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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37화 (37/621)

37화. 사마귀 뒤에 참새, 그 뒤에 독수리 (1)

다급히 표정을 수습한 팽경빈은 한빈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분명 한빈은 마공서를 숨기고 있습니다.”

“또, 헛소리더냐?”

“아닙니다. 막내가 마공서를 품고 있는 것은 모두가 본 사실입니다.”

“흠.”

잠시 헛기침한 팽대위가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어색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게 마공서라는 말씀인가요?”

“그렇다. 그것을 보고 네 수하가 이지를 상실하는 것을 난 똑똑히 보았다.”

“마공서는 아니지만, 비급이기에 이걸 보여 드릴 수는 없습니다.”

“보여 주지 못하겠다면 떳떳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팽경빈의 얼굴빛이 조금 살아나자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님께는 보여 드리지 못하지만, 이게 마공서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주실 분께는 보여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단상에 앉아 있는 가주 팽강위를 바라봤다.

그 시선만으로 모두는 한빈의 뜻을 알았다.

시선을 받은 가주 팽강위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무대 위로 날아왔다.

그 모습에 좌중들은 입을 턱 벌렸다.

거대한 호랑이가 하늘을 뒤덮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빈의 앞에 선 팽강위는 무심하게 두루마리를 빼앗아 들었다.

탁.

두루마리를 펼쳐 든 팽강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장 위에 적힌 내용은 분명 계약서였다.

팽강위가 물었다.

“분명 이것이 맞느냐?”

“네, 맞습니다. 가주님, 끝까지 읽어 보시면 이해되실 겁니다.”

“그래, 읽어 보마.”

팽강위는 천천히 계약서를 읽어 나갔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팽가의 대호(大虎).

구경꾼들은 목을 다시 길게 뺐다. 이제는 목이 몸에서 떨어질 정도였다.

계약서를 다 읽은 팽강위는 조용히 조호를 바라봤다.

“네가 서명한 것이더냐?”

“네, 그렇습니다. 가주님.”

“무슨 생각으로 서명을 했더냐?”

“그, 글을 잘 모릅니다.”

조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자 팽강위의 입에서 호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껄껄!”

그 웃음에 비무대 위 모두의 눈이 커졌다.

오로지 한빈만이 그 웃음에 작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진한 웃음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가주 팽강위가 외쳤다.

“마공에 대한 혐의는 없다. 그리고 이번 비무는 사 공자가 승리했음을 정식으로 선포한다. 이제 약속을 이행하라.”

“존명!”

집법당주 팽대위가 깊숙이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그때 돌아서려던 가주 팽강위가 이 공자 팽경빈을 바라봤다.

“이 공자에게 오늘부터 반년간 폐관을 명하는 바, 즉시 시행하도록!”

한겨울 새벽 바람 같은 지시에 집법당주 팽대위가 다시 포권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팽대위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팽강위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연무장 위에서 한빈은 팽경빈을 바라보며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약속을 이행하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팽경빈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누굴 원하는가?”

“이것도 달아 놓겠습니다.”

한빈이 씩 웃으며 정화 부인이 있는 단상을 바라봤다.

한빈이 원한 것은 딱 한 명이었다.

절정검 이무명.

하지만, 그는 지금 팽경빈의 수하가 아닌 정화 부인의 호위로 있다.

그의 무위를 탐낸 정화 부인의 욕심에서 벌어진 변화였다.

그가 팽경빈의 수하로 들어간다면 한빈은 재빨리 낚아챌 것이었다.

사실 이 비무에 대한 보상은 팽경빈의 내기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큰 보상 하나가 막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팽대위가 거도로 비무대 위를 찍었다.

쿵!

그 울림의 끝에 외쳤다.

“집법당 무사들은 들어라. 이 공자를 폐관동에 가둬라.”

“존명!”

복창한 집법당 무사들이 팽경빈 소매를 양쪽에서 잡았다.

끌려가던 팽경빈이 외쳤다.

“집법당주님!”

하지만, 팽대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때 한빈이 물었다.

“집법당주님, 이 두루마리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건 됐다.”

팽대위가 손을 흔들었다.

난독증에 걸린 그는 글자는 보기도 싫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신 그는 조호를 바라보며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조호라 했지?”

“네, 그렇습니다.”

“시간 날 때 집법당으로 놀러 오너라.”

“감사합니다, 집법당주님.”

“그리고 까막눈이라 고개 숙이지 말아라. 무인의 힘은 붓이 아닌 칼에서 나오니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당황한 조호가 말을 더듬었다.

정적 제거라는 첫 번째 보상을 얻은 한빈은 휘적휘적 비무대를 내려왔다.

동시에 구경꾼 무리가 마차 바퀴가 지나간 자국처럼 갈라졌다.

하북 최고의 겁쟁이가 만들어 낸 생경한 광경에 모두가 놀랐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수호사대 대원들조차 한빈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오직 철노만이 한빈에게 달려갔다.

“공자님, 고생하셨어요.”

“참, 철노 내가 시킨 건 찾아왔어?”

“아, 그렇지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철노가 사라지자 한빈은 정철민에게 다가갔다.

“아직 계셨군요?”

“그럼,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 도리지. 오늘 정말 시원했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소연이는 또 없어졌네요. 사람을 풀어 찾아보겠습니다.”

“아닐세, 이제 올 때가 됐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정소연이 커다란 자루를 끌고 낑낑대며 오고 있었다.

“휴.”

자루를 자리까지 끌고 온 정소연이 이마에 땀을 닦자 정철민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소연아, 그게 다 무엇이더냐?”

“제가 벌었어요.”

“뭘 벌었다는 게냐?”

