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3화 (43/621)

43화. 그림자 무사 (2)

김무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한빈의 수족 철노였다.

“무슨 일인 게냐?”

“공자님이 의당 예약 좀 해 놓으라고 하셔서요.”

“무슨 예약?”

“환자 둘이 올 거라고 준비 좀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막내 공자가 무슨 점쟁이라도 되는 것이냐? 어떻게 환자 둘이 생길 거라고 예언을 해?”

김무병이 고개를 흔들자 철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자님이 그러셨습니다. 상처가 꽤 깊을 수도 있다고 준비해 놓으라고요.”

“허, 이거 참. 검술을 익히는 게 아니라 점술을 익히는 겐가?”

김무병이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사내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너덜거리는 상의에는 핏물이 진하게 묻어 있는 것이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진짜 점쟁이구나.”

김무병이 황당한 눈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사내 둘을 바라보고 있다가 기겁을 했다.

“저건 막내 공자 아니더냐, 그 옆은 정화 부인의 호위고!”

김무병은 그제야 알았다.

점쟁이가 아니라 계획된 비무를 행한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걸 정말!”

김무병이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철노가 번개처럼 달려갔다.

“공자님!”

하지만, 철노는 한빈에게 가기 전에 멈춰야 했다.

한빈의 앞에 정화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철노는 저 사이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한빈의 앞을 막아선 정화 부인이 말했다.

“거래는 거래, 왜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이냐?”

“약속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화 부인은 대단했다.

조금 전까지 한빈의 목에 비수를 꽂으려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아들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정화 부인이 분한지 입술을 살짝 깨문다.

순간 입술 사이로 비치는 핏물.

흘러내리는 것은 피가 아니라 원망일 테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이 호위와 비무를 허락하면 셋째를 꺼내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건 저를 해치려 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비수를 제게 들이댄 순간 조건은 바뀌었습니다.”

한빈이 눈매를 좁히며 답하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정화 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무엇을 원하느냐?”

“제가 이무명 호위를 육 개월 동안 쓸 수 있도록 해 주시지요.”

“흠.”

정화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겼다.

사실 결론은 미리 정해졌다.

정화 부인이 계산하고 있는 것은 고민하는 모습을 얼마나 보여 줘야 할까였다.

그것은 왜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정화 부인은 화첩에 난을 하나 더 그리고 오는 길이었다. 즉, 이무명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장차 하남정가까지 자신의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자신과 척을 진 이무명이 하남정가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지금 한빈에게 보내 놓고 이무명을 제거한다면?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한빈에게 물을 수 있는 기회였다.

적당히 시간을 끈 정화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리하도록 하지.”

“네, 감사합니다. 그럼 집법당주님께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그래, 약속은 지키거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화 부인은 자리에서 떠났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의당의 앞마당에서는 모두가 멍한 얼굴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이무명이 한빈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사 공자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호칭이 바뀌었지만, 한빈은 모른 척 답했다.

“뭘 말입니까?”

“저는 일주일 안에 하남정가로 떠날 예정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조건을 거긴 겁니까?”

“어차피 떠나실 거라면 편안한 마음으로 하남정가로 향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정화 부인은 제게 권한을 넘겼고 저는 이무명 호위가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한빈도 호칭이 바뀌었다. 자연스레 관계가 다시 정립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니라 감정이었다.

이무명이 한참 동안 한빈을 바라봤다.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이무명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한빈이 말했다.

“일단 치료부터 받죠.”

한빈은 천천히 장자명에게 걸어가 사람 좋은 얼굴로 물었다.

“장 의원, 잘 지냈지?”

“그, 그럼요. 주군.”

장자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자 한빈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장 의원, 그냥 편히 대해.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사람인 줄 알겠어.”

“누가 그런 오해를 하겠습니까?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장자명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런 장자명의 모습을 본 김무병은 아까 그가 말한 악랄한 행동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확신을 못 하는 것이 그의 눈에는 아직도 하북팽가 최고의 겁쟁이였던 시절, 한빈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 * *

같은 시간 무씨검가.

하북팽가에서 돌아온 무소율은 하루라도 편히 발을 뻗은 적이 없었다.

한빈에게 진 것이 분해서일까?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한빈과의 비무 이후, 그녀의 마음은 완벽하게 바뀌었다.

한빈이 자신에게 짐이 되는 존재가 아닌, 힘을 보탤 수 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녀는 한빈과의 파혼을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는 즉시 그녀의 마음은 변했다.

바로 지금 눈앞에서 멍하니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무소위 때문이다.

석화교 사건 이후 한빈을 죽이겠다고 치를 떨던 동생 무소위가 어느 날부터 실성한 것처럼 연못 속에서 노니는 잉어만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니 표현이 다소 잘못되었다. 실성한 것처럼이 아니라 실성한 것이 분명했다.

용하다는 의원을 다 모셔 왔지만, 무소위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무소율이 무소위에게 다가갔다.

“소위야, 괜찮니?”

“…….”

연못에 쪼그려 앉은 무소위는 대답이 없었다.

“흠.”

