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사마귀 뒤에 참새, 그 뒤에 독수리 (4)
삼 공자 팽무빈은 미칠 지경이었다.
모든 것은 형인 팽경빈과 어머니인 정화 부인의 책략이었다.
그런데, 왜 책략에 대한 실패를 자신이 져야 한다는 말인가.
팽무빈은 얼얼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장자명을 바라봤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분명 일은 정확히 처리했습니다.”
“혹시 잘못 푼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사용하는 식수는 정확히 우물 두 곳이었습니다. 다른 곳의 물은 전혀 쓰지 않는 것을 확인했고요. 그런데, 어떻게 실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산공독을 풀라 했더니 이게 뭡니까? 장 의원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영약이라도 먹은 듯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요.”
“그게 왜 제 책임입니까? 저는 천수장에서 그들의 노예 생활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팽무빈 공자님도 보셨잖습니까?”
“뭘요? 팔팔 날아다니는 걸요?”
“그들의 피부가 어떤지, 여기 들어왔을 때 어떤 거지꼴을 하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그게 영약 먹은 무사의 모습이었습니까? 어서 잔금이나 주시지요.”
“무슨 돈을 줍니까?”
“내가 산공독을 풀기만 하면 잔금을 치르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막내 놈 수하들이 저리 멀쩡한데 산공독을 풀었다니요!”
“허허, 이렇게 잡아떼시깁니까? 산공독을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값이라도 받아야겠습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구나.”
팽무빈의 말투가 싹 바뀌었다.
허리에 찬 도를 뽑아 든 팽무빈이 무섭게 장자명을 바라봤다.
“멸구하려는 겁니까?”
“멸구가 아니라 배신자를 처단하려는 것이다. 이 죽일 놈아.”
팽무빈이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며 다가가자 장자명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뒷걸음쳤다.
휙!
팽무빈이 막 칼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누군가 외쳤다.
“그때는 멸구가 아니라 토사구팽이라고 하는 거지.”
팽무빈이 칼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헉.”
그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곳에는 한빈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대체 왜 막내가 이곳에 온 것인지 팽무빈은 혼란스러웠다.
그것도 잠시 팽무빈이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네가 죽을 곳을 찾아온 것이구나.”
말을 마친 팽무빈의 칼이 한빈에게 향했다.
슉!
한빈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허리에 찬 월아를 뽑았다.
스르릉!
둘의 병장기가 허공에서 직선으로 만났다.
챙!
그 소리는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느껴졌다.
서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빈이 씩 미소를 피웠다.
칼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자꾸 여기서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계획대로 가자면 아직 그 단계는 아니었다.
한빈이 초식을 떠올렸다.
[일촉즉발(一觸卽發) - 몸을 화살처럼 쏘아 냅니다. 검 끝에 기를 응집합니다. 필요 공력 삼 년. 소모 후 열두 시진 후 회복.]
검을 곧게 뻗은 한빈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팽대위가 눈을 크게 떴다.
“검기?”
외침은 짧았다. 일단은 살인을 막아야 했다.
휙!
몸을 날린 팽대위가 어느새 둘의 사이에 섰다.
팡!
팽대위가 한빈의 검을 거도의 넓적한 면으로 막았다.
살짝 밀려난 한빈의 미소가 짙어졌다.
여기까지가 한빈의 본래 계획.
그때 팽무빈이 자리에 쓰러졌다.
털썩!
눈앞까지 날아온 검에 놀란 것이다.
게다가 한빈이 검기를 쓸 줄은 몰랐기에 더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팽무빈도 팽가의 직계.
꼴사나운 모습으로 계속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표정을 수습한 팽무빈이 다급히 일어났다.
“네놈이 진정…….”
팽무빈은 말을 맺지 못했다. 어느샌가 팽대위가 그의 아혈과 마혈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픽!
팽무빈이 수수깡처럼 대나무 숲 가운데 누웠다.
이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멍하니 이 광경을 바라보던 장자명이 한빈에게 포권했다.
“대협, 감사합…….”
하지만, 그도 말을 맺지 못했다. 역시나 팽대위가 그의 혈도를 제압했기 때문이다.
팽대위가 품에서 조그마한 피리를 불었다.
삑!
피리 소리가 대나무 숲을 뚫고 흘러 나갔다.
팽대위가 사용한 피리는 집법당 무사들을 호출할 때 쓰는 도구였다.
집법당 무사들은 이 피리 소리를 십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기에 그들을 소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무사 다섯이 팽대위의 앞에 도착했다.
그의 지시는 간단했다.
“둘 다 뇌옥에!”
* * *
장자명이 눈을 뜬 것은 두 시진이 지나서였다.
지금 장자명의 앞에는 한빈이 앉아 있었다.
“정신이 드시오?”
“아, 사 공자시구료. 아까는 고마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내 간단히 전달하리다. 조금 있으면 집법당주님이 들어오실 겁니다.”
“아.”
“그러면 내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십시오, 그게 살길입니다.”
“그게 대체…….”
“만약에 이 일이 퍼져 나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백독곡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흠…….”
“그럼, 거기에 남겨 놓은 사매는 어떤 심정일까요?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백독곡으로 돌아갈 때 사매에게 선물을 하기 위함이겠죠.”
“헉, 대체 어떻게 그걸…….”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말입니다. 만약에 중간에라도 마음이 바뀌신다면,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때 뇌옥의 문이 열렸다.
팽대위가 고개를 숙이고 좁은 뇌옥 문으로 들어왔다.
좁은 곳에서 보자 더욱 위압감이 느껴지는 팽가의 셋째 호랑이였다.
