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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35화 (35/621)

35화. 싸움의 법칙 (3)

정소연이 두 팔을 벌리더니 한빈을 안았다.

“한빈 오라버니!”

“소연이구나.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네.”

“허허, 우리 손녀가 요즘은 편식도 안 하고 잘 먹어서 많이 컸다네, 빨리 커야 시집을 간다나 뭐라나…….”

“할아버지!”

정소연이 빽 소리치자 정철민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자네가 부탁한 것은 내가 잘 만들어 놨다네.”

“뒤에 있는 것이 저희가 쓸 물건입니까?”

“그렇다네, 자네 부탁대로 날은 안 세웠으니 수련용으로는 충분할 거야. 그런데 왜 이리 무거운 칼이 필요한 건가? 게다가 무게중심도 안 맞고 말이네.”

“이 칼에 딱 맞는 무사들이 생겨서요, 오늘 일이 끝나면 언제 한번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한빈이 작게 포권하자 정철민이 웃음 지었다.

한참을 웃던 정철민이 두리번거리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소연이가 안 보여서 그러네.”

“그럼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지.”

그때 마침 잠시 사라졌던 정소연이 돌아왔다.

“할아버지!”

“에고, 할아버지가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저도 이제 다 컸단 말이에요.”

“그래, 알았으니 이제 가자.”

정철민이 정소연의 손을 잡고 떠나려 할 때였다.

정소연이 정철민의 손을 뿌리쳤다.

“할아버지, 나 구경하고 갈래요.”

“무슨 구경을 한다고 그러니?”

“비무 구경이요. 한빈 오라버니 수하랑 악당 오라버니 수하랑 싸운대요. 저는 한빈 오라버니 쪽에 걸었어요.”

“뭐, 돈을 걸어?”

“이거 보세요.”

정소연이 무지개색 전낭을 탈탈 털며 땡전 한 푼 안 남았음을 보여 줬다.

그 모습에 어색하게 웃은 정철민이 정소연의 부탁을 승낙했다.

그들의 대화에 소연을 찾으러 갔던 한빈이 끼어들었다.

“그럼 제 옆에서 관전하도록 하시죠.”

“험, 그래도 되겠나?”

“그럼요. 어르신. 친구분이신 이설영 총관님도 근처에 계실 겁니다.”

“고맙네.”

한빈은 수하를 시켜 정철민과 정소연을 자리로 안내했고 나머지 대원을 시켜 마차 뒤 상자를 자리로 옮겼다.

* * *

한 시진 후.

가주 팽강위가 단상에 자리하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늘의 비무는 집법당주인 팽대위가 관장하기로 했기에 그는 단상에 자리하는 대신 비무대에 중앙에 자리 잡았다.

팽대위가 외쳤다.

“둘째와 넷째는 중앙으로 나오도록!”

동시에 한빈과 팽경빈이 자리로 나왔다.

결전을 치를 주인공이 모이자 팽대위가 말을 이었다.

“이번 비무는 약속한 대로 전통적인 비무 방식을 택하겠다. 둘째와 넷째는 상대할 무사들을 고르도록.”

여기서 전통적인 팽가의 비무 방식이란?

상대편에서 상대할 무사를 고르는 것이었다.

자신이 있으면 강자를 고를 테고 자신이 없으면 약자를 고를 것이었다.

자존심을 내세우다 승부에서 질 수도 있고 자존심을 세우면서도 승리를 따낼 수도 있었다.

선택은 한빈과 팽경빈의 몫.

모두가 침을 삼킬 때 한빈이 상대를 지목했다.

“난, 저들로 선택하겠습니다.”

한빈의 선택에 세 명의 무사들이 당당하게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순간 비무대 주변에서 울리는 함성.

“와아아!”

“이 공자의 호위다.”

“강남 쪽에서 유명한 무인들이라지.”

모두의 웅성거림에 팽대위는 한빈이 고를 무사들을 살폈다.

그러고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지금 한빈이 선택한 것은 하남정가에서 데려온 일류 무인이었다.

누가 봐도 이번 비무 자체가 무리였다.

한빈이 왜 저들을 골랐을까?