무소율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제는 입술에서 나올 피도 없을 정도였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

무소율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녀에게 한빈은 애증 그 자체가 되었다.

뭔가 결심한 무소율은 무씨검가의 가주전으로 달려갔다.

덜컹.

거칠게 가주전의 문을 연 무소율은 잠시 멈칫했다.

가주전의 분위기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검가의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기죽을 무소율이 아니었다.

씩씩대며 한걸음에 가주 무서휘 앞으로 달려갔다.

가주 무서휘의 앞에 선 무소율이 포권했다.

“아버님을 뵈어요. 부탁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무소율은 지금 갑자기 들이닥친 것에 대한 책망은 달게 받겠다는 표정으로 가주의 말을 기다렸다.

가주 무서휘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뜻밖의 말에 무소율이 잠시 당황했다.

“늦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는 동생이 저리되었는데 넋을 놓고 있을 셈이냐?”

“지금 제가 드리려던 말씀이…….”

“백검대를 내줄 테니 소위를 저렇게 만든 놈을 잡아 오거라.”

“네?”

무소율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지금 가주가 말한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왜 놀라느냐? 이대로 있으면 강북의 문파들이 우리를 얼마나 업신여기겠느냐? 동생의 복수를 네게 맡기마. 산 채로 잡아 오든 목을 베든 그것은 네 결정에 맡기겠다.”

“존명!”

무소율은 깊숙이 포권했다.

그녀는 며칠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다.

세부적인 내용은 얘기를 안 했지만, 그녀는 하북팽가에서 한빈을 어떻게 잡아 올지 벌써 계획을 세워 두었다.

한빈을 잡아 오면 생길 하북팽가와의 마찰은 가주 무서휘가 해결하면 될 일.

무소율은 그 뒤의 상황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무소율은 출정 준비를 마쳤다.

지금 그녀의 앞에는 백의 무복을 입은 백 명의 무인들이 달빛을 가를 정도로 날카롭게 각을 잡고 정렬해 있었다.

무소율이 백검대에게 명했다.

“출발한다.”

“존명!”

백명이 무사들이 무씨검가를 나섰다.

하지만, 무소위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계속 연못만 보고 있었다.

지금 무소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움직임이 나타났다 지워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빈과의 비무 이후, 무소위는 한빈을 죽이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소위는 깨달았다.

지금 상태로는 한빈을 이길 수 없음을 말이다.

그러고는 석화교 위의 비무를 몇 번이고 떠올렸다.

한빈은 점쟁이처럼 자신의 발아래 바둑알을 깔아 움직임을 봉쇄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이던가?

무소위는 그때부터 연못 속 잉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잉어가 지느러미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해 봤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너무 불규칙적이었다.

그는 잉어의 방향도 예측해 봤다. 맞을 때도 있지만,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한빈은 자신의 움직임을 어떻게 예측했을까?

그것이 바로 화두였다.

무소위의 머릿속은 한빈이라는 그물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신의 보법으로 가득했다.

잉어를 보며.

물에 비친 자신을 보며 수많은 보법을 그렸다가 지웠다를 반복했다.

지금 무소위의 가슴속에 한빈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도리어 한빈은 무소위에게 있어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깨달음의 화두를 던져 주었으니 말이다.

무소율이 검가를 나선 후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소위가 쪼그려 앉은 연못에도 마찬가지로 비가 내렸다.

툭.

툭.

떨어지는 빗방울에 시야가 흐려졌다.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소위는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부좌를 틀었다.

텅.

가부좌를 튼 무소위의 몸 주변으로 빗방울이 비켜 가는 것만 같은 것은 착각일까?

그때 무소율을 보내고 답답한 마음에 비를 맞으며 정원을 걷던 가주 무서휘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가주 무서휘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빨리 소위 곁에서 호법을 서거라!”

“존명.”

무사들이 포권하며 무소위에게 달려갈 때 가주 무서휘가 뭔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소위의 곁에 어떤 변화도 주지 말아라. 비를 맞도록 그대로 두고 세 걸음 밖에서 경계를 하도록.”

그 말에 무사들이 말없이 포권했다.

* * *

그날 밤 한빈은 이무명과 함께 하북의 번화가를 거닐었다.

이무명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한빈은 이무명을 그대로 보내려는 것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전생의 기억대로라면 이무명은 반드시 하남정가에서 버림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무명이 돌아올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지금 지워 놓은 이 마음의 빚은 그를 강을 거슬러 돌아오는 연어처럼 만들 것이다.

“그만 들어가셔도 됩니다. ”

“괜찮네. 간만에 검으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친구가 생겼으니 아쉬워서 그렇지.”

한빈의 말투는 어느덧 편해졌다.

이무명도 마음속으로나마 주군처럼 대하기로 했다.

“사 공자님, 오늘 호의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의복까지 새로 마련해 주시고…….”

“에이, 별말을.”

한빈이 씩 웃었다.

그때 지나가는 부부가 한빈과 이무명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쌍둥이인가 보네. 어쩜 이렇게 똑같이 생겼죠?”

부부 중 여인이 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