뇌옥에 들어온 팽대위가 말했다.
“심문을 시작하겠다! 죄인은 말할 준비가 되었는가?”
“네, 되었습니다.”
장자명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 공자가 말할 것이 있다고?”
“네, 사실 장자명 소협은 협의는 있으나 죄가 없습니다.”
“지금 뭐라 했는가? 사 공자.”
“이건 한 달 전 이야기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서두를 꺼냈다.
“……산공독을 풀지 못하고 돌아서는 장자명 소협과 눈이 마주쳤죠.”
한빈이 장자명을 바라봤다.
장자명이 마구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누워 계신 노모 때문에 의뢰는 받았지만, 맹호사대의 훈련장에 산공독을 풀어 놓기에는 장자명 소협의 의협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죠.”
팽대위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이 흥미진진하게 한빈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이야기가 잠시 끊기자 팽대위가 재촉하듯 말했다.
“뭐라 했느냐?”
“제안은 간단했습니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숨겨 달라고요.”
“아.”
팽대위는 탄성을 흘리고 대화를 듣던 장자명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장자명이 생각해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비무 당일까지 저희의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를 해코지하려던 장자명 소협은 마음의 빚을 영약으로 갚았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장자명은 살짝 눈물을 흘렸다.
한빈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위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지는 정녕 몰랐던 것이다.
물론 팽대위도 손뼉을 쳤다.
“오호, 그래서 갑자기 강해진 것이군.”
팽대위의 머릿속에 있던 의문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천수장에 대한 비밀을 당분간 지키려는 한빈의 의중도 숨어 있었다.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것도 사문의 비기를 탈탈 털어서 말입니다.”
“아하, 그러면 서로 은원은 없는 것이군.”
“저는 장자명 소협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장자명 소협의 사문이 어딘가?”
“경수산에 꼭대기에 있는 이름 없는 문파인데, 저는 비밀을 지켜 주고 싶습니다. 만일이라도 이 이야기가 새어 나간다면 파문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파문이라…….”
“비록 삼 공자에게 위협을 받아 실행한 일이지만, 정도를 벗어난 것은 확실하니 말이죠.”
“흠.”
“그래서 제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저도 피해를 본 것은 없으니 말이죠.”
“그래, 알았다. 심문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지. 그렇다면 삼 공자는 어떻게 할 텐가? 피해는 안 입었지만 사 공자가 그의 죄를 주장한다면 집법당에서 엄히 다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정화 부인이 부탁한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가능한 한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지.”
팽대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말대로였다.
이 공자와 사 공자 사이에 삼 공자가 끼어들어 어느 한쪽을 음해하려 했다?
이건 팽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위였다.
사실 먼저 비밀을 지켜 달라 부탁하려는 찰나에 한빈이 먼저 가려운 곳을 긁어 준 것이다.
팽대위는 흡족한 표정으로 뇌옥의 심문실을 나갔다.
찰칵.
문이 닫히자 장자명이 넙죽 절하며 외쳤다.
“대협,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신분에 대해 숨겨 주신 점도 감사드리고, 없던 이야기까지 만들어 저를 위기에서 구해 주신 점도 감사합니다. 제가 백독곡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대협께 보답하겠습니다.”
진심 어린 그의 읍소에 한빈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런데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한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장자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지금 어딜 간다고?”
한빈의 말투가 바뀌자 장자명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보은을 하려면 여기에서 나가 백독곡으로 돌아가야…….”
“그러니까, 누구 맘대로 간다는 거지? 장 소협은 내가 만만해 보여?”
“제가 어떻게 팽 대협을 만만히 보겠습니까?”
“그러니까. 보은을 하려면 여기 남아서 밤낮없이 봉사를 해야지, 어떻게 바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입에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와? 나는 지금 장 소협 몸에 다른 사람이 빙의한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아, 그러면 제가 여기에…….”
“에이, 걱정 마. 내가 잘해 줄 테니. 딱 삼 년만 버텨.”
“제가 왜 여기에?”
“뭐, 싫으면 백독곡으로 전서구 하나 날려 줄게. 백독곡의 장자경이라는 사람이 팽가 사 공자가 있는 천수장에 산공독을 풀었다고. 뭐, 특별 부록으로 백독곡과 친한 사천당문에도 날려 주지.”
“헉!”
장자명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이어 한빈이 말했다.
“내가 아까도 말한 거지만, 언제든 그만둬도 되니까, 무슨 노예 같은 걸로 생각하면 서운해.”
“그, 그게…….”
“어허, 괜찮대도? 지금이라도 말하면 전서구 날린다니까. 중간에 매한테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 튼실한 놈으로 한 대여섯 마리 한 번에 날려 줄게. 어떻게, 지금 날릴까?”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자명이 잽싸게 한빈의 허리를 잡았다.
“대협!”
“아, 징그럽게 왜 그래? 나 남자 안 좋아해. 그러니 대답만 해.”
“네, 삼 년 일하겠습니다. 팔이 부러져도 다리가 부러져도 소처럼 일하겠습니다.”
“내가 역시 사람 하나는 잘 봤어. 하하.”
호탕한 한빈의 웃음이 흐려져 갈 때 장자명이 물었다.
“처음부터 노리셨습니까?”
“노린 건 아니고 모두 자네와 삼 공자의 실수지.”
“제가 어떤 실수를 했습니까?”
“사마귀가 벌레를 잡을 때는…….”
“새겨듣겠습니다.”
“뒤에 참새가 쪼지 않을까를 살펴야 하거든, 그런데 사마귀란 놈은 자기 밥만 생각해. 그러니 참새한테 먹히지.”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장자명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