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싸움의 법칙 (4)
깊숙이 허리를 숙인 장삼이 말했다.
“주군, 저에게도 술법을 걸어 주십시오.”
“알았네. 장삼.”
한빈이 장삼에게 특제 수련용 박도를 건넸다. 그러고는 다시 품속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알았지, 장삼?”
“…….”
장삼은 말이 없이 한빈을 노려봤다.
꼭두각시가 되겠다는 결심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오로지 분노가 심장을 뚫고 튀어나올 뿐이었다.
그는 눈이 시뻘게진 채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비무대 위에서 마주한 두 명의 무사.
바람이 비무대 위를 스산하게 스쳐 지나갈 때.
쿵!
팽대위가 거도를 찍는 소리에 비무가 시작됐다.
상대가 기수식을 취할 때 장삼은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아악!”
이쯤 되자 수호사대 무사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좌중도 알 수 있었다.
챙!
챙!
장삼의 박도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상대 측은 막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밑에서 비무를 지켜보던 수호사대 무사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장삼 선배가 저렇게 빨랐나?”
“그런데 우리 무위가 퇴보한 게 아니었어?”
그들은 서로 눈빛을 마주치다 시선을 한빈에게 돌렸다.
분노에 박도를 휘두르고 있지만, 장삼도 분명 느끼고 있었다.
한 달 전에 이렇게 박도를 휘둘렀다면 분명 체력이 버텨 내지를 못했을 것이었다.
거기에 중요한 것은 상대의 동작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털썩!
이 공자 측 무사가 다시 쓰러졌다.
이로써 수호사대의 승리가 확정된 것이다.
진행자로 나선 팽대위가 거도를 높이 올렸다.
“이번 비무는 사 공자 측이 승리했음을 선포한다!”
팽대위는 높이 들었던 거도를 비무대 바닥에 찍었다.
쿵!
비무대가 마치 거대한 북이 된 것처럼 울렸다.
마치 한빈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이 공자 팽경빈이 다급하게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의를 제기합니다.”
“지금 무슨 말인가?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집법당주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승패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뭐라? 승패의 문제가 아니면 무슨 문제라는 거지?”
“막내 쪽 무사들은 마공을 쓴 것이 분명합니다.”
마공이라는 말에 순식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어쩐지 이상했어.”
“마공이라면 이해가 되지.”
“아까 보니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장내가 술렁이자 팽대위가 거도를 바닥에 찍었다.
쿵!
순식간에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지자 팽대위가 말을 이었다.
“마공이라? 이 공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이류 무사가 일류 무사를 이겼습니다. 그것도 팽가의 이류 무공인 왕자사도를 가지고요. 집법당주님, 지금 막내 측 무사의 상태를 보십시오.”
팽경빈이 조호와 장삼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장삼과 조호는 승리의 기쁨도 모른다는 듯 넋이 나가 있던 것이다.
눈이 시뻘게진 채 말이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의심.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비무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는 상황.
가주 팽강위는 눈썹을 꿈틀댔다.
감정의 저울이 한빈에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강한 놈에게 우두머리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 팽강위의 생각.
그 강함의 속에는 가문에 대한 헌신도 포함된다. 그것은 가주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
그런데 지금 팽경빈은 가문을 헌신짝처럼 버린 모양새였다.
팽가의 기본 도법을 이류라 했고 수호사대의 무사를 이류라 칭한 것처럼 보였다.
수호사대도 엄연한 팽가의 일원.
게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공을 운운했다.
마공을 익혔다면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하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떠들 일은 아니었다.
가주 팽강위가 자신이 팔걸이를 잡았다.
부르르.
의자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팽경빈은 멀리서 자신을 쏘아보는 가주의 시선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저는 저 칼과 막내의 품속에 들어 있는 비급이 마공과 관계있다고 장담합니다.”
말을 마친 그가 미소 지었다.
팽경빈은 한빈 측 상황을 빠짐없이 보고받았다.
칼을 보고 살짝 놀라고 품속에서 비급을 펼치자 조호와 장삼이 이지를 상실한 상태로 비무대 위에 올랐다는 것을 말이다.
“흠.”
팽대위가 헛기침했다. 지금 상황은 그야말로 진퇴양난.
승부가 정해진 상항이었지만, 마공을 운운하며 달려드는 이 공자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한빈 측 무사들이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러 이긴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마공을 썼는지를 밝힐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진짜 마공을 썼다면 수호사대의 문제가 아니라 팽가 전체의 위상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이 정철민이 만들어 준 특제 수련용 도(刀)를 들고 비무대 위로 걸어왔다.
한빈이 비무대 위로 오르자 모두가 침을 삼켰다.
한빈의 행동에 따라 축제의 현장이 처형장으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빈의 표정을 오늘따라 유난히 밝았다.
마치 연못의 연꽃이 만개한 모습이었다.
한빈은 팽경빈의 앞에 섰다.
“형님이 하신 말씀,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활짝 웃는 표정에 비해 어투는 건조했다.
뭔가 이상하다 느낀 팽경빈이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팽경빈이 눈매를 좁혔다. 한빈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화공이 아무 생각 없이 화선지에 붓을 놀린 듯 만든 표정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지금 상황은 기호지세.
팽경빈이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이지. 남아일언 중천금! 우리 팽가의 소가주 후보로서 내가 한 말은 지키겠다.”