“아까 제 돈 다 걸었잖아요. 그게 이렇게 돌아왔어요.”

정소연이 자루를 활짝 열자 정철민이 입을 벌렸다.

“헉! 이게 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곳에는 철전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한빈도 그제야 어찌 된 것인지를 알고 미소를 지었다.

“소연이가 내게 돈을 걸었구나?”

“네, 한빈 오라버니를 믿고 걸어서 이렇게 벌었어요.”

“그래, 잘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은 다 어디에 쓸 것이냐?”

“시, 시, 아니. 그냥 모아 둘 거예요.”

“그래, 도둑맞지 않게 할아버지에게 맡기거라.”

한빈은 정소연을 보고 웃었고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정철민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철노가 헉헉대며 한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정철민이 물었다.

“철노, 자네도 돈을 걸었는가?”

“저도 조금 걸었지만, 이건 공자님 돈이에요.”

철노가 자랑하듯 자루를 활짝 열었다.

정철민이 헛숨을 들이켰다.

“허, 그거참.”

자루 속에는 철전이 아닌 은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팽가의 한 달 예산을 싹 쓸어 담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의 자금이었다.

정철민의 생각은 반 정도는 맞았다.

팽가 무사들의 한 달 봉급이 녹아들어 있는 돈이니 말이다.

그 후 한빈과 대화를 이어 나가던 정철민이 정소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뒤쪽에서 다가오는 수호사대 무사들을 봤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들.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예의였다.

“소연아, 이제 가자꾸나. 그리고 오늘 고마웠네.”

정철민이 고개를 돌려 한빈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언제든 놀러 오십시오.”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정철민과 정소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수호사대 무사들이 어느덧 한빈의 뒤에 도착했다.

“주군!”

“주군!”

똑같이 한빈을 부른 그들은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밥부터 먹자.”

순간 실 끊어진 연처럼 모두의 긴장감이 풀렸다.

“하하.”

“허허.”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 *

하북팽가 가주전.

팽강위가 태사의에서 팔짱을 끼고서 대전의 문을 바라봤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고 누군가가 달려왔다.

팽강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늦게 왔군.”

“네, 일 좀 처리하느라 늦었습니다.”

“그럼, 뒤에 숨긴 거나 이리 내놓고 편안히 앉게.”

“아, 어떻게 아셨습니까?”

팽대위가 뒤에 숨긴 호리병 두 개 중 하나를 내밀었다.

호리병을 받은 팽강위가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좋은 술이군.”

“네, 제가 돈 좀 벌었습니다.”

팽대위가 넉살 좋게 웃었다.

“돈을 벌었다고?”

팽강위가 눈매를 좁히자 팽대위가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공돈이 생긴 겁니다.”

이번 비무에 대한 내기에 돈을 걸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솔직히 팽대위가 돈을 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난독증 때문에 팽경빈에게 걸려고 했던 것을 한빈에게 잘못 걸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드시죠.”

“그러지.”

술병이 허공에서 기분 좋게 부딪쳤다.

탕!

그 여운의 끝에 팽대위가 입을 열었다.

“둘째에 대한 처벌은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혹시 비무에 져서입니까?”

“아니네, 그것은 가문을 멸시한 것에 대한 벌이네.”

“가문을 멸시했다고요?”

“그 얘기는 그만하세. 가주의 권한이라 생각하게.”

대화가 잠시 끊기고 다시 술을 들이켜는 소리만 울렸다.

살짝 눈치를 보던 팽대위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막내는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무엇을 말하는가?”

“그 비급 말입니다. 저도 궁금했지만, 형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아, 그건 비급이 아니었어.”

“네?”

팽대위가 눈을 크게 뜨자 팽강위가 웃었다.

“비급은 아니지만, 비급이라고 할 수도 있지.”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건 계약서였어. 그러니까…….”

설명을 다 듣고 난 팽대위가 입을 벌렸다.

“헉! 그래서 조호와 장삼이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인 것이군요.”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인 게 아니지. 이지를 상실한 상태가 맞았어. 동생 같으면 내가 돈 한 푼 안 주고 부려 먹는다면 이해할 수 있나?”

말을 마친 팽강위가 팽대위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나 팽대위는 도리질 친다.

“당연히 이해 못 하죠.”

“그럼 실수했을 때 열 배로 배상하라면?”

“그것도 좀……. 듣고 보니 악마 같은데요.”

“하하, 동생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팽강위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가주전 밖으로 새어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정도였다.

그 웃음의 끝에 팽강위가 눈매를 좁혔다.

“깃발을 내리게.”

“깃발을 내린다면…….”

“동생이 생각하는 그 깃발이 맞아. 이번 비무를 통해 가능성을 보여 줬으니 보상을 줘야지.”

말을 마친 팽강위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총관이 하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은 팽강위의 앞에 붉은색 천을 가지런히 펼쳤다.

팽강위가 그 앞으로 가 붓을 들었다.

휙!

휙!

팽강위의 붓끝이 망설임 없이 천 위에서 미끄러졌다.

탁!

붓을 멈춘 팽강위가 천을 바라보며 태사의 옆에 있는 거도를 들었다.

슁!

거도로 바닥을 그은 팽강위는 진각을 밟았다.

쾅!

동시에 천이 분리되었다.

분리된 천은 누가 봐도 깃발의 모양이 되었다.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깃발을 바라보던 팽강위가 말했다.

“이 깃발은 자네가 전해 주게.”

“형님이 직접 안 하시고요?”

“나도 오늘부터 폐관에 들어야겠네. 막내 놈을 보고 조금 깨우친 게 있어서 말이지.”

팽강위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의 오른손에 딸려 나오는 은빛 물체.

물체를 본 팽대위는 재빨리 포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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