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사마귀 뒤에 참새, 그 뒤에 독수리 (3)
집법당 무사들이 사라지고 맹호사대의 호칭을 받은 한빈 일행만이 남아 있는 상황.
한빈이 심미호에게 턱짓했다.
한빈에게 신호를 받은 심미호가 포권하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때 소대섭이 슬쩍 다가왔다.
“주군, 그런데 집법당주님은 괜찮으실까요?”
“소 대주, 왜 그분 걱정을 해?”
“지난번에 무슨 병이 있다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아, 난독증 말이지?”
“네, 지금 서류 더미에 둘러싸여 계실 텐데…….”
“그러게, 그분 성격이 주화입마라도 걸리면 걱정인데 말이야. 감사 인사도 할 겸 한번 가 봐야겠네.”
“네, 한번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뭐, 그러지 않아도 집법당에 볼 일이 있어.”
“집법당에 볼일이라고요?”
“그건 비밀이야.”
한빈은 조용히 집법당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하북팽가의 집법당.
대위는 문서 더미 앞에서 기지개를 켜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의당에라도 가 보시죠.”
“아니야. 괜찮아. 그런데 깃발을 잘 전달했다고 했지?”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참, 무씨검가 쪽에서는 아무 말 없어?”
“네, 아직까지는 조용합니다.”
팽대위는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날 이후 무씨검가에서는 어떤 항의도 없었다.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의 골머리를 썩이게 만드는 것은 가주가 폐관에 들면서 넘기고 간 산더미 같은 서류였다.
어떻게 반나절 만에 서류 더미가 허리 높이만큼 쌓인다는 말인가?
그전까지는 일부러 서류를 검토하지 않다가 폐관에 들면서 모든 일은 떠넘긴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주전에서 집법당으로 피신을 했지만, 서류는 팽대위가 있는 곳으로 배달됐다.
그의 앞에 쌓여 있는 수많은 서류 더미는 날이 선 검보다도 무서웠다.
“제길!”
팽대위는 집법당까지 배달된 서류 더미를 걷어찼다.
그때였다.
집법당 무사가 조심스럽게 팽대위에게 걸어왔다.
“당주님!”
“무슨 일이냐?”
“투서가 들어왔습니다.”
“투서? 일단 가져와 봐.”
“둘째 마님께서 직접 들고 오셨습니다. 곧 도착…….”
무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화 부인이 호위를 대동하고 사뿐사뿐 걸어왔다.
가주의 둘째 부인이 등장하자 집법당의 무사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약간의 소란이 일자 팽대위가 손바닥을 보였다.
바로 조용해지는 무사들.
그 무사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정화 부인은 당당히 집법당의 한가운데에 섰다.
그녀를 본 팽대위가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수님.”
“네, 잘 지내셨습니까?”
“점심때 비무장에서도 뵙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투서라니 이게 무슨 말이죠?”
“새로 소가주가 된 막내 공자의 품행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요.”
“품행이라?”
“이걸 읽어 보시죠.”
정화 부인이 서찰을 건넸다.
서찰을 받은 팽대위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와락 구겼다.
난독증이 있는 자신에게 서찰은 독이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빽빽한 내용의 서찰을 건네자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서찰은 받은 걸로 치고 그냥 말로 해 주시죠.”
“그런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막내 공자가 천리 표국과 결탁했습니다.”
“천리 표국이라?”
팽대위가 눈썹을 꿈틀했다. 대충 상황은 들어서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런데 내부에서 그걸 쑤실 줄은 몰랐었다.
가주는 폐관에 들고, 첫째 부인은 친정에 가 있는 이런 상태에서 말이다.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자신의 친자식인 이 공자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그녀가 못 할 행동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화 부인이 잠시 뜸 들이는 팽대위를 재촉했다.
“모르시는 건 아니죠?”
그때였다.
뒤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
갑작스러운 기척에 정화 부인이 살짝 놀랄 때였다.
기침 소리의 주인이 말을 이었다.
“제 얘기를 하고 계셨나 봅니다.”
그곳에서는 한빈이 정화 부인을 보며 웃고 있었다.
살짝 입을 벌린 정화 부인 대신 팽대위가 앞으로 나왔다.
“그러지 않아도 부르려던 참이다. 지금 너의 행실에 대한 투서가 들어왔다.”
팽대위가 서찰을 흔들었다.
그것도 잠시, 그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투서가 들어온 이상 집법당주로서 감찰의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감찰이 목적이 아니라 후계 구도를 염두해 둔 정치질이라는 것을 팽대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집법당주로서 공정해야 했다.
그의 표정을 본 한빈이 깊숙이 포권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해명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팽대위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뒤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동시에 심미호가 달려왔다.
그녀는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한빈에게 건넸다.
한빈은 팽대위와 정화 부인을 번갈아 보다 서찰을 정호 부인에게 건넸다.
“이걸 읽어 보시는 것이 이해가 빠를 듯합니다.”
정화 부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물론 팽대위는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팽대위에게 가득 쌓인 서류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다.
그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것은 팽가에서 한빈이 최고였다.
서찰을 읽은 정화 부인이 미간을 좁혔다.
“이게 어쨌다는 건가? 막내 공자.”
“경쟁자와의 결탁이 아닌 거래입니다.”
“천수장을 관리하는 데 대한 비용은 누가 책임지지?”
쏘아붙이지만, 소가주 후보인 한빈에게 예의는 갖추는 부인이었다.
