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림자 무사 (3)
아내의 물음에 남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도 오늘 쌍둥이 하나 만들까?”
“참, 당신도……. 길거리에서 징그럽게 그런 말 하지 마요.”
아내는 싫지 않은 기색으로 남편의 옆구리를 탁 쳤다.
“어이쿠. 나 죽네.”
“당신, 괜찮아요?”
“죽을 것 같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남편은 너스레를 떨며 아내를 잡아끌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무명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사 공자님, 제가 공자님과 닮았습니까?”
“조금은 닮았지.”
한빈의 대답은 사실 거짓이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닮았으니 말이다.
한빈이 이무명을 원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전생에 귀검대 소속 수하 중에 하남정가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처음 한빈과 만났을 때 하남정가에서 온 수하는 한빈을 이무명으로 착각했었다.
후에 그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만약 이무명을 귀검대에 영입했다면 활용도가 무궁무진했을 거라고.
물론 그때는 이무명이 강호에서 자취를 감춘 후였다.
차후 이무명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면 그를 그림자 무사로 쓰고 싶었다.
그림자 무사란 무엇인가?
간단히 한빈이 부재 시 그를 대신할 이를 말한다.
머리 모양과 복장까지 비슷하게 입으니 한빈은 그가 훌륭한 그림자 무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번화가를 지나 이제는 외곽으로 빠지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유일한 마을 입구였다.
한빈과 이무명이 막 인사를 나누려 할 때였다.
사내아이 한 명이 한빈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아저씨, 우리 집에서 맛있는 음식 드시고 가실래요?”
말을 던져 놓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본다.
아마도 근처 음식점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아이 같았다.
한빈이 막 손을 흔들려는 찰나 이무명이 먼저 나섰다.
“사 공자님, 저도 아쉽습니다. 한잔만 더 하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빈이 빙긋 미소지었다.
지금까지 보여 준 그의 행동으로 봐서 먼저 술을 권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만큼 하북을 떠나는 것이 아쉽다는 증거.
한빈은 그가 언젠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것을 확신했다.
“그러지. 어차피 달이 지려면 밤이 기니 말이야. 오늘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보자고.”
“하하 좋습니다. 공자님.”
이무명이 환하게 웃었다.
* * *
잠시 후.
사내아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 한빈과 이무명은 허름한 주점에 도착했다.
일반 민가를 살짝 고쳐 운영하는 주점으로 보였다.
한빈이 객잔으로 들어가며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자 이무명이 물었다.
“공자님, 이런 허름한 주점은 처음 오십니까?”
“그래, 이런 곳에 주점이 있다니 신기해서. 이런 곳이 장사가 되려나 모르겠네.”
“여기 장사까지 걱정해 주시다니, 사 공자님은 사람이 너무 좋아 탈입니다. 뭐, 장사가 안되니 아이까지 나와서 호객을 하는 것이겠지만요.”
사람 좋다는 것은 이무명의 눈에 콩깍지가 씐 탓이었다.
한빈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아이를 바라봤다.
“여기까지 안내해 줘서 고맙구나, 아이야.”
한빈은 품속에서 철전 하나를 꺼내 아이의 손에 올려 주었다.
그리고 안타까운지 아이의 손을 살짝 잡아 주었다.
한없이 너그러워 보이는 한빈의 모습에 이무명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주점 문이 열리고 머리를 질끈 묶은 여인이 나왔다.
“어머, 손님이…….”
여인이 말끝을 흐리며 사내아이를 바라봤다.
“제아야, 네가 모셔 온 거니? 내가 밤에는 나가지 말라고 했잖니, 위험하다고.”
“아니에요, 엄마. 오늘은 손님이 없어 음식이 많이 남았잖아요.”
아이가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이무명이 나섰다.
“주인장.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그러지 않아도 한잔 더하고 싶어서 조용한 주점을 찾고 있던 참입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우리 집이 공자님들이 오시기에는 너무 허름해서…….”
여인이 말끝을 흐리자 이무명이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어서 안내해 주시지요.”
“그럼 이쪽으로…….”
한빈은 뒤쪽에서 그들을 따라가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 앉은 한빈과 이무명의 옆에는 술병이 가지런히 줄을 섰다.
열심히 젓가락질하던 이무명이 말했다.
“허름한 주점치고는 고기도 신선하고 술맛도 좋습니다, 사 공자님.”
“그렇지, 고기가 참 신선하지? 오늘 음식이 많이 남았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 호위가 좋아하니 내가 즐겁네. 그런데 내가 아무래도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
“그렇습니다. 사 공자님이 저보다 더 많이 마셨으니까요.”
“아무래도 볼일 좀 보고 와야겠어.”
“네, 그러십시오, 공자님.”
이무명은 기분이 좋은지 앉아 있는 상태로 포권했다.
“허, 예는 차리지 말래도.”
씩 웃은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으로 나간 한빈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한빈이 걱정된 이무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세상이 핑글 도는 느낌에 이무명은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그때 주방에서 여인이 다급하게 나왔다.
“손님, 괜찮으세요? 손님.”
여인이 이무명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무명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순간 여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주방 쪽을 돌아본 여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완벽하게 중독됐습니다, 조장님.”
그녀의 말에 주방에서 아까 봤던 사내아이가 천천히 걸어왔다.
사내아이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이무명의 코에 갖다 댔다.
약해진 호흡에 사내아이가 입꼬리를 올렸다.
“뭐, 정신은 멀쩡할 테지만, 몸은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을 테지.”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변했다.