팽대위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승패가 갈렸으니 자존심이라도 찾자는 것이 한빈의 의도라 생각했다.

물론 다른 이들도 한빈의 지목한 무사들을 보고는 똑같이 생각했다.

“승부는 끝났네.”

“누가 걸릴지 모르겠지만, 수호사대만 불쌍한 거지.”

“역시 수호사대에 안 들어가길 잘했지.”

모두가 수군거릴 때 팽경빈이 상대를 선택하기 위해 눈을 빛냈다.

조호는 재빨리 팽경빈의 시선을 피해 재빨리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때 팽경빈의 목소리가 울렸다.

“거기!”

“…….”

하지만, 조호는 고개를 숙인 채 침만 삼켰다.

어차피 비무가 끝나면 돈을 받고 팽가를 떠나면 그만인데 칼을 들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팽경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기 고개 숙인 호위.”

조호가 고개를 들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팽경빈이 빙긋 웃으며 손짓하자 울상이 된 조호가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제 팽경빈의 선택할 수 있는 무사는 둘이 남았다.

수호사대 대원을 살피던 팽경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고개를 숙였던 이들이 위풍당당하게 팽경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람도 잠시 팽경빈은 그 이유를 알았다.

고개를 숙이면 지목당할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수호사대 대원을 살피던 팽경빈의 시선이 멈췄다.

허리를 두드리던 무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쪽 호위는 비무대 위로 나오시게.”

팽경빈이 가리킨 것은 장삼이었다.

호위들은 모두 놀랐다.

팽경빈은 지금 수호사대의 약자만을 잡아 골라내고 있었다.

마지막 지명이 끝나고 이제 삼 대 삼 비무에 출전할 무인이 정해졌다.

중앙에 선 팽대위가 외쳤다.

“첫 번째 무사 나오도록!”

그의 외침에 이 공자의 무사가 날듯이 비무대로 올라섰다.

누가 봐도 몸이 가벼워 보였다.

한빈 측에서는 순서대로 조호가 나갈 차례였다.

조호가 막 비무대로 향하려 할 때였다.

한빈이 말했다.

“비무용 도(刀)는 저걸 써.”

“저걸 쓰라고요? 주군.”

조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흑빛 박도가 여러 자루 놓여 있었다.

조호는 그 도를 잡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별다를 것 없는 도였다.

날도 없는 것이 수련용으로 따로 제작한 것이 분명했다.

이번 비무는 날이 없는 수련용 병장기를 쓰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박도를 보던 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칼을 쓰든지 관계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적당히 피하다가 두 손을 들며 항복을 표시하고 내려올 것이었다.

그때 한빈이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며 조호에게 속삭였다.

순간 조호의 눈이 커졌다.

세상이 끝난 듯한 표정으로 올라간 조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팽대위의 거도가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

쾅!

그 울림이 끝나기도 전에 이 공자 측 무사가 검을 뽑아 곧게 찔러 들어왔다.

슝!

조호의 상태가 이상했다.

붉으락푸르락하던 조호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오는 검을 반보 비키며 피했다.

동시에 외쳤다.

“다 죽여 버리겠어. 이 나쁜 새끼야!”

그 외침에 이 공자 측 무사가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제까지 볼 수 없던 극도의 적대감이었다.

분명 전의를 상실한 상태라고 들었다.

최대한 화려한 초식을 써서 누르라고도 부탁받았다.

그런데 저런 이상한 상태라니?

하지만, 지금은 비무를 진행하는 상황.

이 공자 측 무사는 의문을 지우고 본능적으로 초식을 전개해 나갔다.

‘황학초보(黃鶴草踄)’

황색 두루미가 풀을 밟고 지나가듯 무기력한 상대를 제압하는 초식이었다.

두루미의 긴 다리가 지나가듯 그의 검이 화려하게 비무대 위에서 놀았다.

그의 검이 조호의 목덜미에 다다른 순간.

챙!

조호의 박도가 그의 검을 막았다.

순간 이 공자 측 무사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상대의 칼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공자 측 무인은 단 일 합으로 수많은 의문을 떠올렸다.

분명 이류라 들었었다. 그런데 상대의 눈은 자신의 검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이 압도적인 무게감이란?