한빈이 정중히 말했다.
“요약된 계약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책임집니다.”
“그럼 소유권도 사 공자에게 있고, 책임도 사 공자에게 있다는 건가?”
“보시다시피요.”
한빈이 서찰을 가리켰다.
이것은 관에서 공증을 받아 온 서류.
서류의 직인을 살핀 정화 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가문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건가?”
“모든 책임은 제가 가져갑니다. 저는 이것을 집법당주님께 공증받기를 청드립니다.”
한빈이 눈을 빛냈다.
이 정도의 공격은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진다는 것은 천수장에 대한 소유권이 가문이 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앞으로 얻게 될 이익을 누구와도 나누기 싫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되어야 했다.
한빈은 그 확인을 여기서 받으려는 것이다.
“장담할 수 있나?”
“네, 소가주 후보의 신물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천수장에서 나오는 불이익, 이익 모두 온전히 제가 받을 것을 이 검을 걸고 맹세합니다.”
한빈이 검을 높이 들자 팽대위가 자신의 거도를 바닥에 찍었다.
쿵!
“그 맹세를 나와 내 칼이 기억하겠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듯한 분위기에 정화 부인이 한 걸음 나왔다.
그것은 한빈의 눈에 마지막 발악처럼 보였다.
치마를 끌며 앞에 선 정화 부인은 잠시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그럼, 실추된 팽가의 명예는 어떻게 할 건가? 사 공자.”
“팽가의 명예가 실추되었습니까?”
“경쟁자와의 거래 자체가 팽가의 명예를 실추한 것이라 보는데.”
“훈련을 위해 경쟁자를 이용한 것이 팽가의 명예를 실추한 것입니까?”
“이용당한 게 아니라 이용한 것이라는 것은 어떻게 장담하지?”
“그건 비무의 결과로 대신하겠습니다.”
“음.”
정화 부인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것도 잠시 정화 부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럼 네가 했던 모든 일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지거라. 가문이 도움 없이!”
“네, 그리하겠습니다.”
“만약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 검을 내려놓거라.”
그 뜻은 하나였다.
소가주 후보 자격을 내려놓으라는 의미.
한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저도 부탁 하나 하지요.”
“말해 보아라.”
“만약 제게 도움을 청하실 일이 생긴다면, 그때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부탁이라…….”
“다른 건 아니고 이 호위를 제게 주십시오. 물론 제가 그를 실력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먼저겠지요.”
“풋.”
정화 부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빈은 정화 부인 옆에 있는 호위를 바라봤다.
호위의 이름은 이무명.
한빈이 탐내는 무사였다.
성씨는 다르지만, 하남정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절정의 검객.
그를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한빈은 이무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허리에 일렁이는 선명한 점.
한빈은 넘어가려는 침을 겨우 참았다.
한빈의 말에 실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사 중 하나가 속삭였다.
“개작두 아래에 목을 디미는 거잖아.”
“혹시 모르지.”
“누가 이길까?”
“에이, 비무가 이루어질지도 결정이 안 난 거잖아.”
그들의 웅성거림은 팽대위의 눈빛에 막혔다.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진 실내.
정화 부인이 말했다.
“허락하지. 그것도 내가 증명하겠다.”
팽대위가 도를 높이 들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그거 말고 그냥 문서로 약속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팽대위가 입을 가리고 헛기침했다.
그 모습에 정화 부인은 냉기를 펄펄 날리며 나갔다.
정화 부인이 나가자 팽대위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가시 돋친 꽃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찌 보면 서류를 보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았다.
“휴.”
한숨을 내쉰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 공자는 왜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것인가?”
“부탁드릴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해 보아라.”
“집법당주님께 비무를 청하고 싶습니다.”
“내게 비무를…….”
팽대위는 웃음을 참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것이었다.
겨우 표정을 수습한 팽대위가 말했다.
“좋다.”
“그럼 가시지요.”
말을 마친 팽대위가 탁자 위에 서류를 집더니 뒤로 던졌다.
“그래, 가자!”
“대신, 장소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보아 둔 곳이 있더냐?”
한빈이 쓱 옆을 훑어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비밀입니다.”
“하하, 농담은 말고 어서 안내하거라.”
* * *
잠시 후.
한빈은 팽대위를 정화 부인의 처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나무 숲으로 안내했다.
“하필이면 왜 이쪽인가?”
“잠시만 목소리를 좀 낮추시죠.”
“흠.”
팽대위는 헛기침했다. 기척을 줄이는 것은 비무의 조건 중 하나였다.
팽가 내부의 이목을 끌지 않고 싶다는 한빈의 부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점 깊은 숲속까지 안내하는 한빈의 태도를 팽대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팽대위가 눈매를 좁혔다.
어디선가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비무를 하자고 여기까지 끌고 온 한빈도 이상하지만, 여기까지 들어와 대화를 나누는 이는 더 수상했다.
팽대위가 먼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쉿.”
“…….”
한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팽대위의 뒤를 따라 기척을 줄이고 대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그들의 대화 소리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들릴 거리까지 도달했다.
그들은 삼 공자 팽무빈과 백독곡의 장자명이었다.
우연일까?
물론 우연이 아니었다.
한빈은 심미호가 표시해 둔 길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일단 안내했으니 편안히 앉아서 앞으로 펼쳐질 경극 한 편을 감상하기만 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