이전의 앳된 목소리는 어디 가고 걸쭉한 중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조장님의 신경 독은 일품이에요. 호호.”
여인이 간드러지게 웃자 사내아이가 눈매를 좁혔다.
“한 놈은 어디 갔지?”
“밖에 쓰러져 있겠지요.”
“그럼 잡아 와야지, 뭐 해?”
“그놈이 더 마셨어요. 황소 한 마리가 순식간에 쓰러질 양이니 아마 이틀은 못 일어날 거예요. 그러니 일단 이놈부터 썰죠.”
“그래, 그럼 장비 가져와. 잘 드는 놈으로!”
“알았어요, 조장.”
여인이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말대로 이무명이 당한 독은 신경 독이었다.
이들이 쓴 신경 독의 특징은 몸은 순식간에 마비시키지만, 정신은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무명은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강호 초출이 아닌 그는 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살인귀들에게 잡힌 것이다.
자신이 먹은 고기도 인육일지 몰랐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만두 속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으니.
이무명을 더 두렵게 한 것은 오랜만에 만난 좋은 사람인 한빈의 목숨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대로 술은 한빈이 더 마셨으니 화장실에 가는 도중 쓰러졌을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후회가 몰려들었다.
한빈에게 주군이라 칭하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웠던 것이다.
‘훗.’
이무명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 말도 안 되는 후회가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무명이 걱정하는 한빈은 어디에 있을까?
한빈은 의외로 이무명의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는 주점의 대들보 위에 걸터앉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일까?
정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한빈은 이곳에 오며 수상한 점을 한두 가지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마을 입구를 저녁에 빠져나가는 이가 있을까?
아이가 호객을 한다면 들어오는 사람을 잡기 위해 마을의 바깥쪽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밖에서 기다리는 경쟁자에게 손님을 몽땅 빼앗기니 당연할 일이었다.
그리고 변장이 어설펐다.
얼굴은 신경 썼는데 미처 손의 촉감까지는 바꾸지 못한 것이다.
한빈은 아이에게 동전을 건네며 손을 잡았을 때 이곳이 평범한 주점이 아님을 알아챘다.
결정적인 단서는 의외로 그들이 준비한 음식이었다.
그 음식은 이 마을의 최고 객잔인 만향객잔의 음식이었다. 신선함과 맛으로 혀끝을 유혹하려는 의도였지만, 한빈은 근처 객잔의 맛을 기억해 둔 지 오래였다.
한빈의 관점에서 그들은 어설픈 악당들이었다.
모든 것을 미리 알아챈 한빈은 허리에 찬 죽통에 술을 모두 부어 버렸다.
그럼 한빈은 왜 그들은 단칼에 베지 않고 이렇게 구경하고 있는 것일까?
한빈은 그들의 의도를 알고 싶었다.
단순한 살인귀인지 아니면 자신과 이무명을 죽이러 온 살수들인지 말이다.
현재까지의 대화를 들어 보면 그들은 살수에 가까웠다. 그것도 살인을 즐기는 살수.
살인에 감정이 개입되면 일을 그르치게 마련.
한빈이 내린 결론은 그들이 최고의 살수 집단은 아니라는 점이다.
‘쩝!’
한빈은 입맛을 다셨다.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을 물로 보고 돈을 아꼈다는 점에서 한숨이 나왔다.
한빈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때 여인이 칼을 들고 나왔다.
박도를 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거대한 식칼.
칼에는 핏물이 굳어 시커먼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끈적거리는 자국들에는 사람이 머리카락이 붙어 공포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내아이가 말했다.
“아, 작업하기 전에 칼 좀 갈아 놓으라니까. 썰고 나서 이대로 두면 칼이 상한다고.”
“알았어요, 조장. 잔소리 좀 그만해요.”
“그러니까. 알아서 장비 잘 챙기라고. 뭐, 아쉬운 대로 오늘은 그냥 썰어야겠네.”
사내아이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식칼을 높이 들었다.
한빈도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용린검법의 구결 중 ‘전광석화’를 운용했다.
슉슉.
용린검법의 공력이 혈도를 타고 노도와 같이 지나간다.
막, 한빈이 뛰어내리려 할 때였다.
덜컹!
문이 열리고 백색 무복의 사내가 들어왔다.
“주인장.”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사내아이가 재빨리 식칼을 여인에게 넘겼다.
여인은 식칼을 주방 옆에 던져 놓고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술 좀 채우러 왔소.”
사내는 여인에게 죽통 몇 개를 건넸다.
뭐, 강호에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밤낮없이 달려야 할 때는 주점에 들러 이렇게 술을 채운 후 잠깐씩 쉬면서 노상에서 들이켜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어떤 술로 담아 드릴까요?”
“그냥 화주면 족하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돌아선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여인이 주방으로 사라지자 백색 무복이 무사가 사내아이를 바라봤다.
“귀여운 아이구나.”
무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시에 아이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무사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백색 무복의 여인이 들어왔다.
여인은 무사를 보고 물었다.
“왜 이리 늦는 거지?”
“죄송합니다. 주인장이 술을 채우러 주방에 들어갔으니 곧 나올 겁니다.”
“알았어, 그런데 목이 마르네. 물 좀 찾아봐.”
여인의 말에 무사가 주위를 살렸다.
그때 사내아이가 한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신경 독을 넣어 둔 물통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를 만들었다.
아이가 눈짓으로 물통을 가리킨다고 오해한 무사가 신경 독이 가득 담긴 물통을 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