그가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조호의 박도가 정면으로 들어왔다.

“죽어!”

외침과 함께 정직하게 들어오는 조호의 박도.

이 공자 측 무사가 재빨리 막았다.

탕!

부르르.

검이 떨리며 살짝 밀렸다. 덕분에 그의 머리카락 한 올이 잘려 나갔다.

서걱.

무사의 눈이 커졌다.

이 공자에게 전달받은 정보는 모두 거짓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것도 아니었고 상대가 이류 무사도 아니었다.

이 정도의 중압감은 일류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발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류의 내공에 힘이 더해진 공격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일류였기에 여기서 질 수는 없었다.

팡!

무사가 검을 뻗었지만, 조호의 박도에 막혔다.

챙!

예상 못 한 전개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대등하게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분노를 표출하고 싶을 뿐이었다.

조호가 지금 공격하고 싶은 것은 이 공자의 무사가 아니라 한빈이었다.

조호는 비무대에 오르기 전 한빈에게 계약서에 대해 들었다.

계약서에는 비무에서 질 경우 열 배 배상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함정이 있었다.

그것도 받기로 한 돈의 열 배였다.

즉, 비무에서 진다면 은전 백 냥을 한빈에게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즉 처음부터 주군인 한빈이 자신을 평생 노예로 삼으려고 계약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비무가 끝나면 팽가를 떠나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부르르.

분노에 조호의 박도가 떨렸다.

“죽어!”

조호의 박도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챙!

챙!

팽가의 가장 기본적인 도법인 왕자사도(王子四刀).

왕자사도는 왕(王) 자 모양을 본떠 만든 도법이었다.

옆으로 긋고.

아래로 내려치고를 반복할 뿐이었다.

모든 동작이 간단했지만, 그 위력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점점 밀리던 이 공자 측 무사가 연무장 끝까지 밀렸다.

챙!

챙!

벼랑 끝에 선 이 공자 측 무사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쉼 없이 조호의 칼날을 쳐 내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이 공자 측 무사의 눈이 점점 커졌다.

칼의 간격은 그대로인데, 조호의 몸이 점점 다가왔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조호의 몸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칭!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느려졌고 그 끝을 장식한 것은 호박 깨지는 소리였다.

빡!

가까이 붙은 조호가 이 공자 무사를 머리로 박은 것이다.

휘청.

순간 상대가 비무대 밖으로 떨어졌다.

명백한 조호의 승리지만, 어떤 함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구경꾼들도 놀란 것이었다.

그들이 아는 조호의 경지는 이류, 하남정가 무사의 수준은 일류였다.

단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가주 팽강위의 입술이 꿈틀댔다.

그의 눈에 중요한 것은 하북팽가의 이류 무인이 하남정가의 일류 무인을 꺾은 것이었다.

비무가 시작되고 나서는 둘째와 넷째의 승패는 관계없었다. 오로지 하북의 대표하는 도의 명가와 하남을 대표하는 검(劍)의 명가가 붙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가주 팽강위가 손뼉을 쳤다.

짝.

단 한 번의 울림이지만, 그로 인해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구경꾼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

그 함성을 누르는 팽대위의 목소리.

“사 공자 측의 승리, 다음 무사 나오도록.”

그의 지시에 조호가 자리로 들어갔다.

천천히 들어오는 조호를 본 장삼이 일어났다.

조호는 넋이 나간 듯 장삼을 쓱 지나쳤다. 마치 실성한 것처럼 말이다.

사실 조호는 지금 정신 줄을 놓은 상태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모든 울분을 비무대 위에서 쏟아 내고 온 느낌이었다.

그때 다음 비무를 재촉하는 팽대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무가 진행될 수 있도록 다음 무사는 빨리 나오도록.”

그 말에 장삼이 한빈과 조호를 번갈아 바라봤다.

장삼이 보기에 한빈은 조호에게 이상한 술법을 쓴 것만 같았다. 마치 마공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일류 무인에게 단 한 번만 승리할 수 있다면!

그게 마공이든 정파의 무공이든 관계없었다.

주군의 꼭두각시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기고 싶었다.

장삼이 한빈에게 포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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