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마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대충 상황을 눈치챈 무소위와 백검대 대원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한빈이 일어난 곳은 무씨검가였다.
무씨검가의 금지옥엽 무소율이 얽힌 일이기에 그들은 한빈과 이무명을 그냥 보내 줄 수는 없었다.
대신 하북팽가의 처소보다 더 화려한 방에서 한빈은 깨어났다.
한빈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시녀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공자님, 여기 의복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제가 가주전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침하시면 모시라는 가주님의 지시입니다.”
“그래, 알았다. 내 일행은 어디에 있지?”
이무명을 말함이었다.
시녀가 답했다.
“그분은 아직 주무시고 계세요. 저희 의원 말씀으로는 해약을 처방했으니 점심때쯤이면 일어날 것이라 해요.”
“그래, 고맙다.”
한빈은 더는 묻지 않고 준비된 옷을 입었다.
옷을 입고 난 한빈이 여유 있게 웃었다. 전에 입던 붉은색 무복과 똑같은 옷을 무씨검가에서 준비했기 때문이다.
이리 똑같은 옷을 준비하려면 밤새 바느질을 해야 했을 터.
이것은 그들이 한빈에게 느끼는 호의의 증거였다.
옷을 다 입은 한빈은 가주전에서 무씨검가의 무서휘와 마주 앉았다.
“식사보다 차를 먼저 준비해서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한빈은 찻잔을 들어 차향을 음미했다.
차로 입술을 축이자 가주 무서휘가 본론을 말했다.
“어제 자네가 잡은 자들은 살귀곡의 살수들이네. 독단을 깨물고 자결했지만, 등에서 그들의 증표를 찾았네.”
“그렇군요.”
한빈이 무심히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