“지금 팽가의 소가주 후보라고 하셨습니까?”
“당연한 사실을 물어보다니 너도 마공에 미친 것이냐?”
“죄송합니다. 저는 형님이 하남정가의 소가주 후보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 그게 무슨…….”
팽경빈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호의가 아닌 적의에 가까웠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막내 한빈이 마공에 손을 댔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
팽경빈이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말을 돌리지 말고 마공을 익힌 죗값을 치러라.”
그때 한빈이 손에 든 도를 말없이 내밀었다.
슥.
멀뚱히 서 있던 팽경빈이 그 도를 받았다.
도를 받은 팽경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에게 건네받은 무기에는 무겁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어떤 특징도 없었다.
그때 팽대위가 손을 내밀었다.
“그 도를 줘 보거라.”
“여기 있습니다.”
팽경빈이 도를 내밀자 팽대위가 그것을 받아 한 번 휘둘렀다.
팽대위의 눈빛이 순간 변했다. 이를 본 팽경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팽대위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한빈에게 물었다.
“팽가의 도보다 한 근가량 무겁구나?”
“네, 맞습니다.”
“보통 도보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있고.”
“네, 맞습니다.”
“평범한 무사라면 이 도를 휘두르지 못할 테지.”
“네, 맞습니다.”
판화를 찍어 내는 듯한 대화.
하지만, 그 내용에 장내는 다시 술렁였다.
“뭐야, 보통 무사는 휘두르지 못한다면 진짜 마공을 익혔다는 거야?”
“그런데, 왜 휘두르지 못하지? 내가 보기에는 평범한 도 같은데.”
구경꾼들의 의문을 날려 준 것은 다음 팽대위의 말이었다.
“무게중심이 쏠려 있는 도에 이 정도 무게가 더해진다면, 실제 초식을 펼칠 때의 무게는 네 배 정도로 느껴지겠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치.
초식을 펼치다 보면 움직이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있다면?
그것은 초식을 펼치는 무인에게는 두세 배의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팽경빈이 여유 있게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이류 무인이 아까 비무 때 보여 줬던 속도를 내기란 힘들다는 것이 아닙니까?”
“정확하다.”
말을 마친 팽대위의 표정이 한겨울 살얼음을 덮어 놓은 것처럼 바뀌었다.
서서히 돌아가는 팽대위의 고개.
그의 시선이 조호와 장삼에게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 팽대위의 입이 열렸다.
“조호라 했던가?”
“…….”
시선을 받은 조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행동이 집법당주에 대한 불경이라는 것도 잊은 채.
팽대위가 외쳤다.
“조호는 비무대로 올라오너라.”
“그런데, 제가 지, 진짜 마공을…….”
“올라오지 않으면 내가 내려가겠다!”
팽대위가 내공을 담아 외치자 억울한 표정으로 조호가 비무대로 올랐다.
비무대로 올라온 조호의 완맥을 팽대위가 틀어쥐었다.
휙.
순식간에 완맥을 잡힌 조호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까지 시키는 대로 하고 노예 계약서까지 속아서 썼는데 마공이라니!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조호의 혈맥에 진기를 흘리며 관찰하던 팽대위의 표정을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 표정을 보던 팽경빈의 입꼬리는 점점 올라갔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팽대위가 조호의 완맥에서 손을 뗐다.
구경꾼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 모든 진상이 밝혀질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팽대위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저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고민을 할 뿐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팽대위가 한빈을 바라봤다.
“왜 속였느냐?”
“제가 속이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의 대화에 사람들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목을 길게 뺐다.
모두의 시선에 화살처럼 비무대 위에 꽂힐 때 팽대위가 말했다.
“조호가 일류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말이다.”
그 말에 가장 놀란 것은 조호였다.
“제, 제가 일류의 경지라고요?”
하지만, 팽대위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한빈에게 다시 물었다.
“호위대의 경지가 올랐다면 당연히 가문에 보고해야 하는 것이 가칙이 아니더냐?”
“네, 알고 있습니다. 그 기한이 한 달이라는 것도요.”
“그렇다면…….”
“맞습니다. 한 달 전까지 조호는 분명 이류의 무인이 맞았습니다.”
그 말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뭐야? 한 달 만에 일류의 경지에 올랐다고?”
“뭐, 그럴 수도 있지.”
“아니지, 조호라면 이류 중에도 아래 단계였잖아. 그런데 한 달 만에 어떻게 일류의 경지에 올라?”
이번에는 팽대위도 술렁임을 막지 않았다. 자신도 그만큼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집법당주님, 백 근의 칼을 만 번 휘두르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흠.”
팽대위는 눈매를 좁혔다.
이류에서 일류로 단시간에 오른 비결을 여기에서 물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신만의 비급을 모두에게 알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뭐, 당연하게도 가장 어이가 없는 이는 조호 본인이었다.
생고생을 했던 한 달 동안 무공이 퇴보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 주군인 한빈을 남의 고통을 보며 즐기는 변태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갑지가 팽대위가 조호를 일류라 하자 머릿속이 멍해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때 멍하니 있던 조호를 깨운 것은 팽경빈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팽경빈은 말끝을 흐렸다. 잘못하면 사람을 시켜 산공독을 풀었다고 외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